• 새 부대를 만들어 놓고
    헌 술을 담으려는 정의당
    [기고] 2002체제의 방식으로 2020체제를 맞이하는 애처로움에 대해
        2020년 01월 28일 01: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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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 비례대표 선출과 관련한 의견과 제안, 이번 비례 선출에 반영되지는 못하더라도 2020 연동형 선거제 시대에 맞는 비례대표 의원 선출 방안을 고민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한 당원의 기고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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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옛것이 갔는데 새것이 오지 않은 것을 위기라 했던가요. 새것이 왔는데 옛것이 가지 않은 것은 그럼 애처로움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그 옛것의 덕을 많이 봤기에 그렇습니다.

    19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15년이 지난 2002년에는 정당명부제가 최초 도입되었고, 이로부터 18년이 지나서 연동형 비례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2002년 체제를 앞장서 이끌어낸 민주노동당은 당시엔 그 열매도 차지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당은 기껏 2020 체제의 새 부대를 만들어 놓고, 과거 2002 체제의 생존방식이라는 헌 술을 담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강을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뗏목을 메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려 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2. 정당명부 ‘진보1당’제의 2002체제

    2002체제는 1인2표제, 즉 1표(지역구 후보)에 더하여 또 다른 1표(지지 정당)가 최초로 생겨난 체제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1인 1표제로서, 지역구의 후보들에게만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이렇게 받는 표를 합쳐서 ‘전국구’ 의원을 배정했습니다, 특정 정당을 지지해도, 자기가 사는 지역구에 그 정당의 후보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정당에 투표를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역구 출마자들의 표를 합산하는 것은 ‘간접투표’로서 ‘직접투표’의 헌법규정에 위배된다는 점을 민주노동당이 헌법소원을 통해 지적했습니다. 그리하여 유권자가 ‘직접’ 정당에도 투표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지역구 중심체제는 무너졌고, 2002 정당명부 체제가 열렸습니다.

    제도개선에 앞장선 민주노동당은 그해 지방선거에서 8.13%의 지지를 얻어 6.3%의 자민련을 누르고 (지지율로는) 제3당이 되었으며, 광역비례 9명을 포함해 총 11명의 광역의원과 2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켰고, 22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광역의원 한명을 배출하기 위해 (당시 기초의원은 정당공천을 받을 수 없었고 따라서 당연히 기초엔 비례의원도 없었습니다) 십수명 씩의 지역구후보들이 나서서 ‘희생플라이’를 자처하며 나선 것은 신생 민주노동당의 에너지이자 2002체제에 적합했던 선거전술이었습니다.

    지방선거에서의 약진 덕분에 연말의 대선에서 TV 토론에 참여할 자격(?)을 쟁취했으며, 2년 뒤에는 지역구 2명을 포함한 10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원내에 진출하게 됩니다. 기존의 국회의원들이 모여 신당을 창당하는 것이 아니라, 원외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정당이 원내로 진출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처음이었습니다. 한편, 당시에도 복수의 진보정당들이 활동했으나 원내에 진출한 것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 민주노동당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과의 연계, 노동자 밀집 지역의 지역구 정치만으로도 2004년의 원내 진출은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도적 차원, 체제론적 차원에서는 2002년에 스스로 쟁취해낸 ‘정당명부’제도 역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역구에 (많이) 출마하지 않아도 정당이 지지를 획득하고 존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987체제가 대통령을 직접 뽑는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뤄낸 체제라면, 정당도 직접 뽑는 체제가 2002체제로서, 이 시대는 ‘정당명부 시대, 다당제 하의 진보1당시대’였습니다.

    1987년 민주주의의 첫 단추를 채운 이후 15년 만에 정당명부제로 두 번째 단추를 채웠다면, 그로부터 또 18년이 흘러 이제 2020년에 세 번째 단추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2020체제의 본질은 ‘연동형 비례제’일 것이고, 다당제는 기본에, 진보1당이 아닌 진보다당 시대로 본격 접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 중도도 다당제로 분화될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는 진보정당이 앞장서서 의제를 제기했는데, 특히 세 번째 단추는 ‘탄핵 이후 촛불연합’의 힘으로 채워졌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글의 애초 주제는 아니지만, 탄핵은 어찌보면, ‘태극기 부대’의 시각과는 전혀 달리, 지극히 ‘체제 수호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제도의 틀거리 내에서 평화적으로 최고권력자를 몰아 낼 수 있다는 것은, 1987체제의 완결성을 증명합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1987체제가 시효를 다 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탄핵을 만들어낸 촛불연합의 힘이 국회 내에서는 4+1이라는 이름으로 개정 선거법을 통과시킨 것은, 당사자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1987체제를 극복하는 2020체제의 수립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쩌면 탄핵의 시작은 2016년 총선이었고, 마무리는 2017년 대선이 아닌 2020총선인지 모르겠습니다.

    3. 연동형 ‘진보다당’제의 2020체제

    (연동형 비례제도 제도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바로 4절로 가셔도 좋겠습니다)

    50%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정당 지지율에 대해 전부(100%)는 아니지만, 50%는 의석수에 연동시키게 되었습니다. 300석 정원의 국회에서 어느 정당의 지지율이 20%면 60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연동형(100%) 비례대표제의 취지입니다. 연동률이 50%라는 것은 이 60석의 50%인 30석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며, 이 정당이 지역구에서 10석을 얻은 경우라면 30(보장)-10(지역구)=20(비례), 즉 20석 만큼은 비례에서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자 오히려 정당지지율 보다 지역구에서 많이 당선되던 정당들이 걱정이 생겼습니다. 최소한의 염치도 없이 위성정당을 만들어서 제도의 취지 자체를 흔들어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금도 공공연히 선거법과 정당법 위반행위를 하는 제 1야당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체 47석의 비례 의석 수 중에서 ‘연동형’ 부문은 30석으로만 캡을 씌워, 나머지 17석은 지역구 당선자와 무관하게 배정하자는 여당의 의견 역시 ‘정당지지율보다 의석을 많이 가져가는’ 정당으로서의 고민의 발로라 하겠습니다.

    ‘30석 캡’은, 전체 비례 47석 가운데 이렇게 ‘연동형’으로 배정하는 비례대표 의석수를 총 30석으로 제한하고(연동형으로 배정받을 각 정당의 비례의석수가 30석이 넘으면, 이를 30석 기준으로 비중대로 다시 배정합니다), 나머지 ‘병립형’ 17석은 기존에 하던 대로 (지역구와의 차이를 보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지지율만큼 (지역구에 더해서)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50%라는 연동률에 30석 캡으로 연동‘향’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진전이 기쁜 소식인 것은, 정의당이나 녹색당과 같이 지역구에서의 불리함을 전국지지율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게 된 정당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권자의 의사’가 좀 더 정확하게 반영되는 것을 바라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선거제도 덕분에 이제 2002년 체제를 넘어 더욱 ‘국민과 닮은 정당’들이 더 국회로 많이 들어가서, 21대 국회 부터는 더더욱 ‘국민과 닮은 국회’로 나아갈 기틀이 잡혔습니다. 이미 어느정도 시작된 ‘다당제’의 경향은 강화될 것입니다. 단순히 양당제에서 다당제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당제 내에서도 ‘진보다당, 중도다당, 보수다당’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측합니다.

    정의당 비례대표 선출 시민선거인단 제안 기자회견 모습(사진=정의당)

    4. 과거 2002체제의 유산

    총 비례의석수는 늘어나지 못했지만, 기존 2002체제의 정당명부제에 ‘연동형’이 더해진 덕분에 새로운 2020체제에서는 다당제의 성격이 앞서 말했듯 더욱 강화되고, 비례대표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역시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시대’에 새로운 체제의 시대정신에 맞는 ‘당적인 실천’이나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안타깝게도 ‘비례정당 극복’이라는 프레임 등, 기존 패러다임 내에서의 기획, 우려와 논쟁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비례정당 극복’ 이 외에도 당내외에서 극복해야 하는 여러 과거의 유산에는 △진보1당 시대의 유산 △의제 설정 이전에 당내인력과 외부영입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는 유산 △당내 비례 선출시 1인1표제의 유산 △비례후보 선거운동 금지의 유산 △비례후보 및 지역후보의 개별 기탁금의 유산 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4.1. 비례전문정당, 극복해야하는가, 아니면 강화해야 하는가?

    지역구는 무시하자는 이야기로 잘못 전달될까 두려워 제일 조심스러운 것이, ‘비례정당을 극복하자는 생각’을 극복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비례전문정당’이라는 평가는 기존 2002체제에서는 그동안 ‘정당이 지역구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석패율제 미도입’으로 많은 후보들이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비례후보로서 출마 의지를 보이자, “지역구에서 출마를 많이 해야 정당득표도 많이 나온다, 지역에서 근거지를 마련해야 하는데 걱정” 이라며 많은 분들이 “이래서 우리가 ’비례정당‘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독일식 연동형, 혹은 그렇게 까지는 안 되더라도 전체 300석에서 비례 의석수를 늘릴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왔습니다. 이번에도 비례의석수는 75석, 캡 없는 연동률 100%를 주장했습니다. ‘국민을 닮은 국회’, ‘정당지지율 만큼의 의석’은 ‘비례정당’의 성격이 강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겉으로는 자아를 인정해 달라며 동시에 속으로는 부정해온 것 일지요.

    ‘비례정당’은 부끄러운 평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구가 아니라 비례로 출마하는 것이 미안한 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비례후보 선출과정이 진정한 축제와 잔치판이 되도록 하는 전당적인 기획입니다. 당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과거 지역구에서 얼마나 많이 낙선했는지부터 이야기하시는 비례 후보님들! 미안해하지 맙시다. 과거의 헌신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당하게 미래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리 밝히는 이 글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개별 후보들의 선거인단 확보도 중요하고, 각자의 지지자 규합과, 당내외 조직과의 연계의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당내 분위기가 달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비례정당을 극복’하자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할 일들이 아닙니다. (물론 단순한 반편향으로 ‘비례정당(성)을 강화’하자는 문제의식만으로 해결될 일도 역시 아닐 것입니다)

    연동형시대의 진보정당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총선 시기 이전부터 시대정신을 담은 의제를 발굴하고 이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제출하는 등, ‘평소실력’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소실력이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총선시기에는 평소실력의 연장으로, 구체적으로는 메시지와 메신저(후보)를 통해서 당의 비전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연동형시대에는, 지역구 후보가 많아지는 것보다도, 무엇보다 비례명부를 통해서 당의 비전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실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지역구 후보가 한명 늘 때마다 정당지지율이 0.1% 정도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원 하나 없던 2002년처럼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할까요? 오히려 ‘비례명부 구성 과정에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당지지율 30, 40, 50%!’를 외칠 수 있는 의제를 발굴, 배치하여, 정당지지율을 5%, 10% 올리는 기획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지역구 출마는 정당지지율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지방자치의 관점 속에 지속적으로 도모해 나가야 합니다. 지역구 총선 후보가 당의 지역 조직과 함께 기초와 광역지자체에서의 정치라는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정치인의 단련과 검증의 차원에서 접근할 사안입니다. ‘지역에서 출마해야 정당지지율도 오른다’는 것은 2002체제의 낡은 유산입니다.

    4.2. 연동율과 비례의석수,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무엇보다 2020년에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의제의 선정과 배치를 통해 당의 내적 성장과 외연 확대를 도모하는 것을 넘어, 애초 선거법 개정안으로 상정했던 ‘연동률100%와 비례의석수 75석‘을 향한 또 한 발의 전진을 위한 디딤돌을 놓아야 합니다.

    국민들이 “아! 이러기 위해서 정의당이 선거법 개정하자고 했구나”라고 감탄하고, “아 이래서 연동률을 더욱 강화하고 비례의석수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구나”라고 선거법의 추가 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많은 ‘선수’들이 했던 고민들이나 우리의 현 상황을 돌이켜보면 과연 맞는 방향이었는지 걱정이 됩니다. ‘지역에서 고생할 지역구 출마자에 대한 4년뒤/현재의 인센티브’로, ‘대표의 사당(私黨)화 반대/당의 외연 확장을 위한 대표의 전략적 운신의 폭 보장’으로, 각개약진하는 당의 훌륭한 활동가들의 ‘시민선거인단 확보’ 및 ‘당내 조직간 표 대결’로, 이러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습니까? 국민들이 “선거법 개정이 이래서 필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4.3. 전략 없는 비례 명부

    전략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청년전략, 호남전략, 브랜드전략, 무지개전략은 총선기획단의 전략제안이었습니다. 1.19 전국위원회 결정 이후에는 청년정치플랫폼, 사회적약자당사자 플랫폼, 시민연대플랫폼이라는 이름 아래 비례명부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구성할지에 대한 고민이 진행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냉정히 평가하면 이러한 전략은 ‘연동형 시대의 첫 선거’를 맞이하는 ‘기획’이라기보다는, 순간 순간의 상황에 대응하는 ‘대책’의 성격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대책들로 국민들에게 ‘정말 연동형이 좋은 거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다음 국회에서 연동률과 비례의석수를 더 늘리는 선거법 개정의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정의당의 비례 명부안은 1)시대정신에 걸맞는 의제를 선보이고, 2)이 의제들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기 위해 당 내외 인사들을 발굴하여 규합하며, 3)이 과정에서 당 활동가들이 성장하고 당의 외연이 확장되도록 하되, 4)절차는 당내 민주주의에 충실한, ‘4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전국위의 안은 ‘전략은 부재한데, 일부 당의 외연 확장의 가능성은 열어두었으나 당외부(시민사회)에 상당히 무례하며, 당 활동가들의 성장은 방임하였고, 당내민주주의는 총투표로 갈음한’ 안이라고 평가합니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이상은 그저 ‘당원 총투표’로 앙상한 뼈대만 남았습니다. 청년과 장애인을 일부 배치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제출할 입장을, 각각의 의제들과 초대손님들을 당내 총투표의 결과 합산으로 줄세워 결정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지요? 당내 투표 70%와 개방선거인단 30%의 투표를 합산한 결과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의 후보를 선출하는데 시민선거인단이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당의 정체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토론은 있었지만, 제가 과문해서인지 당의 의제를 어떻게 선정하고 배치할 지에 대해서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별다른 논의를 못 본 것 같습니다. 당의 의제 배치는, 각각의 의제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출마자들이 등록하면, 이들에 대해서 당원들이 (선거인단과 함께) 1인1표를 행사하여 순위를 정하면 되는 문제일까요?

    어떤 정당이 내세우는 가치는 구체적으로 ‘의제의 선정과 배치’로 나타난다고 하면, 이것을 전 당원 총투표로, 그것도 1인 1표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생협조합원이자 노동조합원이며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고 세입자의 주거권이 보장되기를 바라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한반도 평화의 관점에서 평화군축을 이야기하고 플랫폼 노동의 시대에 불안정 노동의 권리 보장의 방법을 고민하는 당원’들에게, ‘그 중에 하나만을 고르시오’라는 방식으로 줄을 세워 정당의 의제를 선정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바람직해 보이진 않습니다

    4.4. 진보정당과 대중조직, 시민사회의 협력 방식

    당내 인력 양성과 외부인사 영입을 반드시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당내인사들로만 후보진을 꾸려서 10명이 당선되는 것 보다, 당의 정체성에도 맞는 외부인사 2~3명이 결합하여 당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끌어내어 총 20명이 당선된다면, 이는 명분으로나 실리로나 훌륭한 선택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구성 방식과 절차였을 것입니다. 지난 1.19전국대회에 제출되었던 비례명부 구성방식은 수정안이 채택되었거니와, 원안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했으니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평소에 조직 대 조직으로 협력을 잘 해야 한다는 말씀도 다른 분들이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는 전혀 다른 점을 추가로 지적해 보고 싶습니다.

    애초에 영입을 안 한다면 모르되, 당 외에서 영입할 만한 의제와 인사를 초대해 놓고, 그 의제와 후보들의 순서를 당내 득표력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것이 2020연동형 체제, 진보‘다당’시대에 정당이 시민사회를 대하는 바람직하거나 예의를 갖춘 태도일까요? 아니면 당에서 먼저 의제를 배치하고, 왜 그렇게 배치했는지를 책임있게 설명하며 시민사회의 협력을 구해야 할 문제일까요?

    예컨대 환경운동 진영과 사회적 경제 진영을 초대해 놓고, “당신들 사이에서의 순위는 와서 열심히 선거운동해서 성적을 받아가라”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까요? 그게 아니라 “우리는 어떠어떠한 이유에서 귀 부문을 이 순번에 배치했습니다. 그래도 이러이러한 상황이니 같이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4.5. 비례명부 구성 방식

    이번에야 선거법 개정이 워낙 닥쳐서 이뤄졌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다음 총선 때는 미리미리 의제를 선정, 배치하고, 이를 대표할 당내외 인사를 발굴하여, 당외 인사의 경우에는 미리미리 입당을 권유하여 피선거권에 대한 특례규정을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닥쳐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아주 없을 수는 없을테니, 최종승인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전제로 하되 일부에 대해선 지도부의 전략적 운신의 폭을 보장해주는 것도 검토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가칭으로서, 당원이라면 누구나 어떤 주제로든 출마해서 경쟁할 수 있는 ‘일반명부’, 각종 의제들을 선정한 ‘의제명부’(의제들 간의 순위 결정 방식은 별론), 기존의 당 활동가들이 기여도에 따라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성장명부’, 당의 외연 확장을 위해 지도부에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확장명부’를 각각 25:25:25:25 라던가, 30:30:20:20 라던가, 40:20:20:20 같은 비율로 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규에서 정한 장애인 할당과 무관한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입니다)

    이 경우 일반명부와 성장명부는 각각 1인1표제로 다득표순위로 순위를 결정하고, 의제명부와 외연확장을 위한 명부는 각각 투표하되 후보자간 경합이 없을 경우는 찬반투표로 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분야가 4개로 너무 복잡하다면, 누구나 경쟁할 수 있는 일반명부와, 특정 의제나 국회 상임위원회를 염두에 둔 전략명부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투표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뒤따르는 문제겠습니다.

    4.6. 비례 명부 선출, 1인1표제로 해야 할까 1인 다표제로 해야 할까?

    현재까지 비례 후보 선출 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전략명부’에 순번을 부여할지, 여기에 비당원이 포함될지, 당 대표의 추천권을 어느정도의 폭으로 인정할지 등을 둘러싸고 벌어졌습니다. ‘명부 구성’이 아닌, 당권자의 권리 행사 방식, 그 중에서 1인 1표제와 다표제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부 구성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1인1표제는 과거 일어났던 ‘승자독식’문제에 대한 반성 속에 도입된 것입니다. 1인 다표제가 언뜻 보기엔 유권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았지만, 어떤 정파가(정파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투표수’ 만큼의 후보자를 ‘셋팅’해서 내보내면, 예컨대 힘이 센 정파는 1인 4표제에서는 4명을, 1인7표제에서는 자신들이 셋팅한 7명을 모두 당선시킬 수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전체 의석수가 10석도 안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되면 최대 정파 1-2개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습니다. 이렇게 몇몇 정파가 모든 선출직을 독점, 혹은 과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인 1인 1표제입니다. 그런데 이는 2002체제의 산물이자 고육지책입니다. 전체 의석수 20석을 기대하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과거와는 달리 정파구도도 많이 완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파에서 모든 의제를 다 다루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비례 명부를 전부 전략의제로 채우는 것도 아니니, 비례명부에 배치할 주요 ‘전략의제’가 만약 7개라고 할 때, 각 정파에서 이 7개의의 전략의제에 모두 후보를 출마시키기도 힘들 것입니다.

    설령 모두 출마시켜도, 당선자가 20명이면 1/3 수준 밖에 안 됩니다. 그래도 걱정이라면, 전략의제 중 3개 정도를 고르라는 식으로 중요도를 선택하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경우 7표가 아니라 3표를 행사하게 됩니다. 일반명부에서 1표, 성장명부에서 1표, 의제명부에서 3표를 행사하면 1인 5표에, 확장명부는 찬반 투표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1인1표제에서 당원들은 후보자 개인 한명이나 의제 하나를 지지할 수는 있지만, 당내의 의제의 순서나 후보자들의 순서에는 의견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단체장 ‘후보’를 뽑는 것과 달리, 지역구 ‘후보’를 뽑는 것과 달리, 비례후보의 ‘명단’은 그렇게 1인1표 단순다수제로 진행해서 득표순으로 순위를 정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집단지성이 어떤 안을 ‘성안’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 총투표라는 방식은 안을 ‘승인’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안을 만드는 것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도부나 각급 대의원들이 이 명단과 의제의 전략적 배치를 도모할 권한이 있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이 문제에 관한한 정의당은 무정부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연동형 비례제도를 부르짖은 정당이 막상 제도가 도입되어 ‘아젠다 셋팅’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밖에는 대처할 수 없는 것일까요?

    4.7. 비례후보 선거운동 금지, 기탁금 : 지역구 중심체제의 유산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역(구)에서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의 2020체제에서는 지금 ‘지역구에서 한명이라도 더 출마해야 정당지지율도 오른다’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접근으로 판을 흔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와중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또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비례정당 극복하자’는 프레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비례후보는 선거운동을 못한다는 것, 그리고 비례명부의 후보가 모두 기탁금을 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잠시 잊은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2016년에 몇 가지 결정을 한 바가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서 한 발을 더 나갔어야 하는데, 이번 선거법 개정에서는 이 부분을 완전히 빠트렸습니다.

    현행 1,500만원의 기탁금은 지역구 후보 포함, 전부 낮추어야 하겠으나, 비례대표제의 경우 전혀 다른 차원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1명만이라도 당선되면 명단의 모든 후보들이 반환 받는 비례후보의 기탁금은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신생정당이나 소수정당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이유로 2016년에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비례대표제는 거대정당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다양해진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여 사표를 양산하는 다수대표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고액의 기탁금액은 기탁금 반환 요건과 결합해 사실상 기탁금 전액을 반환받을 가능성이 큰 정당에게는 아무런 제약으로도 작용하지 않는 반면, 기탁금을 반환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신생정당이나 소수정당에게는 선거에의 참여, 나아가 정당의 후보자 추천을 함에 있어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게 된다”

    (2016.12.29. 헌법재판소, 사건번호 2015헌마1160, 공직선거법 제 56조 1항 제2호 등 위헌 확인 결정요지 중 발췌))

    그런데 이번 선거법 개정에서 위의 헌재 판결에 따라 공직선거법 제56조 1항을 개정했어야 했음에도 개정과정에서 누락되어, 2020년 1월 12일에는 선관위가 국회에 선거법 재개정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비례후보는 선거운동을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 녹색당은 억지로라도 한 명이 지역구에 등록을 한 후, 이 지역구 후보의 유세에 비례후보들이 연설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 2016년의 헌재판결에서도 현행 규정을 인정해버린 상황입니다.

    그러나 2020체제의 취지로 보나, 비례의석수 비중을 현행 47석에서 75석으로, 나아가 100석으로 늘리고 지역구를 200석으로 줄이며, 연동률을 50%에서 100%로 늘리자는 정의당의 입장에서 보나, 비례후보 역시 선거운동이 가능하도록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기탁금의 경우는 비례후보가 각각 1,500만원씩 내는 것이 아니라, 비례명단을 통틀어서 일정액의 기탁금을 받는 것으로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5. 새로운 2020체제의 선거운동과 의제

    연동형 시대의 비례명부의 구성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구체적인 순위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방식이야 어떻게 하든, 목표는 비례명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촉발해내고 정당지지율을 높이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소선거구제의 지역구에서는 표를 얻기 힘든 소수자와 소수의제를 대변하면서도, 당내 비례 선거를 잔치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당은, 3%를 넘어서 비례후보 기탁금을 반환받을 수 있느냐는 고민을 하는 정도는 벗어났습니다. 따라서 모든 비례후보의 기탁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의석수보다 많은 후보와 의제를 최대한 내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비례의석수가 47석 밖에 안되어, 연동률이 50%밖에 안되어, 30석 캡이 씌워져 있어서, 정의당의 비례의원이 이만큼만 당선된 것이라고, 우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선거법을 한 번 더 개정하면서는 연동률을 올리고, 캡을 벗기고, 비례의석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칠 근거를 스스로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국민과 닮은’ 후보들을,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후보들을 국회에 보낼 수 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비례후보의 선거운동을 허하고, 비례부문 기탁금도 조정하는 선거법 개정을 해야 합니다.

    지역구에서는 후보 개인과 당의 지역조직에 함께 지역에 대한 장기적 전망과 지역조직들과의 협력 방식을 고민하면서 선거운동과 지역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방자치단체를 수권하기 위해서 기초와 광역의회에 진출하는 것과 별개로, 총선시기 총선후보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역에서 풀어내고, 후보와 조직이 ‘소모’되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계기가 될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비례명부에 ‘성장명부’를 도입하고, 비례부문에서 늘어날 의원들과 매칭하여 역할분담을 하는 4-8년의 중장기 기획도 필요할 것입니다.

    6. 결론

    구체적인 시대정신의 내용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는 플랫폼으로 불안정 노동이 심화되는 시대, 누군가는 기후위기의 시대, 누군가는 사회적 경제가 부상하는 시대, 누군가는 주거와 복지의 양극화의 시대, 누군가는 차별금지의 이정표를 세울 시대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2020체제의 첫 선거에서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며 이를 당적인 실천으로 연결하는 기획이 없고, 개별 후보들이 득표를 위해 자신의 이력과 장점을 호소하는 병렬적 나열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획을 세우실 분들이 각자 자기 지역구나 비례후보로 출마한 상황이라 자기 표 확보가 급해져서 당 전체를 보는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지게 된 것 일지요. 그렇다면 일찌감치 선대본부장이 비례명부 당선권 내에서 배수진을 치는 순위를 부여 받는 것이 대안일지요. 혹은 민주적이면서도 전략적인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요.

    지역구로 출마하시는 분들께는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도적으로 이 헌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안을 같이 궁리해보겠습니다. 비례로 출사표를 던지신 분들은, “비례정당 극복해야 하는데 비례로 나와서 미안해..” 하지 마시고, ‘연동형 비례제’가 본질인 2020체제에서 정의당이 나아갈 길과, 본인의 비전을 당당히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비례의원 늘리기 위해 선거법 개정한 거 맞잖습니까.

    ‘제네럴리스트’로서든, ‘스페셜리스트’로서든, 2020체제에서 정의당의 의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으실 것인지가 저는 더 궁금합니다. 과거의 낙선횟수로 상징되는 기여도나, 어떤 당내외 조직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무슨 사건으로 유명해졌는지도 한 후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안임에는 분명하지만, 향후 비젼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솔직히 유명세나 과거 출마경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당의 비례명부가 ‘큐레이터의 혼이 담긴 전시회’는 못 될지언정, 여성안심 주차 및 장애인 차량을 위한 지정공간 몇 개 외에는 아무 기획 없이, 그저 선착순으로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정당은 ‘백화점’이나 ‘명품 편집샵’이 아니지만, 심지어 백화점이나 편집샵에도 최소한의 ‘디피’(디스플레이)의 기획의도는 있는 시대입니다. 2020체제를 이끌어낸 정의당이 그 첫 선거에서부터 바로 자신의 공로만큼의 열매를 가져갈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필자소개
    정의당 마포 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