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민주의가 욕설이라고? 사회주의가 금기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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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29일 08: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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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와 자유, 그리고 빵마저 빼앗겨도 노동은 또 살아간다. 하지만 ‘꿈’마저 자본에게 빼앗길 때 우리는 과연 살아갈 수 있는가.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이 대선 당시 노무현후보의 정치 광고음악으로 사용되었을 때, 어느 시사평론가는 “상상마저 겁탈 당했다”며 분노했다.

    유령처럼 금기시되는 단어 ‘사회주의’

    주대환 민주노동당 전 정책위 의장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욕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내에서 유령처럼 금기시되는 언어는 오히려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는 욕설이 아니라 합법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대중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되는 ‘불문율’처럼 규제 당하고 있다.

    선거에서 나타나는 표는 확실히 균질적이지 않은 정치행위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표에 대한 성격에 의해 진보정당이 규정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얻은 2백만표 중에 다수표가 ‘사민주의’에 대한 지지표라는 근거는 일종의 ‘소설’이다.

    아마도 그 표의 상당수는 배타적 지지에 따른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표일 것이며, 일선에서 전사한 민주노동당 지역후보들과 당원들의 노력에 의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표일 것이다. 그 표들의 성격엔 지금 ‘정책적 동의’는 들어있을지 몰라도 ‘사상적 동의’는 들어있지 않다. 현재까지는.

    민주노동당의 사상적 지표는 ‘국가사회주의 오류와 사민주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영국노동당이 중도좌파 정당이라는 희극적인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당 강령이 ‘사민주의를 뛰어넘는 정당’임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에 기생한 것은 ‘당 강령’이다?

    민주노동당이 영국노동당으로 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잘못 들어선 길을 멈추고 원래의 갈림길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갈림길의 좌측 길을 선택해야 한다.

    돌아 나오기 싫고 좌측 길도 부정한다면 ‘국가사회주의 오류와 사민주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당 강령을 삭제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혼란을 부추기는 당 강령’이 당에 기생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블레어주의의 충실한 종인 스티븐 바이어즈 장관은 “부의 창출은 부의 재분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블레어 자신은 “평등주의는 하향평준화일 뿐이다”라고 세계 정상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동지’라는 사인을 보낸다. 그런 영국노동당을 향해 중도좌파정당이라는 눈가림을 시도하는 것은 ‘사적인 취미’에 해당한다.

    에스키모는 눈에 대한 백가지 다른 단어를 말한다고 한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매일 백가지 다른 단어들을 들이밀며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 몬다. 그런데 우리가 “자본을 뛰어넘자”고 말하는 것이 왜 당에 기생한 근본주의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생산수단과 국가에 대한 태도

    보육이 왜 여성정책으로 분류되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여성당원이라고 꼭 여성대통령의 탄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여성이고 유태인이며 장애인이라서 위대했던 것은 아니다.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목숨을 걸고 사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계급화 혹은 국유화를 이야기하면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는 당원들조차 ‘알레르기’를 보인다. 그런데 “철도의 민영화에 찬성하는가”하고 물으면 “내가 열린우리당 당원이냐”며 반문한다. ‘민영화저지’의 다른 이름을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유행하는 새로운 단어의 조합을 우리도 연구해야 하는 걸까?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이라는 당 강령을 발전시키려는 (민주적)사회주의자들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자로 슬며시 등치시키려는 ‘근본주의’라는 수사학이 두렵지는 않다. 다만 그것은 당이 나아가야 할 진실에 대한 논쟁을 ‘블랙홀’이라는 비생산적인 영역에 던져버리는 무책임일 뿐이다.

    민주노동당의 좌파들은 선거를 통해 집권 할 수 있다는 공통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항상 그 다음이다.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에 따라 어떻게 하면 국가를 급진적으로 재 조직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국노동당의 30년 당원이었던 한 산재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과 영혼까지 팔아가며 신노동당-블레어주의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영국노동당-의 집권을 위해 참아왔지만 지난 10년간의 집권은 이제 나에게 성한 한쪽 팔이라도 노동하지 않으면 산재연금을 줄 수 없다고 협박하고 있다.”

    나는 법과 싸웠지, 하지만 법이 이겼지

    민주노동당은 분명 합법정당이다. 합법정당이란 법과 제도를 준수하는 정당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삼단논법의 마지막 결론인 “모든 법률은 어기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실로 위험천만한 ‘사(死)민주의’다.

    이 위험한 기계론은 진보정당의 모든 활동을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예컨대, 비정규악법의 국회상정을 저지하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의 행위는 모두 불법이므로 중지되어야 한다. 단병호의원은 원리론적인 당론에만 집착하여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고 격렬한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

    열린우리당의 비정규악법에 대한 대중의 지지율은 60%에 가깝다. 그렇다면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여 원리론적인 ‘악법철폐’의 당론을 철회하여야 하는가. 지하철 계단에서 비정규철폐 선전물을 나눠주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다.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행위도 불법이다. 따라서 지금 막 시작한 ‘FTA 국민투표’ 거리서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보수정당도 필요에 따라 등원을 거부하는 ‘국회파업’을 일으킨다. 진보정당은 필요에 따라 보수정치가 만들어 놓은 법의 질서와 싸워야만 한다. 그들의 법이 이겼다고 “법이 이겼지”라며 판결문에 확인도장을 찍어주는 정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거리로 나가야 한다. 진보정당은 ‘의회’와 ‘거리’라는 양 날개로 날아야 한다.

    구로동, 신정동을 파고들어야 한다

    영국노동당의 근간은 민주노동당의 분회에 해당하는 ‘브랜치'(Branch)이다. 지구당은 브랜치의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브랜치는 철저하게 대중들의 생활공간에 위치하고 활동한다. 미디어를 통해 공중에서 당의 정책을 홍보하지만 브랜치를 중심으로 대중들에게 설명하고 지지를 조직한다.

    브랜치가 영국노동당의 근간인 것처럼 민주노동당도 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당은 틈만 나면 분회강화를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심지어 당의 최고위원 선거가 벌어지면 모든 후보가 분회강화를 주장하는 웃지못할 희극도 벌어진다. 분회의 중요성에 대해 모든 간부들이 공감한다는 뜻이다.

    당의 지역위원회에 대해 선관위가 불법이라는 판정을 내리자 “법을 지키자”라는 목소리와 함께 현행법에서 ‘합법’으로 규정하는 광역체제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주대환 동지는 이미 그런 목소리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

    당을 완전히 ‘선수’들의 정당으로 만들자고 하는 이야기이다. 분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광역체제에서 분회를 직접 관리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은 그 어떤 수사학으로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이 곧 ‘광역의 한계’가 아니라 ‘합법주의의 오류’이다.

    인민과 얼굴을 맞대고 스킨쉽을 해야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기본이다. 지역위원회를 해체하고 ‘대중의 정서’를 말하는 것은 언어는 (당원)대중을 겨냥하지만 결론은 ‘선수들의 정치’를 하겠다는 잔인한 말장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대환류의 수사학은 단지 수사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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