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기술 유출방지 핑계,
    생명·안전·알권리에 재갈?
    개정 산업기술보호법, 유해물질 정보공개 등에 족쇄 “삼성 청부입법”
        2020년 01월 07일 05: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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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달 시행을 앞둔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 알권리를 침해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안전과 건강, 생명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정보를 알리는 노동·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법적으로 처벌해 ‘위험을 알리는 활동’ 자체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다. 일각에선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 ‘반올림’을 겨냥한 삼성의 청부입법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민변 노동위원회 등은 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활동 모두에 빨간불이 켜졌다”며 “산업기술 보호라는 미명 하에 당장 다음 달부터는 산업기술이라면 안전한지에 대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 모습(사진=반올림)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와 산업기술이 포함된 정보 등을 적법하게 얻었더라도 공개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개정안의 신설 조항을 살펴보면, 9조의2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는 비공개’, 14조8호의 ‘산업기술(신기술)을 포함한 정보는 말하면 처벌’ 등이다.

    문제는 국가핵심·산업기술에 ‘관한 정보’ 혹은 ‘포함한 정보’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기술의 정보를 알리는 행위조차 법 해석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이 개정안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예외 조항은 찾아볼 수 없다.

    산업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면 처벌받는 신설 조항의 경우 “산업기술 관련 문제제기 차단 및 검열”을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당초 산업기술보호법은 산업스파이를 막기 위한 법으로 부정한 경로를 통해 얻은 기술을 부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경우만 처벌해왔다. 그러나 내달부턴 산업기술과 관련한 정보를 적법하게 얻어서 적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도 3년 이하의 징역, 징벌적 손해배상 등의 처벌할 수 있다.

    반올림·민변 등은 “산업기술과 관련해 유해화학물질과 관련해 안전을 위한 공익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에도 원천을 제공한 제보자나 문제로 제기한 단체나 모두 처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해당되는 산업기술은 그 범위가 무궁무진하게 넓다. 반도체 전자산업만이 아니라 지식, 바이오, 건설, 조선, 발전, 화학, 섬유, 의료, 석유 등 33개 분야에서 3,000개에 달하는 기술과 제품이 포함되어 있다. 각 행정부가 지정한 기술까지 포함하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일본과의 무역 분쟁이 벌어진 시기에 급격히 추진됐다. 지난해 7월초 일본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하자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발의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12개를 모아 대안을 만들어 같은 달 12일 처리했다. 법제사법위원회도 같은 달에 속전속결로 통과했다.

    개정안은 법사위 문턱을 넘은 지 이틀 만인 8월 2일, 본회의에서 여야 재적 297인, 재석 210인 중 찬성 206인, 기권 4인으로 통과했다. 반대 의사를 밝힌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물론 정의당 의원들도 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8월 2일 본회의 표결 현황

    반올림, 민변 등은 반올림의 정보공개청구를 겨냥한 삼성의 청부입법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반올림은 공장 내 유해물질 사용 및 노출실태를 알기 위해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해왔다”며 “현재 소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정보공개청구를 정확히 겨냥해 법이 개악됐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윤영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2018년 대표 발의하고 대안에 반영돼 폐기된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의 의도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윤영석 의원은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관련 자료 정보공개 청구 소송에서 국가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현행법에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비공개로 한다는 조항이 없어 국가핵심기술의 보호에 취약한 측면이 있다”며 “산업기술 침해행위는 산업기술 보유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도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라며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들은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일은 일터의 위험성을 의심하고, 알기를 주저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알아야 위험을 막고, 예방하고, 조속히 대처할 수 있다”며 “국가핵심기술을 이유로 작업장 위험성을 감추고, 광범위한 산업기술과 관련만 돼있다면 위험을 알리는 활동도 다 문제 삼겠다고 하는 산업기술보호법을 만드는 데 한 몸이었던 기업과 국회, 정부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반올림은 본회의 이후 각 정당의 국회의원들 모두에게 의견서를 보내 개정안 내용 파악 여부, 향후 법안 개선 의지 등에 관해 물은 결과, 개정안의 내용을 모르는 의원들이 많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식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고 일부 의원들만 ‘몰랐다’, ‘곤혹스럽다’ 등의 비공식적인 입장을 전해왔다.

    정의당은 지난해 12월 반올림과 가진 간담회에서 “산자위 소속 의원이 없어서 잘 몰랐다”, “충분히 문제점이 부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취지 설명만 믿고 찬성했다”, “이후 바로잡기 위해 시민사회의 의견을 들으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종훈 민중당 의원은 서면 답변을 통해 “문제점이 있는지 모르고 찬성했다. 이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노력들을 같이 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우원식·신창현 의원,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오는 14일 국회에서 ‘산업기술보호와 알권리-개정된 산업기술보호법의 의미와 문제점’ 토론회를 공동주최할 예정이다. 반올림 등은 개정안이 시행되는 2월 20일에 헌법소원을 내고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조차 알지 못한 졸속법안의 문제를 알려낼 계획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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