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갈라쇼
[아트 살롱] 강태훈 개인전 《암묵적 전제들 Implicit premises》
    2019년 12월 09일 1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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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월간미술』,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하여 기고한 글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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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훈 개인전 《암묵적 전제들 Implicit premises》

10.04. – 11.08. 오픈스페이스 배(부산)

죽음이 전제된 땅을 밟으며 사는 나를 생각하다

강태훈 작가의 개인전 《암묵적 전제들》이 새로 이사한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열렸다. 2006년 대안공간 반디에서 《내 머릿속의 수도꼭지》 첫 개인전 이후 아홉 번째다. 그는 지금까지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적인 부조리함, 사회가 가진 악의적인 믿음과 환상,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주체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는 2018년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열린 《어떤 믿음에 대하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는데, 이번 《암묵적 전제들》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를 구조의 틀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적이다. 사실 이것은 전시 제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믿음’은 개별 주체와 가깝고 ‘전제’는 시스템과 가까운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제라는 것들이 암묵적이다 보니 전시장을 흘낏 둘러보아서는 전혀 눈치 챌 수가 없었다. 난해한 작업을 지향하는 작가라, 숨겨진 맥락과 감춰진 상징을 찾아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

여기에 뼈가 있다 #1, 비디오 프로젝션, 01:02:25, 2019

여기에 뼈가 있다 #2, 비디오 프로젝션 맵핑, 루핑이미지, 90×50×28cm, 2019

<여기에 뼈가 있다 #1>는 뿔 달린 사슴 머리뼈가 밀물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물에 잠기는 장면이 한 시간에 걸쳐 나오는 영상이다. 이후 3분 동안 앵글은 물속으로 들어가 흐릿해진 사슴 머리뼈를 선명하게 포착한다. 물속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문구와 파악되지 않는 음악이 암전된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 지루하게 투사되는 사슴 머리뼈를 계속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연상 작용이 일어난다. 죽음의 흔적인 뼈를 통해 살아 있는 사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이 사슴은 개별자로서의 사슴이 아니라 생명을 상징하는 그것으로 다가온다. 뼈가 차츰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동안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생명이었음’이 떠오른다. 제목을 다시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여기에 뼈가 있다>라는 제목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맥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와 같은 폭압적인 강제 철거와 강제 해산의 현장에서 ‘사람 살려’라는 절규로 등장했던 구호가 어느새 죽음이 가득한 ‘여기에 뼈가 있다’로 전치되어 버렸다. 희망조차 사라진 죽음이 지금 여기 덩그러니 드러난 것이다.

남겨진 것들의 전언 #1-16, ,C-Print, 21×30cm, 2019

덧칠 된 깃발, CCCP 국기 위에 아크릴릭, 147×88cm, 2019

그러고 보면 이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남겨진 것들의 전언 #1-16>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목숨을 잃은 젊은 청년들의 죽음을 담고 있으며, <덧칠 된 깃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죽음들은 모두 살아있었음을 반증하는 것들이고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살아있었을 때의 가치를 숙고하도록 한다.

Dead-end, 비디오 프로젝션 맵핑, 루핑이미지, 324×190×210cm, 2019

<Dead-end>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픈스페이스 배의 상징과도 같은 원형 사다리 계단에 14개의 각기 다른 영상이 쪼개져 투사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사실 자세히 보더라도 정확한 내용은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작가에게 여기 사용된 영상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위아래가 구분된다. 위쪽은 줌인 된 촛불을 시작으로, 반복되는 먹방 장면, 파라다이스 같은 휴양지, 숯불 철판 위에서 가지런히 굽히는 꼬치구이 재료들, 캠프파이어와 고양이의 휴식(잠) 등 향유하고픈 일상 속 여유가 느껴지는 영상이 주로 투사되고, 아래쪽은 아우슈비츠의 처참한 대량학살, 촛불 시위, 쿠바 혁명 시위, 87년 민주화 운동, 광신교도들의 광적인 기도 등 부조리한 사회 상황이 투사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누군가의) 죽음을 밟고 (나의) 삶의 여유로움을 향유하기 위해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퍼포먼스를 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애써 감춰둔 전제들과 맞닿아 있다. 알량한 노동의 대가만 지불하면 거의 모든 자본증식 행위가 용인되는 자본주의. 심지어 돈 넣고 돈 먹는 도박과 같은 금융자본주의조차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죽음을 재수 없는 불행 정도로 치부하지 않는가.

두 개의 채널로 구성된 영상작업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러한 불행이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그래서 그냥 이미지로 소비되어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왼쪽은 소금 위에서 미친 듯이 꿈틀대며 죽어가는 미꾸라지의 영상이, 오른쪽은 타워크레인 사고, 수많은 공장의 폭발 사고 이미지에 부수고 폭발하는 애니메이션 장면들이 몽타주 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것은 에이젠슈테인의 〈파업〉(Strike, 1925)에서 노동자들이 사살되는 장면에 황소가 도살되는 장면을 몽타주한 것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사람의 죽음이 다른 동물의 죽음과 동일선상에 놓이게 되면 이제 그 죽음은 존중받기 힘들어진다. 한갓 동물의 세계와 연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투 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00:17:11, 2019

그런데 강태훈은 이 작업의 제목을 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로 했을까. 사실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달려 있던 슬로건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력이 없거나 상실된 사람부터 먼저 가스실로 보냈다고 한다. 노동력이 잔존해있는 동안 그나마 삶을 연장할 수 있었던 아우슈비츠.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폐기해야 할 노동력으로 치부해버리는 이 사회. 무언가 닮은 구석이 있다. 상기해보면 그의 작업에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멈춰버린 홀로코스트 사건이 왕왕 등장한다. 참혹했던 사건을 잊지 말자는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홀로코스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참혹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강태훈 작가는 어쩌면 관람객으로 하여금 알튀세르가 말한 바 있는 능동적 관람객이 되도록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작품을 보고 그 속에서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작품을 통해 자신이 인식한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내가 상상한 관계, 즉 이데올로기를 깨부수어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명시적으로 지배이데올로기를 드러내면 과학의 영역과 별반 다르지 않고 심지어 그 효과도 반감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슬쩍 지배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속에 숨겨진 함의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강태훈의 작업 안에 평소 술자리에서 주장하는 과격한 메시지가 쉬이 드러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예술의 메커니즘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전략은 최소한 나에게는 통했다.

죽음 위의 갈라 쇼, 혼합재료, 2m 이내 설치, 2019

전시장 입구 쇼윈도우에 설치된 <죽음 위의 갈라쇼>를 다시 한참을 들여다봤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네온사인과 석탄 둔덕 위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발레리나의 다리가 있을 뿐이라 처음 전시장을 들어설 때는 유심히 보지 못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순간 이 작업이 전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이 느껴졌고 관심은 증폭됐다. 샤덴프로이데의 뜻을 찾아봤다. 딱 떨어지는 번역어는 없지만 쉽게 말해 쌤통 심리 현상이다. 남의 불행이나 고통에 묘한 쾌를 느끼는 심리상태를 일컫는 독일어다. 찾다보니 샤덴프로이데 현상이 홀로코스트 사건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연구도 있었다.

여기까지 다다르니 나는 스스로 하나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 위의 갈라쇼>가 단순히 노동과 폭력 위에서 꽃 핀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이었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갈라쇼라는 사실. 숨기고 싶었던, 애써 외면하고 적당히 양심적인 척 살아온 내 삶의 부조리, 그 모순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편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행보가 쉽게 변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고민이 되어버렸다. 땅 아래 묻어 두었던 고민이 다시 세상으로 기어오른다. 이렇게 또 유령이 출몰한다.

필자소개
시각예술비평가,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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