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당들의 성공과 좌절,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 이야기
    [책소개]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장석준/ 서해문집)
        2019년 11월 30일 1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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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만든 Party! 세계를 바꾼 Party!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근대 이후의 세계를 구성하는 양대 기둥이다. 그러나 두 정치·경제 체제가 지금 같은 모양새를 갖춘 건 오래지 않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는 ‘보통 남성’들만의 민주주의였고, 자본주의는 착취의 현장을 농장에서 공장으로 옮긴 ‘분칠한 노예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는 1인1표제, 다시 말해 완전한 보통선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는 어떻게 쟁취되었을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해 인간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었을까?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150년 전 독일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세계 곳곳에 등장했던 좌파정당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선사한 주역이었음을 증언하는 비망록이면서, 그 길에서 명멸해간 숱한 혁명가와 개혁가들의 백가쟁명을 담은 실록이다. 1990년대 좌파의 불모지 한국에서 노동자정당 운동의 전위에 서 있었고, 서른 이후의 삶을 진보정당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오롯이 채워냄으로써 ‘한국의 안토니오 그람시’ ‘이론가들의 이론가’로 호명되는 저자는, 공부와 궁리의 여정에서 만난 근대 진보정당사 150년의 풍경과 흔적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이 책은 좌파의 성공과 좌절을 낯간지러운 헌사나 최루성 신파극으로 각색하지 않는다. 저자는, 진보세력이 추구한 숱한 혁명과 개혁의 좌절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갈데없는 좌파지만, 진보정당의 오류와 한계들―예컨대 좌파가 곧잘 범하는 ‘급진적 언어-보수적 (혹은 소극적) 실천’이라는 모순―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한다는 점에서 설핏 우파적 면모마저 드러낸다. 이런 균형 감각에 크게 힘입어, 이 책은 장대한 시공간을 종횡하면서도 진보정당과 세계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순간들을 치우침과 왜곡 없이 재현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볼품없는 동네 선술집의 노동자 모임에서 출발한 진보정당들이, 소수파적 핸디캡을 잔뜩 지니고서도 굽힘 없는 신념과 명민한 전략으로 끝끝내 한 나라의 집권당에 도달하는 장면에서 경의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반대로 혁명과 집권에 성공한 뒤 우왕좌왕하는 장면에서 애써 환멸을 품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손위 좌파정당의 실패는 늘 그다음 세상의 진일보에 질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좌파에 대한 오랜 편견―예컨대 분열과 비관주의―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것은 물론, 한때 가장 보잘것없었던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획하고 만들어낸 주인공임을 보여주는 대반전 드라마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까닭
    : 좌파의 위기? ‘빈약한 이론’이 아니라 ‘역사의 부재’

    역사의 흐름은 얄궂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아랍의 봄’을 맞아 다시금 만개하는 듯했던 세계 진보정당들의 위세는 이제 간데없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 유럽 좌파정당들의 지리멸렬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21세기 세계 좌파 부흥의 진앙이었던 중남미에서조차 주요 지도자들의 죽음·정치적 몰락과 더불어 정권이 우파에게 넘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에, 일각에서는 ‘이념 없는 분노’라며 현대 좌파의 이론적 역량 부재를 꼬집기도 한다.

    반면, 당대 제1의 좌파 이론가로 손꼽히는 저자는 거꾸로 진보정당의 ‘이론’이 아닌 ‘역사’를 강조한다. 나아가 “이론은 추종이 아니라 대화 상대”임을 분명히 한다. 예컨대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블라디미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보여준 혜안과 통찰에 탄복하면서도, 그 아이디어들이 줄잡아 1-2세기 전의 것임을 넉넉히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세기 전 거인들은 경험하지도, 예측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는 다른 시공간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난해한 이론에서 발췌한 한두 줄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먼저 진보정당운동을 한 이들이 마주했던 문제를 생생히 추체험하고, 논쟁 당사자들이 우리 안에서 다시 대화하게 해야 한다. (…) 만약 ‘이론’이란 게 있다면 이런 역사의 재상연을 통해 우리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독자들이 지금 이곳의 맥락에서 진보정당운동의 보편적 고민과 선택에 마주하길 당부한다. 책의 표제가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인 까닭이다.

    세계의 운명을 가른 진보정당들의 결정적 선택

    1860-1870년대 비스마르크 정권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피해 독일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선술집에 모여들며 시작된 이야기는 4부에 걸친 16개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각 부에 등장하는 좌파정당들은 동시대를 엇비슷한 세계관으로 통과한 만큼 비슷한 길을 걸을 법도 하건만, 이들의 행로는 제각기 다르다. 소수정파라는 처지와 고민을 공유하지만 결단의 방향은 딴판인 경우가 많다. 코민테른 본부, 즉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상부의 명령으로 충실히 받든 독일 공산당과 이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개척한 중국 공산당의 엇갈린 운명은 그중에서도 드라마틱한 대비를 이룬다. 파시스트 세력을 맞아서도 광범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꾀하는 정당들이 있는 반면, 진영 내 주도권 다툼에 빠져 소탐대실한 경우도 있었다. 독일혁명 와중에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학살은 그 자체로서도, 그 사건이 훗날 나치의 집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진보정당사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고민과 선택을 묶어내는 공리(公理) 혹은 대의는 또렷하다. 공산당이든 사회당이든 사회민주당이든 사회민주노동당이든 “권력과 부의 불균형을,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끔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 1세대 진보정당들의 태동과 노선 투쟁이 펼쳐진다. 최초의 진보정당 독일사회민주당 편에서는 정당 설립까지의 우여곡절과, 진보·좌파정당의 혁명/개혁노선을 놓고 일대 파란을 몰고온 베른슈타인-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이 지상중계된다. 프랑스 사회당 편에서는 전설적 좌파 장 조레스의 활약상이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 노선과 함께 그려진다.

    1·2차 세계대전기를 다룬 2부에서는 유럽 좌파정당들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시작으로, 좌파의 맥이 끊긴 미국의 진보정당사와, 일찍이 현대적 복지국가의 전범을 이룩해낸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집권 드라마가 이어진다. 미국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민주당을 지지함으로써 사회당이 몰락하는 장면과, 프랑스 좌파가 반파시즘 연합전선에서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를 고민한 상황은 이른바 ‘비판적 지지’ 문제가 한국을 비롯한 소수파 진보정당들의 오래된 숙명임을 일깨우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까지의 진보정당들이 완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에 사활을 거는 모습과 보통선거제 이후 벌어진 진보정당들의 눈부신 약진은, 좌파의 본령과 지지기반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이를 배반했을 때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역사적 힌트를 제공한다.

    3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구가된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뒤이은 신자유주의의 공습에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각국 진보정당들의 이야기, 그리고 칠레 아옌데 인민연합정부의 장렬한 비극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본 사회당과 영국 노동당의 사례는, 위에 언급했듯 좌파정당이 좌파답지 못할 때, 다시 말해 더 이상 혁명을 꿈꾸지 않고 시장경제에 순순히 영합하는 정당이 될 때 치러야 할 대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4부는 21세기 들어 가장 주목받아온 두 좌파정당 브라질 노동자당과 스페인 포데모스의 일대기다.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의 땀내 가득한 3전4기 성공 신화와 최근 몇 해간 벌어진 거짓말 같은 몰락은, 남유럽의 신생 좌파 포데모스는 물론 한국의 진보정당들에게 전범이자 반면교사로 새겨둘 만하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실패를 막으려면?
    ‘큰 개혁과 작은 혁명의 좌파 블록’을 만들자!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 탐구를 바탕으로 근미래를 모색한다. 모색은 전망의 일종이지만, 의지가 깃든 예견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전망과는 다르다. 저자의 세계 모색 또한 단순한 분석과 예측에 머무르지 않는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전적 좌파 이론의 현대적 재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역사의 재상연’을 통해 스스로 이론을 생산하자는 당부의 자기 실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자는 베른슈타인-룩셈부르크 논쟁에서부터 이어져온 ‘개혁vs.혁명’의 이분법 구도를 ‘개혁-혁명’의 변증법 구도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개혁과 혁명은 지배 집단과 다수 대중의 세력균형을 바꾸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연속적이며, 한쪽이 다른 한쪽의 전제조건이 되는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장 조레스의 ‘개혁적 혁명주의’에서부터 오스트리아의 ‘완만한 혁명’, 스웨덴의 ‘잠정적 유토피아’에서 이론적·역사적 접점을 찾아내어 이어붙이기를 시도한다. 그럼으로써 그간 실패를 거듭해온 ‘큰 혁명과 작은 개혁’ 대신 ‘큰 개혁과 작은 혁명’으로의 발상 전환을 제안한다.

    덧붙여 저자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내세운 사회변혁의 요체인 ‘역사적 블록’에도 주목한다. “이미 지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930년대에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은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는 노동대중을 규합하고 그 존재를 만방에 선포함으로써 유럽에서 파시즘의 확산을 가로막았다. 20세기 내내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이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몇 세대에 걸쳐 완전고용과 보편복지 확대의 원동력이 될 강력하고 광범한 사회국가 지지층을 결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역사의 전환기에 역사적 블록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그것이 허물어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의 기로에서 서유럽 좌파정당들이 자신들의 최대강령인 ‘인터내셔널리즘’에서 접두사 ‘인터’를 내던지고 ‘내셔널리즘’으로 폭주한 대가는 좌파정당의 핵심 기반인 수천만 노동자들의 강제징집이었다. 굳이 외국 사례를 끌어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16-2017년을 한국에서 보낸 독자들이야말로 이념을 초월한 역사적 블록의 위력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흘러간 좌파들의 묘비명이 아니다. 16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정당들은 오늘날에도 대부분 각국의 어엿한 집권당이거나 유력 정파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상 최고 부자 80여 명 남짓이 전 세계 부의 절반을 독점한 오늘의 세상은 여전히 좌파정당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승리와 패배, 반격의 드라마가 촘촘히 박힌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독자들에게도 거대한 보석 광산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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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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