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농장과 싸움 반 년,
아이부터 호호백발까지
[낭만파 농부] "수욕정이풍부지"
    2019년 11월 28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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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가만있으려 하나 바람이 내버려두지 않누나.

팔을 걷어붙이고 돼지농장 싸움에 뛰어든 지 반 년이 되어간다. 군청 항의방문과 한 달에 걸친 천막농성에 이어 서울 본사 앞 상경투쟁을 다녀왔다. 농장 재가동 의사를 철회하고 부지를 지역사회에 넘기든가, 돼지사육이 아닌 다른 대안사업을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업체쪽은 낡은 시설을 땜질해 돼지를 들이겠다며 개보수 공사를 강행하는 것으로 답을 해왔다. 이어 가축사육업 허가신청서와 돼지입식 계획서를 군청에 제출했다. 어미돼지 7백 마리를 세 차례로 나눠 들여온 뒤 단계적으로 새끼를 낳아 사육하겠다는 것이다. 그리 되면 저 대규모 돈사에는 1년 안에 1만 마리 넘는 돼지가 우글거리게 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정경인가.

이자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는 총력투쟁을 선언했다. 이달 초 2차 상경투쟁에 나섰다. 1차 때보다 두 배가 넘는 1백30명, 세 살배기부터 여든을 넘긴 호호백발까지 “재가동 철회!”를 목청껏 외쳤다. 칠순을 넘긴 상임대표는 “끝장을 보겠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찬바람 부는 강남 거리에서, 천막 하나 없이 무기한 거점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주민들이 릴레이 하루농성으로 힘을 보태지만 여간 힘겨운 게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2차 상경 집회

본사만이 아니다. 전선이 세 곳에 걸쳐 있는 버거운 싸움이다. 개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농장 입구에도 천막을 쳤다. 이지반사 참가단체들이 조를 짜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허가권을 쥔 완주군청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당연히 ‘불허가’ 처분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처리기간(15일)을 연장하면서까지 고심하는 모양인데, 불허가 외의 다른 선택은 주민여론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의 사회윤리나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짓이다. 실질적 기준인 관계법령에 비춰 보더라도 불허가는 충분한 근거를 갖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완주군이 허가를 내주는 따위의 무모한 선택을 하지는 못하리라… 믿고 싶다.

물론 불허가 조치가 내리더라도 상황이 끝나는 건 아니다. 업체가 불허가 처분에 불복해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반대로 완주군이 허가 처분을 내리는 경우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가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이다. 이래저래 법정다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다. 법원이 설령 저들의 손을 들어주어 농장 재가동이 현실이 되더라도 우리는 감시의 눈길과 저들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활동 자체가 ‘생활환경 개선’이라는 삶의 한 구성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무가 늘 고요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세차거나 살랑거리는 차이가 있을 뿐 바람은 불게 마련이니.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나무는 없다.

문제는 뜻하지 않은 바람이다. 초강력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나무는 뿌리째 뽑히기도 한다. 그냥 태풍이라도 가지가 부러지거나 이파리가 뜯겨나가 성장에 곤란을 겪기도 한다.

실제로 그랬다. 돼지농장 싸움이 격해지면서 일상생활은 뒷전으로 밀렸다. 저번에도 밝혔듯이 논배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겹흉작을 감수해야 했다. 이래저래 벌려놓은 일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고, 맡은 몫을 다하지 못했다.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는 토종이라고는 하지만 속이 차지를 않고 푸르뎅뎅, 김장거리도 못 될 성싶다. 거둬들여 포장 위에 말려놓은 메주콩은 갈무리를 못하는 바람에 몇 차례 내린 비에 불었다 말랐다를 거듭하고 있다. 갈무리해 놓은 서리태와 돈부콩은 세찬 바람에 그릇이 뒤집혀 자갈바닥으로 쏟아졌다. 아직도 헤벌쭉 밭에 서 있는 들깨는 또 어떻고.

어수선한 텃밭의 모습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얼마 전부터는 틈틈이 일상을 챙기고 있다. 다행히 싸움에 어렵사리 돌파구가 열리고 긴장 국면에서 다소 숨통이 트인 상태다. 독서토론 모임 발제를 맡은 핑계도 있지만 책이 손에 잡힐 만큼 여유를 되찾았다. 키워드는 ‘선비’.

선비란 전통시대 지배층으로서 글을 읽는 사람, 곧 공부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른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소명으로 하는 자. 사대부(士大夫)로 일컬어지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철학)과 지배 이데올로기, 권력투쟁 뿐만 아니라 학문, 문예, 소소한 삶에 이르기까지.

그새 몰랐던 역사의 조각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쏠쏠하지만 자꾸만 옛 사람의 발자취에 오늘의 삶을 비춰보게 된다. 사람 사는 이치라는 게 시대를 가르지 않음을 새삼 절감한다.

이제 보니 풍부지이수욕정, 바람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서도 나무는 고요를 갈망하누나.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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