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 엽서가 전해주는 옛 이야기
    2019년 10월 07일 10: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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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범죄사실과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 사람이 아니라 혐의가 있으면 수사를 개시해야 하는데, 검찰은 추정과 감(感)만으로 수사를 했습니다. 그게 요즘 나오는 ‘표적수사’라는 말입니다.

누구의 말일까?

최근 조국 법무장관 가족에 대한 과도한 검찰 수사를 비판하는 사람의 발언쯤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 탄핵 정부 근무 당시의 ‘국정농단 묵인 혐의’와 ‘국가정보원을 통한 불법사찰 혐의’로 기소돼 재판 중인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최근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1심에서 각각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경북 영주 출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태어난 곳은 바로 옆 봉화지만, 영주에서 주로 학교를 다녀서인지 보통 영주 출신이라고 한다. 우병우의 고향, 몇 년 전 대중들에게 영주는 그렇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최근 영주가 다시 뜨거운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영주에 소재한 동양대학교 때문이다. 설립자인 최현우 박사의 아들로 26년째 초장수 총장을 맡고 있는 최성해 총장. 그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 정국이었던 2019년 9월 4일 기자들에게 장관 후보 딸의 2012년 봉사활동에 대한 대학총장 표창장을 준 적이 없으며, “(조국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표창장을 위조)한 것 같은데, 제가 교육자적 양심하고 친분 문제가 갈등이 되더라고요. 교육자적 양심을 택했습니다”라는 문제의 발언을 함으로써 한순간에 정경심 교수와 그 딸을 거짓말쟁이와 파렴치범, 문서 위조범으로 낙인찍어버렸다.

대학 입시에서 부정과 편법과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에 최 총장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입시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이다. 여론은 들끓었다. 이것은 평소 정의와 공정한 사회를 설파해왔던 조국 민정수석의 평소의 언행과 대비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그 이전의 사노맹 논란 정도는 가볍게 압도하면서 ‘조국 대전(大戰)’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박근혜 정부 당시 민정 수석을 지낸 우병우(좌)와 ‘교육자적 양심’으로 표창장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한 최성해 동양대 총장(우). 최근 영주를 크게 알리는 데 기여한 인물들이다.

그 후 밝혀진 많은 사실들로 최성해 총장 말이 오히려 거짓일 가능성이 훨씬 커졌고 게다가 최 총장 자신의 학력 상당수가 거짓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대중들은 최 총장이 내뱉은 말로 인한 확증 편향 때문인지 조국 가족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조국 가족은 지금도 힘겹게 진실과 싸워가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들도 최성해 총장의 주장에 근거해서 정경심 교수를 사문서 위조범으로 규정해서 마녀 사냥을 했다. 간단하게 팩트 체크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언론들은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작정한 듯이 자기 본분을 내팽개치고, 검찰과 최 총장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면서 증오와 광기를 조장하였다. 그 총장에 그 언론이었다.

최근 방송된 2019년 10월 1일의 MBC [PD수첩] ‘장관과 표창장’편 정도가 그 사안을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따진 거의 첫 시도였다. 이날 방송에서는 최 총장의 증언이 오히려 거짓일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기했으며, 게다가 총장의 그 증언이 영주를 지역구로 하는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의도적으로 나온 ‘거짓 증언’이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하였다.

2019년 10월! 내란 사건 수준으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총동원되어 아직도 수사가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의 그 흔하디흔한 수시전형 자소서에 나오는 표창장 위조 여부를 가리겠다고 두 달 넘게 압수수색을 남발하고 언론·야당과 함께 총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 편의 거대한 코메디이다. 이 광기가 사라진 몇 년 후 역사는 이 파동을 그렇게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와 버렸으니 2019년 10월 18일부터 시작되는 재판에서 가려지게 될 그 표창장 한 장의 위조 여부는 향후 정국의 큰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이 (위조할 특별한 이유도 없어 보이고, 알려진 정경심 교수의 컴맹 수준 실력으로는 가능해보이지도 않지만) 명확히 위조되었다면 조 장관 측의 도덕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이것은 문재인 정권의 레임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검찰은 검찰 개혁의 필요성만 스스로 각인시켜 준 꼴이 되어 자승자박의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말마따나 ‘조국에 의한’ 검찰 개혁이 아니라 ‘조국으로 인한’ 검찰 개혁이 되는 것이다.

말이 길어져 버렸지만 영주는 2019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조국 파동’의 거대한 물꼬를 터뜨린 ‘교육자적 양심’의 표상 최성해 총장과 동양대학교의 도시로 각인되었다.

우병우, 최성해, 최교일, 동양대학교…….

이런 일련의 일들과 인물들로 영주는 대중들에게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될 수 없겠지만, 영주는 원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늘날 대구가 보수 우파의 상징이지만 그 옛날 일제 강점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진보 세력의 고향이었듯이, 영주는 그 시기 자랑스런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일제 강점기 영주는 항일 운동의 역사에서 큰 이름을 남긴 곳이었다. 게다가 항일운동을 떠나 영주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 하나로 평가되는 부석사의 자랑스런 고향 아닌가!

이 ‘조국 파동’을 겪으면서 문득 필자가 수집한 자료 하나가 떠올랐다. 영주와 관련된 자료이다. 최근 동양대 총장이 아니었다면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 총장이 파일 속 어딘가에 깊이 잠들어 있던 그 자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주었다. 아니 어쩌면 이 자료들 스스로의 ‘반란’이었을 지도 모른다. 영주는 원래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는 항변!

이 자료들은 3장의 엽서로 몇 년 전 경매를 통해 수집한 것이었다. 수집 당시 이 엽서가 심상치 않았던 것은 엽서 앞면에 ‘불허가(不許可)’라는 붉은 색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2장은 ‘불허가’도장이 찍혀있고, 한 장만 ‘허가(許可)’ 도장이다. 수신인은 김계운(金啓運)으로 되어있다.

불허된 2장은 안동형무소에 있을 때, 허가된 1장은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지인들이 김계운에게 보낸 것이었다. 연도는 1930년, 영주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불허가’와 ‘허가’가 섞여있는 이 엽서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경매에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생생한 당시 생활상을 전해주는 1차 사료라는 점 말고는 ‘김계운’이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바 없었고, 또 그가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혔는지도 아는 바 없었다. 그런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한두 명이었겠는가?

[사진] 일제 강점기 영주 청년 김계운 앞으로 보낸 엽서들. 앞 둘은 안동형무소, 세 번째 엽서는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보낸 것이다. (박건호 소장)

지금부터 이 엽서 3장을 둘러싼 영주의 작은 역사 하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위해 당시 재판자료와 신문 자료를 검색했다. 비록 큰 사건은 아니지만, 엽서를 대신하여 그 일들을 전한다. 영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다소나마 털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참고로 필자의 고향은 영주가 아니다. 혹시 영주에 대한 애향심으로 이 글을 쓴 게 아닌가 오해가 있을까하여 미리 밝혀둔다.

대한광복회, 아도서숙 그리고 영주격문사건

영주 독립운동사의 제일 앞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 채기중, 유창순 등의 주도로 설립한 단체로 경상북도 풍기(현 영주시)에서 결성되어 풍기광복단으로도 불린다. 대한광복단에는 의병 출신 독립 운동가들과 계몽운동가, 영남 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가했으며, 비밀 결사로 조직되어 암살 등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을 벌였다. 대한광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있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있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또한 일제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정하였다. 다음은 그 결의문.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그러나 1918년 대한광복회는 일제에 조직이 탄로되어 조직은 해체되었고, 총사령 박상진도 사형당하고 말았다. 몇 년 전인가 경주 남산 근처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총사령 박상진의 묘지 표지판을 보았는데, 들러 술 한 잔 올리고 참배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참! 대한광복군 총사령 박상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있는데, 부사령이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와해 후 북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이후 청산리 대첩 당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어 큰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김좌진 장군이다.

현재 영주시에서는 이 대한광복회의 한 뿌리가 되었던 대한광복단을 기리는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일제 시기 그들의 활동을 기리고 있다.

[사진] 영주에 있는 대한광복단 추모탑이다. 대한광복단 기념 공원 안에 세워져있다. 영주에서 만들어진 대한광복군은 곧 대한광복회로 개편되었다.

어쨌든 이 대한광복회가 와해된 후인 1920년 6월 19일 영주공립보통학교에서 영주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영주청년회는 ‘덕성함양· 학문증진· 체육발전· 풍속교정’에 목적을 두었다. 이에 따라 창립 이후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강습회를 열어 야학운동을 펼쳤다. 또한 단주동맹(斷酒同盟)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인쇄·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5년 치안유지법 공포 이후 영주경찰서의 단속이 심해져 청년회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영주청년회는 1927년 11월 24일 영주청년동맹 설립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영주청년동맹을 주도한 인물들의 다수는 영주군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의 대팽 김화진이 설립한 아도서숙 출신이었다. 아도서숙(亞島書塾)은 ‘아세아(亞細亞)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수도리(水島里)’의 의미를 담고 설립된 학교로 마을의 공회당이자 주민교육기관이자 영주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아도서숙은 신간회 영주지회와 영주청년동맹 평은지부 등의 사무실도 겸하면서 영주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나중에는 농민운동 및 반제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인 적색농조가 결성돼 그 거점이 되기도 했다.

당시 아도서숙 운영을 주도하고 영주청년동맹 등을 이끌었던 투사 가운데 김화진· 김종진· 김계진· 김성규· 김명진 등 5명이 건국훈장 애족장 및 건국포장을 받았다. 가구 수가 시기에 따라 40호 ~ 70호 정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무섬처럼 작은 마을에서 항일운동으로 건국훈장 받은 이가 5명이나 되는 마을은 찾기 어렵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섬마을은 영주의 자랑이자 영남의 자랑이며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이 때문에 최근 영주에서는 무섬마을의 선비정신, 항일독립운동정신의 상징인 아도서숙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 영주 무섬마을 전경이다. ‘물 위의 섬’이란 뜻처럼 무섬마을이 휘돌아 흘러가는 내성천 너머로 보인다. 이 마을에 있던 아도서숙은 이 지역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었다.

이렇게 출범한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후 평은 지부, 이산 지부 등 면 단위 지부를 설치하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이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영주격문사건’이다.

영주청년동맹은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자 사건 발생의 의의를 선전하고 일제에 맞서 강력히 투쟁할 것을 권유하는 유인물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1930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몇 차례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들은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형을 살게 되었다. 당시 살포한 격문은 실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있는데, 필자가 검색 도중 발견한 국가기록원의 재판 기록에 그 격문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독립운동의 파괴자들이 역설적이게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보존해 준 셈이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뿌려진 격문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학생 여러분에게 알림

혈기 있고, 혼이 있는 학생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혈기가 있는가!

광주학생사건이 동기가 되어 경성을 중심으로 각 지방은 물론 전문, 중학, 보통학교에 이르기까지 전 조선 300여 학교, 수십 만 학생이 자유를 부르짖는 만세의 소리가 2개월간 계속되고 있다. 혈기 있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진실로 혈기가 있는가!

어찌하여 여러분은 잠자고 있는가!

일어나서 운동장으로, 시장으로 뛰어나가 조선민족 해방만세를 외치자.

조선민족 해방 만세, 만세!

다음은 두 번째 격문. 첫 번째 격문이 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 격문은 ‘피압박 계급 대중’과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했다. 다소 길지만 사료적 가치가 있으므로 전문을 소개한다.

전 조선적 학생 대검거와 조선총독 폭압정치와 야만적 경찰의 압박에 전 조선 피압박 계급 대중은 일제히 분기하라.

경애하는 전 조선 피압박 계급 제군이여,

일본 제국주의의 무법적 정치와 포악한 조선 총독정치는 어디까지나 전 조선 민족의 피를 착취하려는 것으로,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보라! 저들 군벌, 동척(東拓), 불이(不二)가 각 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통하여 우리 2300만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탈취하고 있지 않은가? 3.1운동 당시 수만의 동포를 학살한 것을 비롯하여 불처럼 일어난 노동자의 파업, 농민의 폭동, 학생의 동맹휴업, 사회단체의 집회 등을 얼마나 많이 유린하고 우리 전위(前衛)를 검거 학살하고 있는가를.

용감한 학생 청년 여러분.

보라! 이 밖에도 최근의 광주학생사건을 중심으로 전국적 300여 학교의 10만 학생들이 이미 2개월에 걸쳐 자유를 부르짖는 만세 소리는 전 조선 피압박 계급을 위한, 전 세계 평화를 위한 정당한 외침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수천의 어린 우리 학생을 검거하고, 또 야만적 혹형을 가하고 있지 않은가. 혈기 있고 용기 있는 학생 여러분들이여.

일어서라. 우리들이 자유를 획득하는 것도 바로 지금이요, 우리가 활동할 시기도, 또 모든 결함, 불평, 불만을 배제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때다. 학생, 청년, 교원 제군이여, 우리는 공장, 농촌, 어장, 광산, 학교에 몰려가서 우리의 슬로건을 철저하게 관철시키자.

[사진] 영주청년동맹이 주도한 영주 격문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 “격문 다수 발견. 모종의 계획이 미연에 발각”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엽서가 전하는 1930년 영주

김계운에게 쓴 3장의 엽서는 이런 영주의 독립운동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엽서의 주인공 김계운은 어떤 인물이고, 무슨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일까? 일제 강점기 하에 벌어진 크고 중요한 사건은 아니지만, 그 엽서들이 남아서 당시 항일운동에 참가했던 김계운 등을 애써 기억해달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역사는 사료와 자료를 통해 이야기를 한다.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그건 우리의 입장이지, 그 당시 그들에겐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다음의 서술은 연도와 인물, 지역 등을 참고하여 일일이 재판 기록들과 신문기사를 검색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재판기록은 국가기록원에서 검색한 것이고, 신문 기사는 주로 동아일보 기사이다.

김계운(金啓運)은 본명이 김용현(金用鉉)으로 영주군 이산면 신암리에 살았다. 1929년 당시 김계운은 나이 21세로 영주청년동맹의 이산면 지부에서 활동하던 청년이었다. 그는 영주청년동맹의 결의사항을 통보하기 위해, 박병성, 정길성, 송해갑, 박인서 등과 함께 순흥청년회 총무 차명섭의 집을 몇 차례 찾아갔다. 순흥청년회는 몇 년 전 일제가 조선의 청년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일종의 친일어용단체였다. 영주청년동맹의 집행위원들은 이 단체를 해체시키고, 영주에서는 조선청년총동맹의 산하조직인 영주청년동맹만이 유일한 청년단체임을 확실히 하고자했던 것이다. 김계운은 집행위원들과 함께 5월 27일 차명섭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이미 몇 차례 차명섭을 설득하고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영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좀 세게 엄포를 놓을 작정이었다.

이들은 차명섭에게 “조선 각지의 청년회는 모두 1927년에 해체하여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흥청년회만은 여전히 구체제를 지속하고 있음은 시대착오적이다. 모름지기 순흥청년회를 해체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의 깃발 아래 모여 대중적으로 통일성 있는 청년운동을 할 필요가 있으니 빨리 이 청년회를 해체해야하며, 순흥청년회 회관을 영주청년동맹에 대여해 주거나, 아니면 청년동맹의 간판을 순흥청년회 회관 사무소에 걸겠다”고 요구했다.

이들의 지속적인 강요에 차명섭은 결국 이듬해 1930년 2월 27일 결국 일경에 신고를 했고, 차명섭 집을 찾아가 순흥청년회의 해체를 요구한 영주청년동맹 관련자들은 전원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엽서 3장은 김계운 등 일행이 주재소에 잡혀간 후 쓰인 것이다. 2월 말에 잡혀갔으므로 3월 10일에 작성된 엽서 2장은 계운이 잡혀간 지 열흘 후에 쓰인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8월에 쓰인 것이다. 이제 엽서 내용을 살펴 볼 차례다.

엽서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내용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두 장의 엽서는 김계운이 안동 형무소에 있던 3월에 받은 것인데, 한 장은 ‘춘우’라는 이름의 친구가, 또 한 장은 ‘이동식’이 보낸 것이다. 엽서 두 장 모두 ‘불허가’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계운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형무소에서 주는 콩밥을 맛있게 먹으며 버티라는 내용이다. 두 사람 모두 콩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런 안부를 묻는 엽서가 왜 불허되었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엽서 두 장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엽서1]은 소화5년(1930) 3월 10일 안동형무소의 김계운에게 영주읍에서 춘우가 보낸 엽서이다.

평안히 갔느냐? 나도 평안히 나왔다. 꼭 콩밥을 맛있게 먹으며 규칙을 잘 지켜라. 굳게 건강을 빈다. 3월 10일

짧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계운에게 평안히 갔느냐고 물으며 자신은 평안히 나왔다는 표현을 통해 봤을 때, 춘우는 계운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직접적인 혐의가 없어 풀려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계운에 대한 미안함과 굳세게 버티라는 격려의 마음을 담았다.

[엽서2]는 같은 날인 소화 5년(1930) 3월 10일 안동형무소 구치감 김계운에게 영주읍의 ‘이동식’이 보낸 엽서이다. 이름 옆 의문의 숫자 ‘7650’은 수번으로 추정된다.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동생으로 보이나 성(姓)이 다른 걸로 보아 친동생은 아니다.

형아! 얼마나 고생스러우며 바깥이 얼마나 궁금허냐? 그래 몸이나 성하냐? 아무쪼록 콩밥에 맛을 들여 튼튼을 보류하여라. 아무튼 잘 있다마는 섭섭하여 못살겠다.

[사진] 1930년 3월 10일 김계운에게 쓴 엽서. 왼쪽이 [엽서1], 오른쪽이 [엽서2]다. 안부 정도를 묻는 매우 단순한 내용인데도 ‘불허가’ 판정을 받았다. 둘 다에 ‘콩밥’이라는 단어가 적힌 것이 인상적이다. (붉은 테두리 안)

마지막 엽서는 영주군 이산면 신암리에 사는 ‘김한’이라는 인물이 보낸 것으로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김계운의 친척으로 보인다. 1930년 8월 9일 보낸 엽서로 엽서 위에 ‘허가’와 ‘영치’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계운에게 전달됐다는 뜻이다. 이미 계절은 여름이라 날씨는 더웠을 것이다. 계운은 당시 안동형무소에서 대구 형무소로 옮긴 상태였다. 엽서 내용 중 강신태와의 금전 거래 이야기는 무슨 일인지 알기 힘들다.

전일 보낸 엽서는 받아 보았는지? 그 후 몇 날이 되오니 궁금합니다. 날은 아직도 서늘하지 않고 점점 더워지는데 이 여름 건강하십니까? 이곳 일정과 아저씨 댁도 아직 별고 없습니다. 안심하야 주시옵고 공판은 하시경(何時頃; 언제쯤) 열리겠습니까? 드릴 말씀은 일전 부탁하신 강신태 형에게 70량 차래(借來; 빌려옴) 운운은 다시 아직 빈말입니다. 그리 알아주시오. 할 말 많으나 다 쓰지 못하고 끝.”

[사진] 마지막 엽서로 글씨를 날려 써서 읽기가 쉽지 않다.

2월 말에 잡혀간 이 영주 청년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사상범죄가 아니라서 중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문 보도를 찾아보자.

예상대로 이들은 이후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 이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10월 초에 전원 보석으로 풀려났다. 물론 김계운도 이때 풀려났다.

보석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영주청맹원 11명 보석

1심, 2심에서 무죄된 사건

[영주] 경북영주청년동맹에서 같은 군내 순흥면 읍내리 순흥청년회를 해체시키고 영주청년동맹의 기치로 합류시키려고 작년 4월 10일, 4월 14일 두 차례에 그 대책을 결의하였던바 그것이 곳 대중의 위력으로 협박한 것이라하여 폭력행위 및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위원장 김태두와 10명을 지난 2월 27일에 검거하여 대구지방법원 대원(大原)검사의 손을 거쳐 유택(有澤) 예심판사의 예심 종결로 공판에 회부되어 일심에 무죄로 판결된 것을, 앞에서 말한 대원 검사가 공소하여 복심에서 또 일심과 같이 무죄로 언도되었는데, 복심법원 횡전(橫田)검사가 상고를 신립하였던 사건의 피고 11명은 변호사 한영욱씨의 책부(責付)로 전부 보석되었는데 금회 고등법원에서 각 피고에게 통지를 발송하여 공판이 10월 30일인 것을 알렸다한다.

각 피고의 씨명: 정규찬, 송홍국, 박병성, 강수창, 전창석, 박찬도, 박인서, 윤양섭(일명 윤차경), 우진팔, 김용현(일명 계운)

[동아일보] 1930년 10월 4일자.

[사진] 김계운 등 11명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문의 일부이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검색한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붉은 색 테두리 부분에 이 사건에 연루된 김계운, 박인서, 우진팔의 이름이 보인다. 당시 그들은 모두 22세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었다.

이후 이들은 위 기사에서 예고된 10월 30일 고등법원 판결에서도 최종 무죄를 선고받게 된다. 순흥청년회 해체를 시도하다 옥고를 치렀던 영주청년동맹 청년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영주 지역 청년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엽서들은 몇 년 전 우연히 필자에게 수집되었다. 이 엽서가 쓰인 지 대략 85년 뒤의 일이다. 그리고 몇 년을 파일 속에 다시 잠들어 있다가 최근 최성해 동양대 총장 탓에 문득 깨어나 옛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매우 단호하게 그리고 또박또박하게!

영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우병우와 최성해가 영주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물 표면에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포말이 거대한 역사의 본류일 수는 없다고.

한낱 사심 가득한 ‘교육자적 양심’보다는 시민들의 상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더디더라도 정의는 승리할 것이고,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진실은 결국 밝혀질 것이라고.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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