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불알꽃은
    주인의식 없는 이름이다?
    [푸른솔의 식물생태] 왜곡과 비약
        2019년 10월 04일 1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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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솔의 식물생태 이야기’ 연재 코너 링크

    [1] 개불알꽃은?

    개불알꽃<Cypripedium macranthum Sw.(1800)>은 난초과 개불알꽃속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복주머니란이라고도 한다. 높이 30-50cm이다. 잎은 3-4장이 어긋나고 넓은 달걀형이다. 꽃은 자주색, 분홍색 또는 흰색으로 5~6월에 핀다. 꽃받침은 3장으로 등꽃받침 1장은 넓은 달걀형이고 곁꽃받침 2장은 서로 붙어있다. 꽃잎도 3장인데 곁꽃잎 2장은 끝이 뾰족하며, 가운데 있는 입술꽃잎 1장은 주머니 모양이다. 열매는 타원형의 삭과이다. 한국, 일본, 중국, 몽골, 시베리아, 동유럽 등에 분포한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생물 2급 식물로 보호종이다.

    사진1. 개불알꽃의 전초

    개불알꽃은 꽃이 개화했을 때 가운데 입술꽃잎이 개(犬)의 불알(陰囊)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래』, 일조각(2005), 51쪽 참조]. 중국명 大花杓兰(da hua shao lan)는 큰 꽃이 피는 杓蘭(작란: 국자를 닮은 난초라는 뜻)이라는 뜻에서 유래했고, 일본명 アツモリサウ(敦盛草)는 꽃의 모양이 무사(武士) 다이라노 아츠모리(平敦盛: たいら の あつもり)의 갑옷을 보호하는 호로(ほろ: 母衣)를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모두 꽃의 모양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우리 이름과 그 뜻이 동일하지는 않다.

    ​한편 속명 Cypripedium은 그리스 신화의 미와 사랑의 여신인 Cypris(로마신화의 Venus)와 pedion(슬리퍼모양의 신발)의 합성어로 크게 돌출된 입술꽃잎의 모양에서 유래하며 개불알꽃속(복주머니란속)을 일컫는다. 종소명 macranthum은 크다는 뜻의 macro와 꽃이라는 뜻의 anthos의 합성어로 꽃모양이 큰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학명도 우리 이름 개불알꽃과 그 뜻이 같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과학으로서 식물분류학의 토대 위에 전통적 식물명을 결합했던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개불알꽃’으로 기록한 이름이다. 현재 ‘국가표준식물목록'(2019)은 『원색한국식물도감』(1996)에 최초 기록된 ‘복주머니란’을 추천명으로 하고 있다. 북한은 중국명에서 유래한 ‘작란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에 대해 “1921년에는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사실도 전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용된 자원식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관상용으로 키우다 보면, 꽃 모양과 특히 뿌리의 지린내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이름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오직 그런 이름만을 전했다.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에 ‘개불알’이든 뭐든 주인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명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더욱이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 언저리에 드물지 않게 살았을 터이기 때문이다.”라는 견해가 있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3쪽].

    멀쩡한 우리 식물 이름이 어떻게 주인의식이 없는 이름이 되었을까?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개불알꽃의 생태에 관한 것이다.

    [2] 개불알꽃의 생태

    사진2 개불알꽃의 꽃구조

    사진3 개불알꽃의 암술과 수술

    사진4 개불알꽃을 위에서 본 모양

    사진5 같은 속의 노랑개불알꽃에 벌이 들어간 모습

    개불알꽃은 난초과 중에 드물게 햇볕이 바로 보이는 풀밭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식물이다. 건조한 곳보다는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지만 물빠짐이 잘 되어야 한다. 꽤나 까다로운 생태 환경에서 살아간다. 꽃잎 3장 중에 가운데 입술꽃잎이 주머니 모양으로 크게 부풀러 올라 있다. 입술꽃잎 안쪽에 꽃술대가 있는데 위에 헛수술 있고, 그 아래에 암술머리와 수술 2개가 위치한다. 등꽃받침은 비가 왔을 때 입술꽃잎의 입구를 덮어 비가 꽃잎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개불알꽃은 꽃의 구조가 매우 독특하고 그에 따라 수정 방식도 특이하다. 꽃에 도착한 곤충이 헛수술에 앉으면 헛수술의 표면이 미끄러워 입구 안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다. 구멍에 빠진 곤충은 그 안에 또 하나의 구멍이 있어 다시 밑으로 빠지는데 그 내부가 물고기를 잡은 통발처럼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입술꽃잎에 빠진 곤충은 위로 바로 올라오지 못한다. 곤충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곤충의 탈출구는 위쪽이 아니라 입술꽃잎 뒤쪽의 꽃술대 양옆으로 나 있다. 아주 좁은 통로를 간신히 빠져 나오면 이 과정에서 암술에 먼저 닿고 그 다음에 수술에 닿는다. 이를 위해 암술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좁은 구멍에서 빠져 나오는 곤충의 몸에 수술의 꽃가루덩이(화분괴)가 몸에 부착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곤충은 탈출하게 된다. 이 꽃가루덩이를 몸에 단 곤충이 다른 꽃에 들어가 다시 탈출하게 될 때 그 꽃의 암술에 꽃가루가 닿게 되어 타가수정(cross-fertilization)이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잡한 구조는 매개곤충이 최소 2번을 개불알꽃의 입술꽃잎에 빠져야만 수정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불알꽃은 난초과의 다른 식물처럼 향이나 꽃꿀(nectar)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곤충을 불러들이기가 용이하지 않다. 꽃과 꽃 색으로만 매개곤충을 불러 들여야 하는데, 이로 인해 개불알꽃이 열매가 결실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개불알꽃은 땅속줄기를 통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내는 무성번식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높은 무성생식에 대한 의존도는 햇볕이 바로 비추는 풀밭이 천이(遷移)로 인해 숲으로 바뀌면 땅속줄기로는 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에 다시 생존에 위협이 생긴다. 이러한 어려운 번식전략은 사람들의 남획과 더불어 개불알꽃이 멸종위기의 희귀식물로 내 몰리는 원인이기도 한다.

    ​[3] 개불알꽃의 주인의식 없는 이름으로 만들기

    1. 개불알꽃에 대한 기록

    사진6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1922), 101쪽

    사진7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38쪽

    이제 본론으로 왜 개불알꽃이 주인의식 없는 이름이 되었는지 그 논리를 차례대로 따라 가면서 살펴보자.

    ​”복주머니란은 오랫동안 참으로 마뜩찮은 이름으로 통했다. 1921년 모리(森)의 『조선식물명휘』에 처음으로 등장한 한글 표기 개불알달(Kaipulaltal)에서 유래하는 1937년 정태현 등이 기재한 개불알꽃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3쪽].

    Cypripedium macranthum 또는 그 유사종에 대해서 그 이전의 우리 옛문헌에는 기록도 이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최초의 이름은 일본인 식물학자 모리다메조(森爲三)의 『조선식물명휘』(1922)에서 ‘개불알달’로 보인다. 그 이후의 문헌으로 『조선식물향명집』(1937)은 ‘개불알꽃’으로 등재하였다. 이것은 맞는 이야기이다. 다만 여기서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개불알꽃에 대해 ‘참으로 마뜩잖은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기억을 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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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1> 1921년은 1922년에 대한 오기로 보인다. 『조선식물명휘』는 1921년에 원고가 탈고되었는데 교정작업으로 인하여 1922년에 출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모리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 중 緖(서) 1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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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8 우타가와 쿠니사다(歌川国貞), 「무관태부돈성(無官太夫敦盛)」, 목판 인쇄(19세기) – https://ja.ukiyo-e.org/image/waseda/100-4998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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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2> 앞서 언급한 일본명 アツモリサウ(敦盛草)에 대해 한국생태보감의 저자는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일본명 아츠모리사우(현대어는 아츠모리소우: アツモリソウ)는 아츠모리(敦盛)의 풀(草)이라는 뜻이다. 이때 아츠모리(敦盛)은 일본의 중세문학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나오는 무사(武士) 다이라노 아츠모리(平敦盛: たいら の あつもり)를 말한다. 즉 아츠모리(アツモリ)는 사람 이름이다. 그런데 무사 아츠모리는 갑옷을 보호하는 호로(ほろ: 母衣)가 부착된 갑옷을 입었으므로 아츠모리의 갑옷의 모양과 개불알꽃의 입술꽃잎의 모양이 닮았다는 것에서 일본명이 유래다. 갑옷의 장식이 아니라 무사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편평하고 도톰하게 만들어 놓은 등짐을 덮은 장식인 アツモリ(敦盛)”라고 하여 敦盛(돈성)=모의(母衣: 호로)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아츠모리(アツモリ: 敦盛)은 사람 이름을 뜻할 뿐 그 자체가 갑옷이 부착된 장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일본명의 유래를 제대로 살펴 본 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일본명은 꽃의 형태와 관련이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 ‘개불알꽃’과 연관이 전혀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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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개불알꽃을 관상용으로 재배했다?!

    위와 같은 전제하에서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논리 전개는 이어진다.

    “1921년에는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사실도 전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용된 자원식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3쪽에서 인용].

    “1921년에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사실도 전한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뢰에 따라 일본인 모리 다메조(森爲三)가 1922년에 조선에 분포한 식물을 정리하여 보고한 『조선식물명휘』의 개불알꽃 부분에 “개불알달(Kaipulaltal)(觀賞)”이라고 기록된 것을 말한다(사진6 참조). 즉,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식물명휘』에 개불알꽃(개불알달)을 ‘관상식물’로 기록했으므로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자원식물로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그 뒤에서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 드물지 않게 살았다는 논리로 연결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자원식물을 이용했다고 사실로서 확정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자원식물로 이용했다면, 우리 옛 문헌은 왜 개불알꽃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한반도에서 개불알꽃으로 오래 전부터 관상식물로 재배했다면, 왜 개불알꽃을 재배하는 흔적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화천 비수구미에서 개불알꽃을 재배하는 것은 최근에 이루어진 일이다.- 자원식물로 이용했다면, 도대체 어떤 용도로 이용한 것일까? 당연히 여러 의문이 동시에 생긴다. 굳이 식물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식물에 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생기는 의문이다. 그러나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한반도의 문화와 역사를 익숙하지 않는 일본학자가 서술한 단어 하나를, 어떠한 의문도 별도의 조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이에 의존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데 모리 다메조(森爲三)가 저술한 『조선식물명휘』는 ‘범례’에서 식물의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괄호 안에 표기한 한자 축약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사진9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1922), 범례 참조.

    “식물 응용의 일반을 나타내기 위해 괄호 안에 그 약자를 삽입했다. (救)는 구황식물, (藥)은 약용식물, (毒)은 유독식물, (食)은 식용식물, (觀賞)은 관상식물, (工業)은 공업용식물 등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상세히 조사해서 기입한 것은 아니고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오노 모토요시(小野職慤) 공저의 『일본유용식물도설』과 미요시 마나부(三好學) 저서의 『인생식물학』및 기타 2~3개의 서적으로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집록하고 기입한 것이다.”(사진11 『조선식물명휘』범례 중 6.항목에 대한 번역- 강조는 필자)

    모리 다메조(森爲三)가 『조선식물명휘』의 범례에서 직접 명시한 바에 따르면, 본문에 식물의 용도(응용)과 관련하여 기입한 관상(觀賞)이라는 표식은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이용 실태를 직접 조사해서 기입한 것이 전혀 아니다.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와 오노 모토요시(小野職慤)가 공저한 『일본유용식물도설』, 미요시 마나부(三好學) 저서의 『인생식물학 』 과 기타 이와 유사한 문헌에 기재된 바에 따라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와 오노 모토요시(小野職慤)가 공저한 『일본유용식물도설』은 1891년 일본 분포 식물을 대상으로 유용성 여부를 기록하여 일본에서 발간된 문헌이고, 미요시 마나부(三好學)가 저술한 『인생식물학 』도 1918년에 일본에서 발행된 문언으로 동일하다(아래 사진13 및 사진14 참조). 즉, 이들 문헌은 모두 일본 분포하는 일본 식물에 대한 용도(응용)에 관하여 조사 기록한 문헌들이고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한 우리의 선조들이 식물에 대한 용도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마치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조선식물명휘』를 근거로 당시 조선에서 개불알꽃을 관상식물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식물명휘』에서 ‘觀賞'(관상식물)로 기록한 것은 조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일본 분포 식물에 대한 기록이므로 이를 근거로 조선에서도 개불알꽃을 관상이나 기타 자원식물으로 사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식물과 관련된 조선의 풍습과 문화가 일본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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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3> 위 『조선식물명휘』의 기록에서 ‘小野慤’라는 표현에 실제 문헌에 비추어 볼때 ‘小野職慤’의 오기로 판단된다. 여기서 모리 다메조(森爲三)의 『조선식물명휘』(1922)가 어떤 문헌인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 책은 조선총독부의 의뢰로 조선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실태조사 차원에서 저술되었다. 1922년까지 일본인이 조사한 한반도 식물을 기준으로 888속 2914종 및 505변종에 대한 학명과 일본명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한자명과 식물의 용도를 기록하면서 조선명이 있는 경우 조선명을 한글과 알파벳으로 표기하였다.

    『조선식물명휘』(1922)는 일본인이 조사한 한반도 식물을 망라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료를 활용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 하나는 일본의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을 하나로 보고 조선과 무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식물의 용도는 한반도에서의 조선인이 활용한 용도가 아니라 일본 문헌에 근거하였고, 『조선식물명휘』의 한자명은 일본의 마츠무라 진죠(松村任三)가 저술한 『일본식물명휘』(1920)의 내용이 섞여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명을 새로이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조선어를 궁극적으로 없애고 일본어로 통일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굳이 없는 조선명을 새로이 만들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 기록에는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발생한 다수의 오기록이 있다.

    따라서 『조선식물명휘』(1922)를 활용하고자 할 때에는 『조선식물명휘』에 근거하고 있는 문헌을 살펴 조선의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것인지를 구별해야 하고, 그 명칭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당시의 한반도의 식물을 기록한 문헌과의 교차 점검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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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0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 조선총독부(1922), 251쪽

    그리고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조선식물명휘』의 개불알꽃(개불알달) 부분에서 ‘觀賞'(관상)이라는 기록만을 근거로 관상용 식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1921년에는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사실도 전한다.”(강조는 필자)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식물명휘』의 동백나무에 대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사진10 참조). 『조선식물명휘』는 그 식물이 관상용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키운 경우에는 ‘栽培'(재배)라는 표현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조선에서 실제로 재배하여 키우는 것인지는 모리 다메조가 직접 조사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선식물명휘』는 개불알꽃(개불알달)에 대해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내용을 그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키웠다’는 주장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이쯤되면 오독을 넘어서서 명백히 왜곡이 아닌가?

    어쨌든 모리 다메조(森爲三)의 『조선식물명휘』에서 개불알꽃에 대한 용도(응용)를 ‘觀賞'(관상)으로 기록한 것은, 당시 조선을 강제 병합하였고 일본 내지(內地)에서 개불알꽃을 관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므로 조선에서도 그렇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기술한 것일 뿐, 당시 조선인이 조선의 풍습과 문화로 이를 관상용으로 재배했다는 기록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사진11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오노 모토요시(小野職慤), 『일본유용식물도설(日本有用植物圖說)』, 大日本農会(1891) 표지 참조

    사진12 미요시 마나부(三好學),『인생식물학(人生植物學』, 大倉書店(1918)의 표지 참조.

    3. 개불알꽃은 전국 방방곡곡에 흔하게 분포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명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고, 더욱이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 언지리에 드물지 않게 살았을 터이기 때문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4쪽에서 인용].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조선식물명휘』의 개불알꽃(개불알달)에 관한 ‘觀賞'(관상)을 근거로 “키웠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용된 자원식물이었다”로 비약한 뒤, 한걸음 더 나아가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 언저리에 드물지 않게 살았을 터”라고 주장한다. 개불알꽃(개불알달)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었던 일제강점기에 개불알꽃이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 언저리에 드물지 않게 살았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맞을까? 물론 숲으로서의 천이로 인하여 산의 풀밭이 많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남획한 이후인 현재보다는 당시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개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개불알꽃의 독특한 생태와 번식 전략으로 인하여 전국 방방에 분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의심스럽기가 그지 없다. 실제로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당시 기록이 있다.

    사진13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 Crane), 『한국의 꽃과 민속(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 Sanseido(1931)

    미국인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e Crane, 1888-1973)은 미시시피대학교 동창생 존 커티스 크레인(John Curtis Crane, 1888-1964) 선교사와 결혼 후 선교를 위해 남편과 함께 1913년 조선의 순천에 정착하여 1954년 6월까지 기독교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31년에 조선에 분포하는 식물 148종에 대한 수채화를 그리고 식물의 조선명이 있는 경우 이를 한글 또는 한자로 표기하고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영어로 붙인 『한국의 꽃과 민속(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개불알꽃에 대해서 별도의 조선명(한글과 한자명 포함) 없이 5월에 피는 꽃으로 분류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Ladies’ Slippers abound on Chiri-san and other high mountains of the peninsula. A ‘wonderful’ headache cure is made from the bulb of the Ladies’ Slipper.”(개불알꽃은 지리산과 같은 깊은 산속에서 자생한다. 개불알꽃의 뿌리로 두통에 굉장히 효과적인 약을 만들 수 있다). 즉,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은 1931년 당시에도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가가 아니라 지리산과 같은 깊은 산속에 자라는 식물로 기록했다[Florence Hedleston Crane, 『한국의 꽃과 민속』, Sanseido(1931) 참조-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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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4> 예나 지금이나 개불알꽃을 우리나라에서 약재로 사용하였거나 사용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으므로,『한국의 꽃과 민속』에서 개불알꽃을 두통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기록은 조선의 풍습이라기 보다는, 서구에서 개불알꽃의 뿌리로 두통 치료제를 만들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서구의 풍습을 소개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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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4 무라다 시게마로(村田懋磨),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 동경목백서원(1932), 159쪽

    그리고 개불알꽃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분포 지역을 알려 주는 문헌이 또 있다. 아마추어 식물연구가이었던 일본인 무라다 시게마로(村田懋磨, ?~1943)는 조선과 만주 분포 식물을 조사하고 1932년에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개불알꽃(C. macranthum)이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북방의 산야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정확한 개체수나 그 정도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현재와 유사하게 어느 지역에 주로 많이 분포하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과 달리 개불알꽃은 조선명이 기록되었던 일제강점기에도 전국 방방곡곡의 초지나 무덤 언저리에 드물지 않게 분포하지는 않았다. 개불알꽃은 지금보다 개체 수가 더 많았겠지만, 그때에도 지금처럼 지리산과 같은 고산지대나 북쪽의 산야에 주로 분포하는 식물이었다는 것이다.

    4. 개불알꽃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관상용으로 키우다 보면, 꽃 모양과 특히 뿌리의 지린내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이름이 생겨날 수 밖에 없을 터인데, 오직 그런 이름만을 전했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3쪽에서 인용]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관상용을 키웠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Cypripedium macrantum에 대해 다양한 (조선) 이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식물명휘』는 조선에서 개불알꽃을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것을 기록한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관상용으로 키웠다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혹시라도 다양한 (조선) 이름이 있지는 않았을까?

    ​불행히도 이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먼저 앞서 살펴 본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 Crane)의 『한국의 꽃과 민속』(1931)에도 조선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른 식물에 대해 조선명이 있는 경우 일일이 필사로 한글 이름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또한 무라다 시게마로(村田懋磨)가 저술한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1932)에도 다른 부분에서는 조선명을 먼저 기재하고 중국명(支那名)을 대조한 것과 달리 아예 조선명 자체를 기록하지 않았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개불알꽃에 대한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면 현재는 그때로부터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기이므로 방언에서 다양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국립수목원은 2005년에서부터 201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식물명에 대한 다양한 방언을 실제 지역조사를 통해 수집 기록하여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2017)에 총망라하였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충남의 ‘개불알꽃나무’와 강원의 ‘개불알꽃’이 남아 있는 것이 방언의 전부이다. 개불알꽃나무라는 이름은 개불알꽃이 기본적 어형이므로 개불알꽃이 변형된 이름으로 보인다. 결국 방언 조사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은 ‘개불알꽃’ 하나이다. 다양한 이름이 존재했던 다른 식물명(예컨대 곰취, 벼룩나물, 익모초 등)의 조사에서 다양한 방언이 확인되는 것과 대비하여 보면, 개불알꽃은 다양한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확인된다.

    사진15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 국립수목원간(2017), 1149쪽

    5. 개불알꽃은 주인의식 없는 이름이다?!

    “그래서 다양한 이름이 생겨날 수 밖에 없을 터인데, 오직 그런 이름만을 전했다.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에 ‘개불알’이든 뭐든 주인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난센스일지도 모른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3쪽-강조는 필자].

    ​이제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의 최고점(climax)에 도달하였다. 먼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 스스로 ‘개불알꽃(개불알달)’은 『조선식물명휘』(1922)가 새로이 만든 이름이 아니라 다양한 이름 중에 “오직 그런 이름”이라고 함으로써, 어쨌든 일본 문화나 일본명과 관련없이 ‘개불알꽃(개불알달)’은 조선인이 만들고 불렀던 이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해 두자. 그런데 이 주장은, 그의 앞선 주장 자체가 다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별도로 심각한 사실 왜곡과 논리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가​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라고 언급한 것은 일본인 모리 다메조(森爲三)가『조선식물명휘 』(1922)에서 Cypripedium macranthum이라는 종에 대한 조선명을 ‘개불알달(Kaipulaltal)’로 기록한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조선식물향명집』(1937)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선인 학자들이 저술한『조선식물향명집』( 1937)에서도 ‘개불알꽃(Gaeblal-got)’ 을 조선명으로 기록하였으므로, 동일하게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를 가졌다고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저자들은 조선인이므로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를 가진 자에 대한 추종자 쯤 될려나? 어쨌든 모리 다메조(森爲三)는 일본인이었고 이후 장학관으로서 조선인을 제2국민으로서 열등화하기도 했으므로 식민지 점령군의 행세를 한 것은 맞다[모리 다메조(森爲三), 「發刊の辭」, 『京城博物敎員會誌』2(1938), 1~3쪽 참조].

    그런데 모리 다메조(森爲三) 개인의 조선에서의 행적 또는 그의 삶에 대한 평가라면 몰라도 조선인이 부르던 이름을 조선명으로 기록한 것을 특정하여 그것을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라고 평가하고 그 이름은 주인의식이 없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논점을 지니고 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조선인 스스로 Cypripedium macranthum에 대해서 ‘개불알꽃(개불알달)’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면 당연히 의문이 제기된다. Cypripedium macranthum에 대해 ‘개불알꽃(개불알달)’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조선인은 이 땅 한반도에서 주인이 아니라는 논리로 이어지고, 동물의 성기를 붙여 식물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는 관련이 없고, 그 문화는 주인의식 없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일본인을 향해 쏘는 듯한 비난의 화살은 실제로는 『조선식물향명집』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화살이 도달한 곳은 그 이름을 만들고 사용한 옛 사람들을 향해 날아가 꽂힌다. 그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명시적으로 밝힌 바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개불알꽃(개불알달)’을 ‘마뜩찮은 이름’이라고 하고, 그의 책 ‘선개불알풀’에 관한 부분에서 ‘개(犬)의 거시기(陰囊)’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우리 말 표현으로 동물이나 사람의 성기를 지칭하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꺼려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陰囊(음낭)이라는 한자 표현은 무방해도 불알이라 불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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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5> 『조선식물명휘』(1922)에 기록된 ‘개불알달(Kaipulaltal)’은 어떤 이름일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 이름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별도로 조선명을 새로인 만들어 신칭하지는 않았던 『조선식물명휘』의 다른 식물에 대한 명칭과 비교하여 살피면, 실제 조선에서 사용하였던 명칭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의 의미로 보면 ‘개’와 “불알’과 ‘달’의 합성어로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 ‘달’은 둥근 모양으로 달(月)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 조선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별도의 조사를 통해 우선적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개불알꽃(Gaebulal-got)’으로 기록한 것이나 국립수목원의 방언 조사 등을 고려하면, ‘개불알꽃'(또는 개불알풀)을 오인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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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처럼 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조선인이 사용하는 불알이라는 명칭이 포함된 ‘개불알달(Kaipulaltal)’이라고 기록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이거나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아래 우리 옛 문헌의 기록은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다(사진16~사진19 참조).

    – 『동의보감』(1613) : 天麻, 슈자ㅎ.ㅣ좃(현대어 : 수자해좃) ==> 천마<Gastrodia elata Blume (1856)>로 추정

    – 『동의보감』(1613) : 繁蔞, ㄷ.ㄹㄱ.ㅣ의십가비(현대어: 닭의십가비) ==> 닭의장풀<Commelina communis L.(1753)>로 추정

    – 『동의보감』(1613) : 白頭翁, 할ㅁ.ㅣ십가비(현대어: 할매십가비) ==>할미꽃<Pulsatilla cernua (Thunb.) Bercht. ex J. Presl(1825)>으로 추정

    – 『물명고』(1824) : 天門冬, 홀아지좃(현대어: 홀아비좃) ==>천문동<Asparagus cochinchinensis (Lour.) Merr.(1919)>으로 추정

    『동의보감』과『물명고』에 기록된 위의 한글 명칭은 약재로 사용하는 뿌리의 모양에 근거해서 형성된 이름으로 모두 남성(수컷) 또는 여성(암컷)의 성기를 뜻하는 이름이다. 앞서 살핀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와 같은 논리라면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선생이나『물명고』를 저술한 유희 선생은 모두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이거나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저런 이름을 기록한 것이 된다. 식물의 이름에 식물의 생긴 모습에 근거하여 동물이나 사람의 성기를 빗대어 붙이는 것은 서양이나 일본에도 우리에게도 있는 문화이었다. 그것이 비록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보기에는 마뜩잖은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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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6> 위의 우리 옛문헌에서 ‘좃’이 수컷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십갑이(십가비)’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이 주된 것이다. 닭의장풀에 관한 설명에서는 ‘십가비’가 여성의 성기에 관한 상징성 명사로 추정한다고 했다가 할미꽃에 대한 설명에서는 느닷없이 ‘십가비’가 머리에 쓰는 모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같은 책에서 같은 단어를 달리하는 해석하는 것도 의아하지만, 머리에 쓰는 모자를 ‘십가비’로 사용한 예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1』, 인물과 사상사(2013), 221쪽 및 44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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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6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년 출간 ‘天麻'(천마) 부분

    사진17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년 출간 ‘繁蔞'(번루) 부분

    사진18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년 출간 ‘白頭翁'(백두옹) 부분

    사진19 유희, 『물명고(物名考)』, 1824년 저술 추정, ‘天門冬'(천문동) 부분

    6. 남는 한두가지 주장에 대하여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앞서 살핀 그룻된 분석과 오류에 근거한 상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주장을 이어간다. 그중 한 두 가지만 더 살펴보도록 하자.

    “굳이 긍정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난 종류를 지칭하는 영어를 실마리로 만든 이름일 수도 있다. 영어 오키드(orchid)는 수컷 포유류의 고환(睾丸)을 뜻하는 라틴어(orchido)에서 비롯한다. 애당초 서양인들의 무자비한 육식문화를 떠올리는게 하는 이름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난 꽃을 두고 불알을 연결시키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측은지심에서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4쪽].

    영어 오키드(orchid)가 수컷의 불알(睾丸)을 뜻하는 라틴어 오르키도(orkido-)에서 유래한 것은 맞다. 그러나 영어나 라틴어에서 ‘개불알달’이 유래했다는 주장을 하려면『조선식물명휘』(1922)에서 조선인을 위하여 조선명을 새로이 만들어 신칭한 사례라도 들어야, 논증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는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개불알꽃을 기록한『조선식물향명집』(1937)은 사정요지에서 (i) 수십년간 조선 각지에서 실지 조사 수집한 향명을 주로 하고 (ii) 종래 문헌에 기재된 것을 참고로 하고 (iii) 교육상 실용상 부득이 한 것(명칭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여러 요소를 참작하여 명칭을 신칭한다고 하였다. 새로이 명칭을 신칭하는 경우 그 한 요소로 ‘학명의 의의’를 고려하였지만, 그것은 해당 식물(“그 식물”)의 학명이었지 난초과라는 과명을 빌어온다고 하지는 않았다. 실제 그렇게 이름을 신칭한 사례 없다[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사정요지 참조].

    “굳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영어에서 옮겨 왔다고 할 그 어떤 근거도 사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스스로 ‘개불알꽃'(개불알달)이 조선인이 사용한 이름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과도 배치된다. 게다가​ 난초과의 식물에 수컷 포유류의 고환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넣는 것이 서양인들의 무자비한 육식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이름을 실제 사용한 선조들은 어떻게 되고 『동의보감』(1613)을 저술한 위대한 의학자 허준 선생은 무엇이며 실학자로서 사물의 명칭을 찾고자 했던 유희 선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모두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를 가졌거나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고, 나아가 ‘무자비한 육식문화’에 찌든 측은지심의 대상이라는 말인가? 『동의보감』이나 『물명고』에 기록된 천마, 닭의장풀, 할미꽃 및 천문동도 모두 난초과, 닭의장풀과 및 백합과에 속하고 다 아름다운 식물들이다.

    “최근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채택된 복주머니란이라는 명칭은 1996년에 제안된 것이다. 엄격히 보면 국제명명규약의 선취권에 따라 정당한 이름이 되지 못한다. 진퇴양난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 자연과 생태(2016), 704쪽].

    식물에 대한 국제명명규약의 정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de of Nomenclature for algae, fungi, and plants이다. 이 국제식물명명규약은 학문을 위한 세계 공통어로서 학명을 규율하기 위한 것이지, 식물명에 대한 국명(common name)을 규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장진성·홍영표 역/편집, 『조류, 균류와 식물에 대한 국제명명규약(멜버른규약, 2012)』, 국립수목원(2016) 참조]. 따라서 국명에는 먼저 기록한 것이 우선한다는 선취권이나 오로지 하나의 이름을 정명(correct name)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규칙이 없다. 식물명에서 국명은 각 언어권이 식물과 맺어온 관계를 반영하는 살아있는 언어로서 식물을 부르는 각 언어권의 고유한 이름일 뿐이다.

     

    우리나라 과학자에 의하여, 과학으로서 식물분류학에 따라 한반도 분포 식물의 종을 분류하고 이에 대한 한글 식물명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은 『조선식물향명집』(1937)이다.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저술은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살아있는 언어로서 당시 조선인이 사용하는 보편적 이름에서 찾고자 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당시 국권이 침탈되어 민족어가 소멸되어 가던 시기에 민족어를 살리고 지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와 흐름을 같이 한 것이기도 했다. 식물에 대한 조선명 기록 방법도 조선어학회가 사용한 실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하여 정리한다는 뜻을 가진 ‘사정(査定)”이라고 하였고, 그 사정의 제1원칙을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명은 그대로 채용함”으로 삼았다[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중 사정요지 참조].

    식물의 종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식물분류학에 따르지만, 그에 기초하여 종에 대한 국명은 한국어로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일종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언어를 찾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된다. 그것은 전통에 따른 이름일 수도 있고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일 수도 있다. 진퇴양난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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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7> 『조선식물향명집』(1937)을 발간한 조선박물연구회와 그 저자들(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의 식물에 대한 조선명 사정 작업이 조선어학회와 함께 민족운동으로서 흐름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어학회가 큰사전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1936년 발간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머리말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각 전문 어휘에 관하여 다방(多方)으로 교시(敎示)하여 주신 조선박물연구회 및 정문기: 수산어(水産語), 조복성 : 곤충어(昆蟲語). 이덕봉 : 식물어(植物語), 송석하 : 민속어(民俗語) 제씨와 회의시 모든 편의를 주신 경성 천도교회, 온양 영천의원, 온양 예수교회,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 및 각 신문사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삼가 표한다. 1936년 10월 28일 조선어학회”(한자의 한글화 및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7. 소결론

    이상에 살펴본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 또는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난초과의 Cypripedium macranthum Sw.이라는 종은 한반도에서 지리산과 같은 높은 산지나 북부 지방에 주로 분포하였다. 이 종의 식물을 우리의 문화와 관습에서 약용, 식용 또는 관상용(화훼용) 등으로 활용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식물명을 다양하게 불렀다는 것은 자료와 문헌의 기록에 근거하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저술한 『조선식물명휘』(1922)에 ‘개불알달’로 최초 기록되고,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되어 기록되었다. 최근 방언 조사에 따르면 개불알꽃 또는 개불알꽃나무로 불리우는 것이 확인된다. 한편 옛 문헌의 기록을 살피면 우리의 문화에도 동물이나 사람의 성기를 식물명의 붙어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당시의 중국명, 일본명 그리고 학명과도 의미가 전혀 다르고, 『조선식물명휘』(1922)가 조선인을 위하여 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별도로 신칭하지 않았으며, 『조선식물향명집』(1937)은 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찾아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했던 점 그리고 현재의 방언과 옛 문헌에 대한 나타나는 식물명의 역사를 고려하면 ‘개불알꽃(개불알달)’은 실제 조선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채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조선식물명휘』(1922)에서 개불알꽃(개불알달)에 대해 ‘觀賞'(관상)이라고 기록한 것은 일본에서 관상용으로 사용하므로 조선에서도 이러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정도의 뜻으로 이를 실제 조선에서 관상식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는 것은 오독이다. 『조선식물명휘』(1922)는 개불알꽃(개불알달)에 대해 관상용으로 키웠다(재배)고 기록한 바 없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논리비약이거나 왜곡이다. 개불알꽃의 생태나 당시의 기록에 비추어 전국 방방곡곡에 드물지 않게 분포하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으며 그것을 확정적으로 단정한다면 이 역시 논리비약이나 왜곡이다. 개불알꽃 외에 달리 불렀던 이름은 확인되지 않으며, 특별한쓰임새가 있는 식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도 낮다. 우리의 문화에도 동물이나 사람의 성기를 식물명을 차용하여 왔으며 개불알꽃도 그 한 예이므로 이에 대한 기록을 ‘식민지 점령군의 정신머리’를 가졌거나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거나 ‘무자비한 육식문화’에 찌든 측은지심의 대상이라는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우리의 문화를 반영한 주장도 아니다.

    [4] 결론

    옛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난초과의 식물을 왜 개불알꽃이라 불렀을까? 이름이 탄생하던 시기의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한 내막은 알기 어렵다. 깊은 산속을 걷다 보면 아름답게 피어 마주치는 꽃, 특별한 쓰임새는 없었지만 꽃의 모양이 워낙 독특해서 함께 거주하며 살아가는 개(犬)의 불알(陰囊)처럼 보이는 꽃. 해학과 친근감의 표현 아니었을까? 개와 불알과 꽃에 대한 어떠한 비하도 없고 단지 주위에 친근한 사물을 비유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옛 문헌의 수자해좃(천마), 닭의십가비(닭의장풀), 할매십가비(할미꽃)와 홀아비좃(천문동)이라는 이름은 약재로도 중요성이 있었던 식물인데도 그런 명칭을 사용한 것에 비추어 보면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은 더욱 그러하다. 왜 동물이나 사람의 성기를 식물명에 붙이면, 더욱이 그말이 우리말 표현이면 ‘마뜩찮은’ 이름이 되어야 하는가? 음낭(陰囊), 고환(睾丸) 나아가 영어 표현 오키드(orchid)는 괜찮고 우리말로 ‘불알’이라고 하면 안 되는 문화는 어디에서 유입된 것인지 몰라도, 식물명을 기록한 우리의 옛 문헌에 따르면 우리의 문화는 아니다.

    1996년 어느 학자가 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여학생에게 불알 운운하는 것이 상스럽다는 이유로 ‘복주머니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사유인지 산림청이 관할하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추천명으로 등재되었고, 현재는 그 이름이 개불알꽃보다는 보다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식물의 꽃이 이미 생식기인데 동물의 성기에 관한 우리말을 식물명에 쓰는 것이 왜 상스러운 일인지, 그것을 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문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추천명은 말 그대로 추천하는 명칭일 뿐이며 예로부터 불러오던 이름을 배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개불알꽃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특별히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개불알꽃이라는 이름보다 복주머니란이 더 아름답고 낫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존중할 일이다. 식물명에서 국명은 언어공동체가 동일한 종의 식물을 같이 부르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이름이 시대에 필요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방해되거나 장애되지 않는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언어로서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위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주머니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견해도 존중하며 복주머니란이라고 부른다고 무슨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주관에 ‘개불알꽃’이 마뜩잖은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의 문화로 소개된 것을 제대로 자료도 찾지 않고 마치 그것이 우리의 문화인양 전제하고, 그 위에서 개불알꽃의 식물 생태에도 맞지 않으며 아무런 근거도 없이, 관상용으로 키웠던 오래된 자원식물이었다는 둥, 전국 방방곡곡에 드물지 않게 살았다는 둥, 발견되지 않는 머리속의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는 따위 논리 비약과 왜곡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나아가 그 이름을 사용한 선조들을 욕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과학으로 포장된다고 하더라도, 문헌의 기록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 남의 문화를 근거로 마치 그것이 문화인 양 하는 것인 한 존중해 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 곳에나 침을 뱉으면 자신의 얼굴 위에 떨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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