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들의 침묵이 너무 깁니다
    By
        2006년 07월 25일 09:29 오전

    Print Friendly

    4년 전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꺾고 4강에 진출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송두리째 기적에 감전됐었다. 온몸이 찌르르 하도록 기적이 충전된 한국사회는 바로 이어졌던 대선에서 가장 가망 없던 후보 노무현을 기존 정치판에서 듣도보도 못한 팬클럽의 바람몰이로 대통령 당선으로 이끌어 내는 사상초유의 정치적 스펙타클을 만들어 낸다.

    모든 정치판의 논리를 비웃듯 분쇄해 버리고 선거를 반전의 축제로 만들며 시민의 승리를 이끌어 낸 주역은 ‘반듯한’ 문성근과 ‘의뭉한’ 명계남이었다.

    이들은 영화판에서처럼, 세인으로부터 잊혀진 왕년의 (청문회)스타에게 새 배역과 새 이미지를 입힌 후, 탁월하게 잘 짜인 시나리오와 그의 장점들을 극도로 부각시키는 스타마케팅을 합세시켜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냈다. 이미 기적에 감전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던 한국 사람들은 기꺼이 이 드라마에 불려 나와 역전의 신화를 만드는 주역이 되어주었다.

       
    ▲ 2002년 12월 19일 밤 광화문앞에 모인 노사모 회원들이 노무현 후보 당선확정이 발표되자 함성을 지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절정에서 물러나 여전히 한국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2002년의 또 다른 주인공 히딩크와 달리, 2002년 대선의 히어로 노무현은 그 때부터 흥행을 생각한다면 찍지 말았어야 할 본격적인 속편을 찍어야 했다.

    정치는 영화도 축구도 아니었기에, 이 긴 속편은 서너 달에 결판이 났던 전편과는 달리 3년이 넘은 지금도 아직도 끝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갈수록 헤어나기 힘든 진흙탕이 되가는 이 시나리오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엑스트라가 되었든, 구경꾼이 되었든 다음 해까지는 이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는 없는 제도의 덫에 갇혀 있다.

    이 한편의 드라마가 고삐 풀린 말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질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 제어 안 되는 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우리 삶의 기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게 하는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일찍이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이토록 일관되게 미움을 사는 인물을 권좌에 둔 기억이 없다. 90년대 이후 이토록 풍성한 집회와 시위 거리를 지치지 않고 제공한 정권도 없었다.

    이제 급속히 난폭해지는 전경들을 마주하며, 우리의 미지근했던 심장에 불을 지피는 친미관료와 그 관료들과 시장에 기꺼이 권력을 내준 최고 권력자를 공격하는 구호를 내지르며, 4년 전 이 악몽 같은 드라마가 시작될 때, 맨 앞에서 서서 기꺼이 연출자의 역할을 떠맡았던 두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없다. 도대체 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보수언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친일을 했던 조상 때부터, 삐까번쩍하게 불려왔던 인맥, 혼맥, 학맥, 재력을 배경으로 가진 전형적 한국의 보수반동적 엘리트주의자를 상고출신의 빽 없는 집안 아들이 이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혁명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따라서 대활약을 했던 두 딴따라들에 대해 어떤 유감도 원망도 없다.

    그러나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 당선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버리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는 걸 이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끝까지 책임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에너지를 발산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이 오만과 독선에 빠져 온 국민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저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라 “반미면 또 어떠냐”고 서투르게 외치던 바보 노무현이었다면, 지금 문성근과 명계남은 적어도 말해야 한다.

    이들은 최근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영화판, 연극판으로 돌아가 본업인 연기자로 서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반기는 바다. 그러나 살아있는 정치적 양심을 갖고 행동하기 위해 자신의 본업을 작파할 필요도 없으며,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정치적 양심을 버려야 할 이유도 없다.

    열정적 공산당원이면서 활활 타는 예술적 열정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던 피카소, 평생 좌파의 길을 걸으면서도 댄디함과 자유분방함의 상징이었던 프랑스 국민배우 이브 몽땅, 그리고 폭우 속 FTA반대집회에서 소리 높여 선언문을 낭독하던 아름다운 문소리가 이를 잘 입증한다.

    문성근, 명계남은 한국 정치판에서 언제나 액세서리 정도의 부수적 역할만을 담당해왔던 대중예술가들이 처음으로 양심을 건 정치적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해 낸 사건을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대중적 영향력과 정치권에서의 입지를 개인적 권력창출로 이용하지 않은 보기 드문 사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빠’라는 최악의 닉네임이 대변하듯, 아직도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건 반이성적 사고의 광신도쯤으로 취급되는 요즘, 이들은 영화계 안팎에서 정치참여 후 ‘최대의 피해’를 입은 영화인이 돼버렸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는 이런 식의 표현은 그들이 정치 도박을 했을 때에만 적절한 표현이 된다. 한국에서 정치권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대부분 도박으로 읽혔다. 잘하면 크게 한 몫 잡는. 대개는 신세망치기 딱 좋은. 그러나 정치 참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사람으로서의 갖는 시대적 양심에서였다면, –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일로 인해 양심수로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아니라면 – 피해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이 된다.

    공산당이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가장 강력한 희망의 정당이었을 때, 열성 당원으로 활약하던 이브 몽땅은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하고 프랑스 공산당도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고 공산당에 대한 맹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정치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오히려 더 왼편에 서서 평생 좌파의 길을 지켜간다. 좌파의 길은 그가 원한 삶의 색깔이자 자신이 사랑한 프랑스 사회에 그가 바라는 사회적 양심이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선 어떠한 사회적 이슈가 등장하건, 시위대의 중심에는 노동자 학생뿐 아니라,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우리 삶에 산재한 권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일탈과 자유 영역을 탈취하기를 시도하는 일이라는 면에서 진보적 정치투쟁과 그 본질을 같이 한다. 우리가 자기 개혁을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오른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정권은 우리에게 통렬하게 바로 그 점을 일깨운다. 출발 지점에서 이들은 비교적 왼쪽에 서 있었으나 적어도 그렇게 믿었으나 – 자신에 대한 검증의 칼을 갈기를 멈춘 순간, 이들은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우회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저 같은 레이스를 달리고 있었을 뿐이었겠지만.

    이회창 보다 나은 선택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 투항하시라. 그게 당신들이 여전히 당당한 양심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