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 경배의 공간과 동상다몽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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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05일 03: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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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에 게재된 <예술적 공동묘지가 돼가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독자들의 댓글을 읽고 필자가 보내 온 보론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필자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나니 서둘러 쓴 티가 역력하다. 독자들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의 글이 철회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오해될 여지가 있는 거친 문장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논리의 비약이라 할 만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수정하고 보충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나는 글 말미에 “지금의 우리가 <녹색 방>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의 무한한 생성’이 없는 삶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돌아보고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을 살피고 내다보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쥘리앙의 비극은 후자를 지나치게 경시하거나 전자에 지나치게 빠져든 자의 비극이다”라고 썼다.

여기선 특히 마지막 문장이 거슬린다. 왜냐하면 <녹색 방>은 분명 과거에 대한 애도에 빠져있는 자인 쥘리앙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애도의 필요성에 대해 강력하게 호소하는 영화기도 한 까닭이다.

   
 ▲ 영화 <녹색 방>의 한 장면
 

쥘리앙으로 하여금 강박적인 애도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 ‘망각의 사회’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했다. 인간적 기억에 의존하여 기어이 모든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기획에 착수한 실존적 영웅의 모습이 <녹색 방>에는 담겨 있다. 기억으로서의 애도 혹은 애도로서의 기억.

우리의 시네마테크,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애도-기억의 노력이 있다는 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것을 무심결에 간과해 버리는 우를 범했다.

“…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스크린에 영사된 흐릿한 그림자들을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에 대해 언급할 때, 나는 그들을 향한 경멸이나 안타까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기념일만 되면 국립묘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어르신들 마냥 “유명감독이나 배우들을 내세운 상영회가 열릴 때면, 또는 정전의 자리에 오른 유명한 영화가 상영될 때면, 또는 제법 구색을 갖춘 이벤트성 행사가 열릴 때면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객들과 달리, 그들은 꾸준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망각에 저항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나의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술적 공동묘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녹색 방>에서의 쥘리앙의 애도의 공간이 예배당을 개조한 애도의 공간, 즉 예배당이자 묘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시네마테크는 어쩔 수 없이 경배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 모인 모두가 다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동상다몽’(同床多夢)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꿈을 꾸고 제각기 자신만의 상상의 예배당을 따로 만들 것이다.

시네마테크의 임무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족하다. 문제는 이 공간이 점점 묘지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정말이지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했던 건 사실이다.

여러 이유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꼽고 싶은 것은 기존의 ‘정전’(canon)에 집착하는 혹은 집착하게끔 만드는 영화문화이다. 이건 우리의 영화문화가 아직 미성숙의 단계에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징표이다.

마땅히 (재)발견의 공간이 되어야 할 시네마테크가 거장의 영화들, 교과서의 영화들을 ‘필름으로 확인’하기 위한 공간으로 변해갈 때 시네마테크는 공동묘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같은 감독의 영화라도 그 유명세에 따라 관객 수가 ‘비정상적으로’ 편차를 보이는 현상은 정말이지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불평이 “…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스크린에 영사된 흐릿한 그림자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 관객들에게 향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위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바로 이 소수의 관객들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우를 범했으며 그런 까닭에 이러한 이유에 대한 지적은 그냥 지나쳐도 좋다고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불평은 차라리 강단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영화교육자들에게나 적합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견’의 희열을 가르친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곧바로 (그 소수의 관객들을 향한 발언인) ‘관계의 무한한 생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 몇몇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나는 여기서 그에 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나는 ‘관계의 무한한 생성’이라는 말을 통해 “골방에서 나와 사람들과 대화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인간관계의 무한한 생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애도-기억의 노력이 언젠가 애도-기억되는 대상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절박한 사유와도 결합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즉 “요즘 영화들은 예전 영화들에 비하면 시시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한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표현이 명료하지 않았고 논리 전개 또한 영 매끄럽지 못했다).

기억과 발견의 노력이 지금 동시대의 상영관 어딘가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영화들에게로까지 향하길 바랐다는 것이다. 이건 소위 ‘예술영화 전용관’이라 이름 붙여진 상영관들에서 보여지는 영화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소리 없이 개봉했다 사라지는 변방의 영화들, 할리우드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미리부터 영화광들의 기피대상이 되어 버리는 영화들, 혹은 아예 상영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DVD로만 출시되었다 잊혀지는 영화들 가운데서도 ‘발견’의 기쁨을 누릴 기회는 충분히 있다. 만일 이런 기회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영화광들 스스로가 시네마테크를 공동묘지로 화하게 하는 작업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옛 영화들 속에서 우리의 동시대적 고민을 발견하며 동시대의 영화들 속에서 과거와의 연대 및 미래의 비전을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건 공동묘지의 정적에 소란을 불러들이는 일이며 ‘유형의 시네마테크’를 넘어선 수많은 상상적인 ‘무형의 시네마테크’를, 미래의 시네마테크를 창조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툰 글에 귀중한 의견을 달아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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