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의 신단수는
박달나무 아닌 자작나무?!(2)
[비판] 진정 우리 식물명 왜곡하는 자는 누구인가②
    2019년 04월 22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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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레디앙 칼럼 글을 통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식물명의 일제 잔재 청산 등등을 운운하며 오히려 식물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는 주장과 글들에 대해 비판을 해왔다. 이번 글도 그 맥락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반론 혹은 이견이 있다면 토론을 위해 언제든지 환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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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비판] 우리 식물명을 진정으로 왜곡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1. 글을 시작하며

2. 신화 속의 식물명에 대한 종의 특정이 가능한가?

3. 주장의 오류와 왜곡들

1) 박달나무는 크게 자라지 않는 나무인가
2) 바이칼호가 민족의 기원지?
3) 배달민족이 예부터 사용되어 온 이름?
4) 삼국유사의 신단수는 어떤 식물인가?
5) 박달나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박달나무에 열매가 달린 모습(사진 촬영자 : Sokey님)

박달나무 수피의 모습(사진 촬영자 : Sokey님)

6. 박달나무와 자작나무에 대한 옛 기록들

위 견해의 주장자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를 근거로 신단수는 박달나무이고, 박달나무는 (수피가) 밝은 나무를 뜻하므로 수피가 밝지 않은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로 지칭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자가 한 단군신화를 왜곡한 행위라고 단정 짓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저술된 고려말기 이후에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의 옛 문헌에서 박달나무와 자작나무가 어떤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였는지를 누락하고 있다. 박달나무와 자작나무라는 한글 명칭이 나타나는 것은 한글이 창제된 1446년 이후의 일이므로, 이시기의 식물 명칭을 살펴보아야, 만의 하나라도 명칭이 바뀌었다면,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일어난 것인지를 알 수 있기에 이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1) 박달나무에 대한 옛 기록들

– 檀/박달(신증유합, 1576)
– 牛筋木/박달나모/曲理木(역어유해, 1690)
– 牛筋木/박달나모(동문유해, 1748)
– 朴達木(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 1759)
– 朴達木(영종대왕실록청의궤, 1776)
– ​梀/박달나모/(한청문감, 1779)
– 朴橽木(일성록, 1789),
– 檀/박달/曲理木(광재물보, 19세기 초엽)
– 牛筋/박달(물명고, 1824)
-​ 檀/朴達木(오주연문장전산고, 19세기 중엽)
– 檀香/박달(명물기략, 1870)
– 박달나무/檀木(한불자전, 1880)
– 박달나무/檀木(국한회어, 1895)
– 善木/배달나무/박달나무/檀(신자전, 1915)
-​ 박달나무(조선구전민요집, 1933)

16세기말 한자 학습 입문용으로 저술된 신증유합에서 ‘檀'(단)을 한글로 ‘박달’이라고 기록한 이래 옛 문헌에서 ‘檀'(단) 또는 ‘檀木'(단목)을 박달나무로 기록한 것이 종종 보이고 있다. ‘檀'(단)은 중국의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시경(詩經)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등장하고, 청나라 오기준(吳其濬)이 편찬한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에서 靑檀樹(청단수)로 기록되었으며, 현재 중국식물지(2019)는 Pteroceltis tatarinowii Maximowicz(중국명: 青檀, qing tan)을 지칭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옛 문헌 중 실학자 서명응(1716~1787)이 저술한 본사(本史, 1787)와 정약용(1762~1838)이 저술한 아언각비(雅言覺非, 1819)에서 ‘檀'(단)은 중국의 문헌과 내용을 직접 언급하므로 중국의 청단(靑檀)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은 기록이다. 또 중국어를 이해하기 위한 어휘서인 역어유해(1690)를 비롯한 많은 문헌은 한글명 ‘박달(또는 박달나모)’를 중국에서 유래된 한자 檀(단)과 관련을 짓지 않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제왕운기 등에 기록된 神檀樹(신단수)에 ‘檀'(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로 박달나무로 단정하여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중국의 청단(靑檀)은 느릅나무과(Ulmaceae)로 한반도에 분포하지 않는 식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연유로 한자어 檀(단)이 박달나무로 이해되었을까? 여기에는 檀(단)에 대한 중국 문헌의 해설이 박달나무의 생태와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먼저 중국의 주나라의 제도를 논한 유교경전 周禮(주례)에 대하여 후한(後漢) 말기의 유학자이었던 정현(鄭玄, 127~200)이 달았던 주(註)에 국가가 나무에서 불을 채취하여 지방에 내려 보내는 개화령(改火令)과 관련하여 “楡柳靑, 故春取之, 杏棗赤, 故夏取之, 至季夏而土旺, 故取桑柘黃色之木 柞楢白, 槐檀黑, 故秋冬[비술나무(楡)와 버드나무(柳)는 푸르기 때문에 봄에 불을 취하고, 살구나무(杏)와 대추나무(棗)는 붉기 때문에 여름에 취하고, 계하에 이르러 토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뽕나무(桑)와 꾸지뽕나무(柘)의 황색 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산유자나무(柞)와 졸참나무(楢)는 희고 회화나무(槐)와 단(檀)은 검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에 각각 그 철의 방위 색에 따라 불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檀(단)을 수피가 검은 나무로 인식하였다. 정현의 위와 같은 기록은 유교를 숭상하였던 조선시대에 유입되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그 표현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에 기록된 ‘檀'(단)과 관련하여 정약용의 아언각비(1819) 등은 “所稱伐檀樹檀者 堅靭之木 可爲車輻者也“[이른바 ‘벌단’의 나무 단(檀) 은 굳고 질긴 나무로 수레의 바큇살을 만들 만한 것이다]라고 하여 중국의 檀(단)을 매우 굳고 질기며 수레의 바큇살을 만드는 나무로 인식하여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와 그 성질이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중국의 ‘檀'(단)을 수피가 검고 불을 채취하는 나무이자 목질이 단단하여 수레의 바큇살을 만드는 나무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하나 살펴보자.

태종실록 중 태종6년(병술년, 1406) 3월 24일의 기록; “자유백 괴단흑 고추동”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 1406년 3월 24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중국의 주례에 대한 정현의 각주(註)와 동일한 문언을 언급하며 태종이 개화령(改火令)을 발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겨울에 불을 채취한다는 ‘檀'(단)이 정확히 어떤 종의 식물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회화나무(槐)와 더불어 檀(단)을 수피가 검은 나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고려 말의 제왕운기(1287)가 저술될 시점에서 신단수의 ‘檀'(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2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檀'(단)을 수피가 흰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럼?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개화령(改火令)를 발한 태종이나 태종실록을 저술한 사관들이 일제의 부역자들이었을까?

신이행(愼以行) ·김경준(金敬俊)·김지남(金指南) 등, 『역어유해(譯語類解)』, 사역원(1690) 중 ‘樹木’ 부분

또한 조선시대에 외국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던 사역원에서 17세기 말엽 편찬한 중국어 어휘집(현: 중한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 1690)는 표제를 ‘牛筋木'(우근목)으로 하고 그 한글명을 ‘박달나모’라고 기록하였다. 다른 한자어 曲理木(곡리목)을 ‘上仝'(상동)이라고 하여 우근목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牛筋木(우근목)을 뜻으로 풀이하면 소의 힘줄과 같이 단단하고 질긴 나무라는 의미이고, 曲理木(곡리목)은 굽은 나무결을 가진 나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 당시 표본이 되는 식물 개체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어유해의 ‘牛筋木, 박달나모’가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어유해의 ‘牛筋木, 박달나모’는 한자의 뜻을 살피면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와 유사하고, 현재의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와 관련은 없는 기록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현재 중국은 ‘牛筋木’을 장미과 홍가시나무속에 속하는 Photinia beauverdiana Schneid(中华石楠; zhong hua shi nan)의 俗名(속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나무 역시 목재의 재질이 坚硬(견경; 단단하고 견고함)하다고 한다.

1776년 작성된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중 신축년(1721년) 4월 29일 감결(甘結) 에 관한 내용

그리고 조선시대 문헌에 한자로 ‘朴達木'(박달목) 또는 ‘朴橽木'(박달목)으로 표기된 것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이 한자어의 발음을 고려하면 모두 박달나무(박달나모)를 표기하기 위한 이두식 차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조(正祖; 1752~1800) 때 영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실록청의 전말을 기록한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에 신축년 4월 29일의 기록으로 “方下公伊次 朴達木 以軆大者一介“(방아공이로 쓸 박달나모도 몸체가 큰 것으로 1개)라는 기재가 있다. 方下公伊(방하공이)도 이두식 차자로 현재의 ‘방아공이’를 표기한 것인데, 방아에서 곡식을 찧게 되는 핵심 부위로 주된 재료가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로 만들었던 것이므로, 영종대왕실록청의궤의 ‘朴達木'(박달목)도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를 지칭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론된다.

​한편 조선시대 국왕의 동정과 국정 수행을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의 정조 13년 기유년(1789년) 8월 5일 기록은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이 “朴橽木”(박달목) 3그루를 강원도의 원주판관(原州判官)이 영운(領運)하여 8월 4일에 두물머리(兩水頭)에 도착하였음을 보고하는 내용도 있다. 지금처럼 강원도에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를 식재하여 키웠다는 기록이 없고 그 남방 한계선이 함경남도인 점에 비추어 일성록의 朴橽木'(박달목)은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라기보다는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에 가까울 것이다.

19세기 중엽 실학자 이규경(1788~1863)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檀今俗鄕名朴達木 似是以此造弓也“(단은 속향명으로 박달나모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으로 활을 만든 것 같다)라고 하였다. 무기를 제조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은 그 재질의 단단함으로 인하여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가 아니라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이었으므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朴達木'(박달목)도 현재의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를 지칭하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론된다.

(2) 자작나무에 대한 옛 기록들

– 樺木(향약집성방, 1433)
– 自作木(세종실록지리지, 1454)
– 桬木/ᄌᆞ작나모(사성통해, 1517)
– 沙木/ᄌᆞ작나모(역어유해, 1690)
– 자쟝나ㅁㄱ(청구영언, 1728)
– 自作板(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 1759)
– 白樺(강좌집, 1800)
– 沙木/ᄌᆞ작나모(물명고, 1824)
– 白樺木(대동수경, 19세기 초엽)
– 白樺木(오주연문장전산고, 19세기 중엽)
– 梓/梓柞/ᄌᆡ쟉(명물기략, 1870)

권만(權萬), 『강좌집(江左集) 』, 18세기말 저술 및 1800년 출간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권만(權萬, 1688~1749)이 저술한 강좌집(江左集)은 “長白山中多白樺“(백두산 중에는 자작나무가 많구나)라고 노래한 시구가 있다. 현재 국어표준대사전은 “백화 白樺(배콰) : [명사] 식물 [같은말] 자작나무(자작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으로 정의하고 있다. 백두산에 분포하고 흰색(白)의 화(樺)를 자작나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단(檀) 또는 단목(檀木)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초 저술한 지리지인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백두산과 관련하여 “前臨水林盡處 有白樺木 宛如栽植“(물에 다다르기 전 숲이 다한 곳에서 자작나무가 있는데 마치 심어 놓은 듯하다)라고 하여 백두산에 있는 흰색의 심어 놓은 듯이 모여 있는 나무를 백화목(白樺木)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말엽 황비수(黃泌秀, 1842~1914)는 그의 저서 명물기략(名物記畧, 1870)에서 “梓 ㅈ.ㅣ 俗云梓柞 ㅈ.ㅣ쟉 木似桐而葉小花紫 材莫良于梓 爲白木之長“[梓재는 속칭 재쟉(梓柞)이라고 하는데 나무가 오동나무와 비슷한데 잎이 작고 꽃은 자주색이다. 목질은 재(梓)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서 흰색의 나무의 맏이 된다]라고 하였다. 즉, 자작나무가 흰 수피를 가진 나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북한 지역의 향토적 방언으로 민족적 서정을 노래한 시인 백석(1912~1996)의 시 ‘白樺'(백화)를 살펴보자. 이 시에서 자작나무는 산골을 온통 덮어서 군락으로 자라므로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가 아닌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이다. 그런데 자작나무와 박달나무가 일제 부역자에 의하여 왜곡되었다는 견해의 주장자에 따르면, 이 시에서 자작나무는 모두 박달나무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백석의 白樺(백화)는 잡지 『조광』 제4권3호(1938.3.)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는 위 견해의 주장자가 일제 부역자로 특정한(!) 조선식물향명집(1937)이 저술된 때로부터 정확히 1년이 되는 때이다. 백석 시인은 일제 부역자의 부역 행위에 추종하여 박달나무를 모두 자작나무로 바꿔치기 한 것일까?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위 견해의 주장자의 주장대로라면 당연히 그러한 결론이 도달하게 될 것이다.

白樺/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Note : 근대 식물분류학이 도입되기 이전의 옛 문헌에서 식물명은, 종(species)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며 분류된 식물의 표본을 보관하고 그 특징을 기재하며 단일한 명칭을 정하여 전승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문헌에 따라 지칭하는 식물이 다른 섞임현상(혼효현상)이 있고 그에 따라 같은 식물명이 서로 다른 식물을 지칭하는 이물동명(異物同名)이 흔하다. 옛 문헌상의 白樺(백화)나 자작나무(그와 유사한 옛 표기)는 때로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와 동일하게 수피가 상대적으로 밝은 색이고 나무에서 물을 뽑아 마실 수 있는 현재의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 Trautv.), 물박달나무(Betula davurica Pall.) 또는 사스래나무(Betula ermanii Cham.)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7. 민중들의 삶에 반영된 박달나무와 자작나무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 국립수목원간(증보판, 2017), 200쪽

국립수목원은 2005년부터 2017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각 지역에서 식물명에 대한 방언과 식물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전통지식을 조사하여 『한국의 민속식물』(증보판, 2017)을 펴낸 바 있다. 이에 의하면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는 다른 나무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강해서 다듬이, 방망이, 홍두깨, 절구공이 등의 실생활에 사용되는 생활용구를 제작하는 것에 널리 이용된 목재이기도 하였다. 그 이름도 전국적으로 큰 차이가 없이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이름을 일제 부역자 몇 명이 바꿔치기를 했다? 이런 생활 속에 밀착된 이름을 바꿔치기 하였다면 그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고 그러한 흔적은 식물명에서 남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별 차이 없이 현재에도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은 박달나무가 오래 전부터 실제 민중의 생활 속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불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 국립수목원간(증보판, 2017), 199쪽

앞서 살펴 보았듯이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는 한반도 북부가 분포의 남방한계선으로 전북/경북/경기도/강원도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역에서 방언명과 이용에 대한 전통지식이 발견되는 것은 최근에 이르러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가 전국에서 식재되고 있거나, 옛날에는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와 현재의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 Trautv.), 물박달나무(Betula davurica Pall.) 또는 사스래나무(Betula ermanii Cham.)가 명확히 구별되어 불리지는 않았던 것 때문에 보이는 현상으로 추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조사에서 자생하는 지역인 함북에서 ‘백화, 짜재기’라는 방언이 있고, 그에 대한 이용의 형태가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와 명확히 차이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는 옛부터 실제 백성들 사이에서도 자작나무로 불렸다는 것을 넉넉하게 추론할 수 있다.

​8.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친일 부역자인가?

[주장6] ​”일제하에 정리되어 고착화된 우리 식물명은 일제와 그 부역자들이 우리의 건국신화를 왜곡한 것입니다.”

근대 식물분류학이라는 자연과학은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우리에게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으로부터 근대 식물분류학을 배운 식물학자들은 십 수 명에 이르지만, 근대 식물분류학의 토대 위에서 조선명(한국명)을 한글로 정리하였던 학자들은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저자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 견해의 주장자가 일제의 부역자라고 언급한 것은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을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다. 정태현(1882~1971), 도봉섭(1904~?), 이덕봉(1898~1987) 및 이휘재(1903~1986)가 그들이다. 필자와의 사적 대화에서 그는 이점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다.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은 부역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부역자(附逆者) : [명사]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저자들은 정말로 일제에 부역한 것일까?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중 사정요지

조선식물향명집의 서두에 기록된 ‘사정요지’는 조선명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하여 (i) 수십 년간 조선 각지에서 수집한 실제 조선인이 사용하는 식물명을 우선으로 하고, (ii) 종래 문헌에 기재된 옛 식물명을 참고로 하며, (iii) 그래도 없는 식물명이 없는 경우(=교육상·실용상 부득이 한 것)에는 새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였다.

종래 식물을 인식하는 전통적 방식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기능이나 용도에 근거하였다면, 과학으로서의 식물학은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기준으로 종을 개념짓고 그것을 근거로 식물을 분류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방법과 틀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가장 우선하여 과학적 방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분포하는 식물을 확정짓고(학명의 확인과 식물표본을 통한 대조작업 등), 그 토대 위에서 조선인이 실제 사용하는 이름과 옛 문헌상의 이름을 결합함으로써, 과학과 전통을 결합하고자 하였다.

** Note :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은 조사하여 결정한다는 의미로 조선어학회가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의미의 개념이다.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45쪽 참조.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45쪽 참조.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 중의 1인인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1943)에는 목본식물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이름을 기록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박달나무는 Betula schmidtii Regel을 전국적으로 통용하여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通(통)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으며 조선식물향명집은 그렇게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Betula pendula Roth(당시 학명 Betula latifolia Komarov)에 대해서는 자작나무라는 명칭이 통용되는 이름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通(통)으로 표시하였고, 다만 함북지역의 방언으로는 ‘봇나무’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하였다(실제 옛 문헌의 일부에도 자작나무를 지칭하는 것으로 봇나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자작나무와 봇나무 중 당시 통용되는 ‘자작나무’를 조선명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국립수목원이 행한 방언조사와 대조하면, 당시에 실제 부르던 이름으로 조선삼림식물도설(1943)에 기록된 내용과 현재 남아 있는 방언 조사의 결과와 대체로는 비슷하다. 묻노니 조선인이 사용하는 조선의 이름을 전통에 맞추어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 나라를 팔고 공동체에 반역하는 행위인가?

9. 박달나무가 자작나무의 이명?

​[주장7] “박달나무는 자작나무의 이명으로 쓰고 현재의 박달나무는 중국명을 참조해서 검은 자작나무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위 견해 주장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다 맞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단군신화의 신단수는 ‘檀’ 즉, 박달나무인데 이것은 민족의 기원과 흰옷을 좋아하는 민족의 속성 그리고 박달나무의 뜻에 비추어 보면 수피가 흰 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와 그 친일부역자가 이를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즉 이름의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로 부르는 식물명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의 명칭 :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
바뀌는 명칭 : 자작나무(Betula schmidtii Regel)/ 박달나무(Betula pendula Roth)

그런데 위 견해의 주장자는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장 명칭 : 검은자작나무(Betula schmidtii Regel)/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

​이런 주장에는 학명(scientific name)에 대한 몰이해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학명은 식물명을 각국마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소통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재원문과 기준표본 등이 내포되어 있어 종을 특정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수피의 색깔이 박달나무와 자작나무를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질이라면 Betula schmidtii Regel은 검은 수피를 가진 종을 의미하는 것이고 Betula pendula Roth는 수피가 흰색 종이라는 의미하는 것이다. 학명을 토대로 하는 국명(common name)이 잘못되었다면 국명만을 서로 바꾸어 부르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중국과 달리 박달나무는 한자로 檀(단)으로, 자작나무는 한자로 白樺(백화)로 나누어 한글명과 한자를 다르게 사용하여 온 우리의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21세기에 느닷없이 중국을 제대로 따라 하자고 한다. 신종 사대주의라도 하자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박달나무의 국명은 검은자작나무가 되므로 그에 대한 한자어는 黒樺(흑화)가 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자작나무의 한자어는 白樺(백화이다). 그러면 제왕운기 등의 神檀樹(신단수)는 神黑樺樹(신흑화수) 또는 神白樺樹(신백화수)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누가 진정으로 단군신화를 왜곡하고 있는 것인가?

** Note : 박달나무에 대한 1937년 당시 일본명은 요노요레(ヲノヲレ, 斧折)이었다. 이는 요노요레칸바(ヲノヲレカンバ, 斧折樺)의 축약형으로 나무가 단단하여 도끼를 부러뜨릴 만큼 강한 칸바(カンバ, 樺; 자작나무 종류에 대한 일본 옛이름 カニハ에서 유래함)라는 뜻이다. 자작나무에 대한 일본명 시라칸바(シラカンバ, 白華)는 흰색(白, シラ)과 カンバ(자작나무 종류)와 합성어로 수피가 흰색이 나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는 한글명에서 박달나무와 자작나무로 서로 다르게 대별하였고 그에 대한 한자어도 檀(단)과 白樺(백화)로 서로 다르게 사용하였지만, 일본명은 カンバ(樺)로 모두 자작나무를 기본으로 하여 식물의 특성에 관한 표현을 추가한 것이다. 위 견해의 주장자는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하였지만 그가 원하는대로 하자면 그것은 동시에 일본식으로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선조들이 불러왔던 전통을 바꾸면서까지 일본식으로 따라 가야 하는가? 신판 창씨개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글을 마치며

일제강점기는 민족공동체 성원 모두가 안고 있는 지독한 아픔이고 트라우마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그 아픔이 생겨난 원인과 현재의 모습을 냉정이 직시할 수 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런데 아픔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반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끌어 모은다. 반일의 기치 아래 설치된 제단에는 애꿎은 식물명이 희생양으로 올라 와 있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권위를 얻고 그 권위의 힘을 빌어 일제와 그 부역자를 준엄하게 성토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반일의 제단에서 단죄되는 것은 일제와 그 부역자가 아니다. 태종에서 정조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사관, 사역원의 통역관, 백과사전을 저술한 실학자, 실학자이자 진정한 왕도정치를 복원하여 국태민안을 꿈꾸었던 유학자, 문신으로 국가 통치에 직접 관여한 학자, 그리고 민족적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어의 아름다운 한껏 드러내었던 시인, 조상들로부터 전래 받은 바대로 박달나무와 자작나무를 이용하고 이름을 불렀던 뭇 백성들, 때늦었지만 그 식물과 이용형태를 조사하고 기록한 국립수목원과 그 직원들, 그리고 단군신화와 그것을 기록한 옛 선인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일제의 사주를 받아 친일 행위를 한 부역자들로 몰아 그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없고 오로지 타율적인 존재라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하고자 하였다. 일제와 그 부역자(?) 몇 명이 이름을 바꿔치기 하면 아무 생각이 없이 그 바꿔치기 당한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부르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발상 자체가 민족공동체 전원을 생각없이 살아가는 존재로 비하하고 모독한다. 그래서 위 견해의 주장자의 주장은 거창한 반일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 내용은 지독히 친일적이다.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Regel)를 박달나무라고 하고 자작나무(Betula pendula Roth)를 자작나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전통이다. 그 전통에 발을 딛고 같은 땅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뭇 자연속 식물의 이름을 부르고 살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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