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떠넘기기 탓,
    ILO 협약비준 제자리걸음
    EU, 분쟁해결 절차 개시 압박···긴급공동행동 “선비준-후입법으로”
        2019년 04월 09일 06: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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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노동·시민사회단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한국 정부에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의 조속한 비준을 요구하고 있으나 논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경영계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대가로 부당노동행위 시 처벌조항 삭제 등 소위 ‘경영계 대응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합의 도달이 사실상 불가능한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 안건으로 계속 올려두는 방안을 고집하고 있다. 노동계 안팎으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EU(유럽연합)는 한국 정부에 ILO 핵심협약과 관련해 조속한 시일 안에 가시적 진전이 없을 경우 분쟁해결 절차의 다음 단계에 들어가겠다고 압박했다.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담당 집행위원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9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진행한 면담에서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상의 노동관련 의무인 핵심협약 비준이 수년간 지연되고 있다”며 “조속한 시일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가시적 진전이 없을 경우 전문가 패널 개시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한국이 한-EU FTA 규정에 따른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작년 12월 분쟁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분쟁절차 첫 단계인 정부 간 협의는 지난달 18일 끝났다.

    만약 이번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에 들어가게 된다. 전문가 패널 소집은 3명의 전문가 패널이 구성돼 한국의 FTA 위반 여부를 따지고 권고안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분쟁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이 보고서가 채택되면 한국은 ‘노동권 후진국’이라는 국제적 망신에 직면하게 된다.

    말스트롬 집행위원은 “경영계의 우려와는 달리 ILO 핵심협약 비준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위원장, 한국 경영계 등에 대해 ILO 핵심협약 비준의 필요성을 적극 설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재갑 장관은 “한국 정부가 경사노위에서의 사회적 대화를 지원하는 등 협약 비준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면담 뒤 기자들과 만나서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 대해 (EU 측에) 설명을 했다”고 말했다.

    당초 ILO 핵심협약 비준을 경사노위 테이블에 올리는 것 자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노사 합의가 불필요한 ‘노동기본권’ 문제인데다, 20년 동안 미뤄온 국제사회와의 약속인 만큼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비준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계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끝내 ILO 핵심협약 비준을 노사 합의 사안으로 분류했고, 노사는 전날(8일)까지도 협의를 이어갔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EU가 경고한 대로 전문가 패널 소집은 정해진 수순이다.

    노동계는 정부가 더 이상 경사노위에 기대지 말고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을 내고 “협약 비준 과정에서 정부는 3자가 아닌 당사자”라며 “사회적 대화 기구에 ILO 협약 비준 관련 사업을 떠맡길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정부가 주도해 비준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경영계 대응권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주고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경사노위 논의에 대해 “타협 불가능한 기본 인권인 결사의 자유 원칙과 노동조합 손발을 묶는 법을 맞바꾸려는 시도”라며 “그 자체로 ILO 협약과 거꾸로 가는 길”이라고 우려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지원할 것이 아니라 ‘선비준-후입법’ 태세로 전환하는 것이 그동안 국제사회 조롱거리가 돼왔던 ILO 핵심협약 미비준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노총도 성명을 통해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이자 대한민국의 국격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임을 명심해야 한다”며 “더 이상 노사합의 및 입법절차 등을 핑계 삼지 말고, 국제사회에 약속한대로 정부로서 할 수 있는 국제협약(ILO핵심협약) 비준절차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ILO긴급공동행동 청와대 앞 기자회견(사진=노동과세계)

    노동·법조·문화예술·시민사회 단체가 연대한 ILO긴급공동행동(공동행동)도 이날 오전 청와대에 ILO 핵심협약 우선 비준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전달했다.

    공동행동은 입장문에서 “경영계가 요구하는 쟁의행위·단체교섭권을 제약하는 사항까지 반영하여 입법한 후 비준하겠다는 정부의 방법론은 ILO 헌장 위반”이라며 “정부가 할 일은 ILO 헌장을 위반하면서까지 선입법 후비준 입장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비준안을 국무회의에서 당장 의결하고 국회로 공을 넘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입장문 전달 직전에 청와대 분수대 앞 기자회견에서도 “ILO 핵심협약 비준 공약을 지킬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비준-후입법’”이라는 점을 거듭해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애초에 타협해서는 안 될 기본권을 정부가 협상테이블에 올렸다”며 “사회적 합의로 노조 할 권리를 제약하고, 이를 반영해 법을 개악하고, 그 이후에 국제사회에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을 이행하겠다는 공수표를 내놓겠다는 계획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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