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문, 고구마 그리고 오징어
    [역사의 한 페이지] 서대문 독립문에 담긴 역사
        2019년 02월 28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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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신주, 신주단지 그리고 감모여재도”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어느 학교 합창단이 부른 ‘독립가(獨立歌)’의 후렴 부분이다. 이 노래를 가지고 퀴즈를 하나 풀어보자. 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우리나라 독립한 날’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정답은 1896년 11월 21일이다.

    1896년 11월 21일?

    1945년 8월 15일을 정답으로 생각한 독자들은 다소 의아해 하실 것이다. 독립의 감격을 표현한 날이 왜 하필 1896년 11월 21일인 것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진]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포된 전단지로 당시 배재학당 합창단 학생들이 불렀던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왼쪽 페이지의 ‘P.C.S’는 ‘배재 크리스천 스쿨’ 즉 배재학당의 영문 표기이다. (김연갑 사진, 우리문화신문 2015.5.14)

    위 노래는 1896년 11월 21일 열린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합창단 학생들이 부른 것으로 가사의 ‘독립한 날’은 독립문 세우는 날을 지칭하고 있다. 이 독립가의 본 가사 1절, 2절을 살펴보면 이를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천팔백구십륙년 / 건양 원년 십일월에
    아세아주 독립 조선 / 독립문을 새로 세우네.

    영은문이 독립(문)되니 / 모화관이 공원이라.
    이백 여년 병자지치(丙子之恥) / 오늘이야 씻는구나.”

    2019년을 맞아 100년 전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그를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신문들은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기획 기사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독립문은 다른 어떤 해보다 더욱 주목받고 있다. 오늘 이야기는 이 독립문에 대한 것으로, 왜 이 문이 세워지게 되었는지, 또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노래 가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문의 상징이 오늘날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등을 살펴 볼 것이다.

    독립문이 세워지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독립문 관련 자료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897년 독립문 건립을 위해 전국적으로 성금을 모을 때 밀양 도사(密陽 都事)를 지냈던 안효응이란 인물이 1원의 성금을 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회계장 안경수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날짜는 건양 2년(1897년) 2월 23일로 되어있다. 독립협회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봉투와 함께 수집한 것이다. 독립문 건립과 관련된 소중한 자료이다. 이런 독립문 건립 당시 보조금 영수증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병식 영수증을 포함 3∼4장 정도 그 존재가 알려져 있다.

    [사진] 밀양 도사를 역임했던 안효응이 독립문 건립 성금을 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1897년 2월 23일 발행한 것으로 회계장 안경수의 이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또 하나의 자료들은 해방 후의 독립문 관련 자료이다. 1995년 8월 15일을 맞이하여 정보통신부가 발행한 광복 50주년 기념 초일봉피이다. 이 봉피에는 “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글귀, 독립기념관 사진과 함께 독립문 도안의 도장이 찍혀 있다. 당시 같이 발행된 광복 50주년 기념엽서에는 아예 독립문 사진까지 들어가 있다. 1955년 광복절 기념우표도 비슷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태극기와 독립문, 그리고 끊어진 쇠사슬을 통해 광복 10주년의 의미를 표현하였다.

    [사진] 왼쪽은 광복 50주년 기념엽서로 ‘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글귀와 함께 ‘독립문’ 사진이 들어가 있다. 오른쪽은 1955년 광복 10주년 기념우표이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위에 소개한 첫 번째(독립문 건립성금영수증)와 두 번째 자료(해방 후 독립문 엽서, 우표) 속의 독립문은 100년이라는 시간 차 만큼이나 다른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독립문은 그것이 세워질 당시의 의미와 해방 이후 사람들이 인식한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이런 인식의 간극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독립문이 세워질 당시로 돌아가 보자.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구식 군인들이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봉기였다. 이 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비와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군 3천명이 조선에 들어와 용산에 주둔하면서 청의 본격적인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조선은 사실상 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병자호란 이후부터 이미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전에는 전통적 조공국으로, 조공을 잘 바치고 신하국의 예를 잘 따르면 내정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위안 스카이를 정점으로 하여 마젠창, 묄렌도르프 같은 고문들이 들어와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하게 됨으로써 조선은 청의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인 속국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런 관계를 반영하여 임오군란 직후 조선과 청 사이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는 아예 대놓고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런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힘을 이용해 일으킨 반청 쿠데타가 갑신정변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청의 강력한 내정 간섭은 이후 10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패권을 두고 한판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청은 패배하고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에서 “청국은 조선으로부터 종주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조선의 완전한 해방을 승인한다.”라고 표방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1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간 서재필이 귀국한다. 그는 미국에서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양의(西洋醫)로 활동하다가 조선 정부가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창간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이었다. 서재필은 반청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이 몇 개월 전 청으로부터 독립한 사실에 대해 매우 흥분해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신문사 차원에서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물로 독립문 건립을 제안한다.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기사이다.

    “….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타 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해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 년을 원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속국인 체하고 있었으니 그 약한 마음을 생각하면 어찌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리오……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들과 동등하게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보고 삼년 전까지 끌어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대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모화관에 이왕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가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오. 이왕에 거기 섰던 영은문은 조선 사기(士氣)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려면 다만 그 문만 헐어 버릴 뿐만 아니라 그 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만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사진]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이 날 논설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독립문 건립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나 경계는 찾아 볼 수가 없고, 오히려 당시 논설 곳곳에서 일본은 독립에 도움을 준 나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독립문 건립 제안 이후 독립신문사 중심으로 성금 모금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위에서는 정부 고위관료로부터 아래로는 하층민까지 다수가 성금에 참여하였다.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했음을 기념한다는 데 여기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이 과정에서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 위원회가 모태가 되어 1896년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1896년 7월 4일 독립신문 논설은 독립문 건립을 위한 독립협회 창립총회를 보도하고 있다. 다시 그날 신문을 보자.

    “(독립문을 세우려면) 정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까닭은 조선이 자주 독립된 것이 정부에만 경사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경사라 인민의 돈을 가지고 이것을 꾸며 놓는 것이 나라에 더 영광이 될 터이요 후세라도 내외 국민들이 이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보게 되면 건양 원년에 누구 누구가 돈을 얼마 얼마를 내어 조선 자주 독립한 것을 경사로이 여겨 영생불멸할 표를 하였다고 할 터이니, 누구를 물론하고 조선 인민이 되어 임금을 존경하고 국기를 높이 달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소간에 추렴(出斂)을 내야 대정동 조선은행소에 있는 안경수씨가 신문사로 보조금 낸 사람의 이름과 돈 액수를 기별하여 매일 광고할 터이요, 역사(役事)는 속히 시작한다고 하더라….”

    이 글에 이어 독립문 건립을 위한 발기인 14명의 명단이 실렸는데, 그 면면을 보면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이윤용, 김종한, 권재형, 고영희, 민상호, 이채연, 이상재, 현흥택, 김각현, 이근호, 남궁억이다. 이들 중에서 의장 겸 회계장은 안경수, 사무 위원장은 이완용(당시 외부대신)이 맡았다. 이 창립총회에서 이완용과 그의 형 이윤용이 각각 100원씩 200원을, 안경수 40원, 김종한과 권재형 30원씩 등 합계 510원을 모아 독립문 성금으로 내었다.

    안경수와 이완용은 모두 정부 고위 관료들이었는데 독립협회의 초기 지도부에 정부 고위 관료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단체가 처음부터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단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문 건립은 이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독립문 건립의 취지에 동참하는 이들의 보조금(성금)으로 세워질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금 대열에 합류하였다. 독립신문은 보조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사연, 기부 액수를 일일이 게재했다. 필자 소장 자료로 앞에서 소개했던 안효응의 1원 성금 영수증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인 것이다.

    이런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거금 3825원을 모금되었고, 1896년 9월 16일 독립문 건립을 위한 기공식이 그리고 다시 두 달 뒤인 11월 22일 정초식이 열렸다. 이 날 독립협회 사무 위원장 이완용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전후 맥락 생략하고 이 연설만 들었으면 어느 독립운동가의 연설로 착각할만한 내용이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세계사기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 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이 연설 바로 앞 순서로 배재학당 합창단 학생들이 부른 노래가 바로 글 앞머리에서 소개한 그 ‘독립가’였다. 이런 맥락으로 불린 노래였기 때문에 후렴의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은 바로 청의 속박에서 독립했음을 상징하는 이 문이 세워지는 날을 의미하는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96년 11월 21일은 오늘 날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그 시대의 ‘광복절’이었던 셈이다. 그런 감격이 있었기에 ‘독립가’ 2절에서 “이백 여년 병자지치(丙子之恥) 오늘이야 씻는구나.”라고 하여 이 독립문을 건립함으로써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드디어 씻게 되었다는 표현까지 담은 것이다.

    [사진] 왼쪽은 독립문 전경, 오른쪽은 독립문의 현판석으로 앞뒤를 한글과 한자로 다르게 썼다. (인터넷 사진)

    독립문은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이 설계했고,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 경험이 있던 심의석이 공사 감독을 맡았다. 1년의 공사 끝에 이 문은 1897년 11월 20일경 완성되었다. 정초식을 한 날로 계산하면 꼭 1년이 걸린 셈이다. 프랑스 개선문을 닮은 높이 14.28m, 폭 11.48m 크기의 이 문은 가로45cm, 세로30cm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들었는데, 문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배치했다. 이맛돌 위에 독립문이라는 글을 쓴 현판석을 앞뒤로 달았는데, 안쪽의 글은 한글로 ‘독립문’, 바깥쪽은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썼다. 이 글씨는 독립협회의 사무 위원장으로, 당대 명필로 이름 높았던 이완용이 쓴 것이었다. 이 현판석 밑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새겼다.

    지금까지 독립문 건립과정을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 문 건립에 정부 고위관리들부터 하층민까지 다수가 성금을 내어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친일파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완용이 독립문 건립과정에서 사무 위원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돈도 가장 많은 축에 드는 100원을 기탁했으며, ‘독립문’의 현판 글씨도 그가 썼다는 점 등이다.

    독립문이 이런 배경과 과정으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사실!

    일제 강점기 이 문은 파괴되거나 수난을 당한 일이 없고 오히려 수리되고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이 문이 쇠락하자 일제는 1928년 거금 4100만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도 했고, 또한 1936년 독립문을 고적 제5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일제는 왜 이 기념물을 파괴하지 않고 보호했을까? 이것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열망을 담은 기념물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제 강점기 신문을 보면 ‘독립운동’이라는 글자를 ‘00운동’으로 내도록 하는 등 ‘독립’이라는 말을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런 일제 당국이었다.

    일제가 독립문을 보호한 이유는 그것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이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도와주었으므로 오히려 이 문을 통해 일본의 은혜를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에 일본이 도움을 주었다는 인식은 이후 상당 기간 이어진다. 이런 인식은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의 다음 문장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다.”

    혹자는 일제가 서대문 형무소를 독립문 옆에 나란히 세워서 ‘독립운동하면 형무소 간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조선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다.

    [사진] 일제 강점기 경성명소 중 하나로 소개된 독립문 소개 엽서들. 일제 당국도 이 독립문을 전혀 위험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위험시했다면 이런 엽서를 금지하거나 아니면 독립문을 철거했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독립문, ‘항일 독립’의 상징으로 진화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였던 1918년 영국이 공채 구입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를 잠시 보자. 포스터 왼쪽에 검은 형상으로 표현된 괴물이 어린 아기를 안은 여인을 위협하고 있다. 이 여인의 남편은 이미 죽은 듯 괴물의 발 아래 누워 있다. 이 포스터의 제일 위에는 “훈족 아니면 홈?”이라고 씌어져 있다. 저 괴물은 독일군을 표현한 것이다. 독일군이 당시 썼던 모자(정수리에 꼬챙이가 달린 피켈하우베)는 옛날 훈족이 썼던 투구와 비슷한 형태였기 때문이 이 포스터에서는 독일군을 훈족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가 말이 안 되는 것이 4세기 후반 동방의 훈족의 동부 유럽으로의 이동의 여파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유럽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므로, 게르만족인 독일 민족을 훈족으로 비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완전히 넌센스이다.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은 일종의 피해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강렬한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지 역사적 팩트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 영국의 공채 구입 독려 포스터로 “훈족 아니면 홈?”이라는 큰 제목을 달아 독일의 위협을 표현하고 있다. (헨리 롤리의 그림으로 송병건, [세계화의 풍경들]에서 재인용)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독립문을 ‘항일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유사하게 넌센스다. 하필 서대문 형무소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이런 상징체계 속에 쉽게 묶였겠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 세워진 이 문에는 태생적으로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가 꼭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 문에 대해 일제로부터의 독립, 더 나아가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상징을 덮어 씌우면 이 문은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대중이 그렇게 그 문을 보고 싶어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2004년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은 독립문에 올라가 “쌀 협상 무효, 전면 재협상”을 외쳤다. 농민들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 것이긴 하지만, 그런 의미를 담아 행위 하게 되면 독립문은 새로운 상징으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독립문역 안에 3.1운동을 상징하는 독립선언서를 화강암 벽에 새겨놓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립선언서가 독립문역에 새겨져 있는 것도 뭔가 어색한 것이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독립문과 독립선언서, 둘 다에 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독립’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다.

    작년 3.1운동 99주년 기념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렸는데, 대통령과 참가자들은 기념식 후 독립문까지 행진을 한 후 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퍼포먼스를 했다. 앞으로 몇 년, 혹은 몇 십 년 후 우리는 독립문 앞에서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는 독립문의 이미지를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으로 의미를 변형시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일제 강점기 그 시대를 치열하게 싸웠던 인물들부터였다는 사실이다. 즉 역사를 모르는 못난 후손들이 아무렇게나 독립문의 이미지를 잘못 소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이 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변형이 가해져 세워질 때의 의미는 탈각되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불렸던 ‘독립군가’의 다음의 후렴구를 보자.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를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나가
    나가나가 싸우러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왜 하필 독립문이었을까? 일제 강점기 독립군들이 불렀던 이 노래에서는 ‘독립문의 자유종’을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1920년 제작된 임정의 첫 달력 [대한민력(大韓民曆)]이 발견·공개되었는데, 이 달력의 제일 윗부분에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복 후 독립군이 환국하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으로 많은 국내의 동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돌아오는 독립군이 다름 아닌 독립문을 통해 행진하고 있다. 일종의 개선문으로 쓰이고 있는 이 독립문에는 태극기가 엇갈려 내걸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사진] 최근에 발굴된 임정의 첫 달력(1920년 대한민력)의 윗부분이다. 독립군이 광복 후 독립문을 통해 개선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문이 처음 만들어진 지 30년 만에 이미 의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일보 2019년 1월 14일자)

    이런 인식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에 발행된 우표에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발행된 지폐 앞면에도 독립문 도안은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던 것도 말이다. 그러니 독립의 대상이 청이었다가 일본으로 바뀐 이 변화의 역사도 그 나름의 새로운 역사가 되었으니, 이런 변화의 속절없음에 분노는 잠시 내려놓도록 하자. 어차피 역사는 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것 아니던가?

    우리가 먹는 뿌리 식물 중에 고구마와 감자가 있다. 그런데 원래 조선후기 이 작물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감자는 북저(北著)라고 불렀으며, 고구마는 남저(南著), 감저(甘藷), 또는 감저에서 변한 감자로 불렸다. 지금도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르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고구마를 감자로 부르고, 감자는 따로 지슬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저, 감자 대신 일본에서 들어온 ‘고구마’라는 말로 고구마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북저는 느닷없이 감자로 불리게 되었다. 감자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감자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감자를 생각하지만, 조선후기 사람들은 고구마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구마를 다시 감자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징어, 낙지의 경우도 그렇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과 완전 거꾸로 오징어를 낙지로, 낙지를 오징어로 부른다는데 그걸 지금 와서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독립문도 그렇고, 감자⋅고구마도 그렇고, 오징어⋅낙지도 그렇고…..

    살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참으로 많다.

    [사진] 왼쪽은 해방 직후 미군정기 발행된 우표, 오른쪽은 1949년 발행된 지폐로 모두 독립문을 도안으로 삼았다. 광복 직후의 열기를 상징하기에는 태극기, 무궁화와 함께 독립문만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왼쪽 News1 사진, 오른쪽 박건호 소장)

    <참고한 자료>

    송병건, [세계화의 풍경들], 아트북스, 2017

    동아일보 2019,1.14 기사, ‘3.1만세 국경일로…임정의 첫 달력’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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