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갈무리하기
[낭만파 농부] 농한기를 앞두고
    2018년 11월 21일 10: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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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내리던 된서리가 요 며칠 연이어 내렸다. 눈부시던 단풍은 하루가 다르게 빛이 바래고 한 잎 두 잎 떨어져 들녘은 갈수록 을씨년스럽다. 겨울을 재촉하는 신호다.

그렇게 겨울이 닥친다 한들 모두 거둬들였고, 갈무리 할 것 다 했으니 걱정거리는 없다. 어제는 팔순 노모와 함께 김장도 끝냈다. 여느 해와 견줘 배추포기 수도 그렇고, 작업을 함께 한 일손도 무척 단출했다. 이 가을 끝자락만큼이나 쓸쓸한 풍경.

그러고 보니 할 얘기도 참 궁하다. 소소한 일상이 애매한 시절을 그저 메워나가고 있을 뿐이니. 그렇다고 허구한 날 아랫목에 배를 깔고 그저 뒹굴뒹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누는 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쌀과 햅쌀밥을 나누고 떡을 나눴다. 세 번째 방아를 찧었더니 웬일인지 싸라기가 많이 나왔다. 햇것이라 닭 모이로 주기엔 너무 아까워 가래떡을 뽑기로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비싼 떡방아 기계삯은 <고산권 벼농사두레> 재정에서 지출하기로 했다. 반 가마 넘게 뺐더니 양이 꽤 되었다.

떡이란 게 본시 돌리는 것이지만 이 넓은 동네에, 누구는 돌리고 누구는 말고 하겠나. 읍내 카페에 쌓아두고 선착순으로 가져가시라 일렀다. 공동육아, 청소년 지원단체에는 따로 떡볶이 떡을 한 상자 씩 보냈다. 그게 ‘가래떡 데이’로 일컬어지는 11월 11일이었다. 그 며칠 뒤에는 같은 방식으로 떡국떡을 나눴다. 떡을 며칠 굳힌 다음 썰어야 하니 그리 되었다. 어쨌거나 별것 아닌 가래떡 한 봉지에 다들 흡족해하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사실 나눔은 그 것만으로도 뜻 깊은 일이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고 또 늘 그러려고 하는 편이다. 나눔은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누리는 좋은 핑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눠 갖는 것도 좋지만 나눠 먹고, 나눠 마시는 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햅쌀밥 ‘시식’을 핑계로 수수한 잔치판을 벌이고, 갓 담은 김장김치를 핑계로 수육과 생굴을 곁들인 술판을 도모한다. 이번엔 아쉽게도 뒤엣것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먹고 마시는 것만 아니고 나눌 것은 지천이다. 일손도 그렇다. 나누면 나눌수록 일이 가벼워지니 좋다. 우리 집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집채와 잔디밭, 그리고 텃밭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텃밭구역은 2년 가까이 지나서야 손질을 시작했다. 이미 밝혔듯이 퍼머컬처 원리를 바탕에 둔 텃밭정원으로 꾸밀 요량이다. 구획선을 따라 고벽돌로 통로를 까는 기초공사를 마친 바 있다. 요 며칠 동안은 이 구역 안에 잡동사니를 갈무리하는 창고로 쓸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이 작업공정은 옆집 용수 씨와 일손을 나눴다. 용수 씨도 마침 온실로 쓸 비닐하우스가 필요했던 터라 품앗이를 하기로 했다. 함께 중고철재를 사 나르고, 땅바닥에 구멍을 판 뒤 철재를 엮는 골조공사를 하고, 비닐과 차광막을 씌워 단단히 고정하는 것으로 작업을 끝냈다. 둘 다 틈이 나는 시간에만 쉬엄쉬엄 하다 보니 공사를 끝내기까지 일주일 넘게 걸렸다.

농기구와 집기, 퇴비포대 따위가 집주변 여기저기에 널려 있어 눈에 거슬리고, 걸리적거렸는데 이번에 지은 창고에 갈무리하고 보니 한결 깔끔해졌다. 이제 텃밭 바닥에 여러 유기물을 덮어 흙을 다듬고 땅심을 돋울 참이다. 돌아오는 봄에는 씨를 뿌리고, 모종과 나무를 심을 것이다. 과연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이렇듯 나누고, 갈무리했으니 이제부터 본격 농한기다. 여러 차례 얘기했듯 농한기는 이제 덤덤한 용어가 되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처음 몇 해는 그것을 들먹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설렜던지. 심지어 ‘농한기를 기다리는 낙으로’ 농사를 짓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더랬다. 그러나 열 번 가까운 농한기를 맞는 지금 설렘 같은 건 없다. 좀 더 겨르롭겠다는 여유, 쌓아놓기만 했던 책을 손에 잡을 기회가 더 많아지겠다는 기대.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딴 걱정거리가 비집고 들어서 희망에 물을 타기도 하고. 익숙해진다는 것, 어쩌면 따분한 것이겠지.

그래서인가. 올해는 다른 농한기를 꿈꾼다. 몇 해 동안 쌓인 곰팡내 나는 타성, 모질게 들이치던 미망, 부질없는 집착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물처럼, 구름처럼 떠돌겠노라는. 마침내, 가을이 저물고 있는 게로구나.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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