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닮은 욕망들,
    자발적 ‘구별 짓기’의 의미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닮은 방들」
        2018년 11월 07일 12: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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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코너 연재를 시작한다. 여미애 선생의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이다.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하고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가 소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과 그 이면을 살펴보는 칼럼이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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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부세, 세금폭탄이라는 해묵은 프레임이 아직도 통용되는 것을 보면 오랜 시간 계급 구분의 상징이 단순히 물적 토대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과의 차별성을 위한 정서적 우위도 포함된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한국의 중산층이 지닌 외적 경제력이 긴 사회화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 욕망을 양산했다.

    박완서 「닮은 방들」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현재적이다. 1974년 월간중앙 6월호에 수록된 이 소설은 한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에 쓰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아파트다. 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막 시작된 강남 개발 붐은 공간이 곧 ‘나’를 표상하고 존재 위치를 인식하며 계급을 결정한다.

    친정 엄마 집에 얹혀살며 아파트를 사기 위해 “백여만 원의 저축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눌러 나는 압사 직전에 이르는 듯한 고통”을 7년간 감당하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내 집 문을 쾅쾅 두드리게 하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 버틴다. 그렇게 얻은 18평의 아파트는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차단된 세대 간의 그 독립성”의 이상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입주한 아파트가 곧 ‘동일성’의 지옥임을 섬뜩하게 그려 낸다.

    우리 방과 철이네 방이 닮은 것만큼 우리의 상하좌우의 방들은 닮아 있었다. 물론 어느 집은 딴 집이 안 가진 세탁기가 있고 어느 집은 딴 집보다 먼저 피아노를 들여놓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정도의 우월감조차 오래 누리지를 못했다. 곧 누가 그것을 흉내 내고 말기 때문이다. (p. 238)

    옆집 여자 철이엄마와 ‘같아지기’에 골몰한 ‘나’는 철이엄마가 “이곳의 무수한 닮은 방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가능성”(p. 241)에 기대 매일 복권 당첨만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나’도 철이엄마를 좇아 복권을 사들이며 자신의 “복권에 대해선 전연 관심이 없고 다만 철이엄마의 복권에만 관심”을 갖는다. 마치 이 동일성의 감옥에서 “같은 무기수 중 하나만 이유 없이 석방되는 것을 봐야 하는 남은 무기수의 심정”에 괴로워한다.

    닮아지느라 자기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나’는 늦은 새벽 철이엄마가 없는 옆집에 들어간다. 그곳은 자기 집과 구분되지 않는 닮은 방이다. 철이엄마의 침대에 누워 철이아빠와 동침해도 철이아빠는 아내가 아님을 알아차리질 못한다. 그 새벽 옆집인지 내 집인지 구분되지 않는 아파트에 갇혀 텅 빈 공허 속에 거울을 본다. 거기에는 “절망적인 무구無垢”를 풍기는 또 다른 낯선 ‘나’가 있다. 결국 ‘모방하기’를 통한 현대인의 인정 투쟁은 “이웃의 무수한 닮은 방들” 사이에 치여 자기 존재론적 지대를 게토화한다.

    당시 ‘전형적인 중산층’이라 불리는 가정 모델, 이른바 스위트 홈 콤플렉스는 개발 담론의 기조 아래 정부와 자본의 합작품이었다. 박정희 집권 당시 대도시 인구 밀집이 가속화되면서 도시 계획을 착수한다. 1962년 대한 주택공사의 최초 단지식 아파트 마포아파트가 건설된다.

    웅장하고 모든 최신 시설을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식에 임하여 본인은 수도 서울의 발전과 이 나라 건설업계의 전도를 경하하는 바이다. (중략) 우리나라 의식주 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음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이다. 여기서 생활혁명이 절실히 요청되는 소이가 있으며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은 이러한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 주택공사 20년사 』pp 237~238.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주택건설 사업이 불량지구 재개발에 착수하며 도시에 9만 채의 시민아파트 건설을 계획한다. 졸속으로 인한 부실공사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를 상쇄하기 위해 여의도 시범 아파트 단지라는 고급형 신중간층 아파트를 세운다. 언론은 매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자 환상의 대리물로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을 자극한다.

    1969년 한국 주택은행법이 정부 주도하에 적극적으로 개정되면서 민간자금의 동원을 확대했다. 봉급생활자에게 대출을 유도하고 기업 주도의 주택 건설을 촉진시켜야 했기 때문에 자가 주택에 대한 필요성을 선진적 삶에 대한 희구로 포장한다. 정부의 정책 기조인 ‘1가구 1주택’ 은 중산층의 조건 속에 주거 소유라는 사회적 조건을 공고히 한다. 다시 말해 정부와 재벌의 상부상조에 의한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타자성에 기반해 상, 하층부를 스스로 구별하는 동시에 중산층의 계층적 동질감을 강화한다. ‘도시 중산층’이라 불리는 ‘화이트칼라’는 정권의 경제개발 담론에 흡수 동원된다.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핵심에는 중산계급이란 모호한 영역을 주조하여 계급 간의 적대적 성격을 무화하고 개인 간의 상대적 박탈감을 종용해 연대의 가능성을 끊어낸다. 소득, 학력, 주택 보유 형태, 등 계급 구분의 파선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한 게 아니라 ‘삶의 질’이라는 타자를 상정해 끊임없이 계층이동의 열망을 내면화한다.

    이렇듯 박완서의 작품에는 도시 아파트 혹은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천편일률적 욕망과 ‘중산층 되기’의 욕구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참했던 가난의 트라우마 속에서 비루한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소극적으로 취하고 언제든지 노력만 한다면 편입 가능한 계급적 귀속의식의 길항에서 끊임없는 자기 추궁에 시달린다.

    자수성가, 거주지, 고등교육, 문화 수준과 같은 내밀하고 사적인 생활양식에 계층적 표지를 설정하고 구별 기호로서 윤리, 품위, 명예와 같은 가치들까지 점유해 하층계급과 자신들을 분리하고자 안간힘 쓴다. 하지만 이러한 실체 없는 중산층의 대열에서 언젠가 낙오될지 모른다는 초초와 불안에 짓눌려 도덕적 해이를 감행하고 죄의식과 자기부정에 빠져 정신적 허기를 느낀다. 결국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중산층 되기의 집단적 이상은 타자의 욕망에 기대어 자기 갱신이 좌절된 인간의 표상을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자발적 ‘구별 짓기’는 단순히 집단 바깥으로 추방할 타자를 설정하는 부정성뿐 아니라 역으로 어떤 조건과 환경의 구성원을 자기 집단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되묻는다. 주변부로 밀려나 중산층 되기에 실패한 존재들, 어느 날 우연히 등장한 소속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질적 타자의 출현은 자기 삶의 토대를 부수는 공포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이 상정하는 허구적 승인과 맹목적 배제 속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권력에 대한 성찰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닮은 방들」의 서사는 정치적으로 읽힌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일종의 “지위재”로서 계급의 “상징적 징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의 결핍은 욕망조차 복제했다. 이는 식민지 근대성의 기획이자 추종을 통한 ‘문명인 되기’ ‘남들만큼 살자’의 보상 심리를 부추기는 자본의 오랜 구상이다.

    종부세를 걱정하고 재산세를 우려하는 인생, 아파트로 재테크, 노후 편한 인생, 약속이나 한 듯 욕망의 내용도 방향도 일괄적인 지금- 여기 한국 사회는 타자만 기거하고 정작 자신은 배제된 닮은 방의 비극이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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