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일봉, 음료수 주던 얼굴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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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16일 11: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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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지식이 신체성을 갖기 위해 걷는다!

    이번 대장정의 모토 가운데 하나다. 동서고금의 텍스트들을 횡단하며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를 규정하는 중요한 이름들 중에 하나인 ‘지식인’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만금에서, 대추리에서, 논밭 곳곳에서, 이 땅의 여기저기에서 무수한 삶들이 쓰러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이며, 또 어떤 이들이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경쟁력과 개발 그리고 국익의 이름으로 삶의 파괴를 선동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도대체 어떤 지식을 생산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연구실을 나와 길 위에 서기 전부터 늘상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대학의 연구실 보다는 원남동 한 모퉁이에 있는 공부방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연구실의 책상이 아니라 길 위에 서있는 이유도 그 질문을 보다 강밀하게 던지고 답변을 보다 치열하게 모색하기 위함이다.

       
     
      ▲흥덕교회 목사님 부부
     

    어제 밤 우리는 대천 흥덕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둘러앉아 지식과 지식인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동양 고전을 다루는 연구실의 고전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학인(學人)이 각각 양명학에서 말하는 지식과 선불교에서 말하는 언어에 대해서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고미숙, 이진경 선생님을 비롯하여 연구실 요가동아리 사람들과 대덕 연구단지에 계신 박문호 선생님 가족들 그리고 흥덕교회 목사님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학문의 의미를 삶에 대한 태도 그 자체에서 찾는 양명과 그 제자들의 문제의식, 말의 체계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선사들의 선문답이 가진 역설적인 말의 힘에 대한 연구원들의 발표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말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을 가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100리를 걷는 일정 뒤에 토론하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였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이번 대장정 기간 동안 계속 들고 가야할 화두이고, 이번 대장정을 통하여 우리가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하였다. 자연히 토론은 강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현장과 지식인의 실천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 더 이상 지식인이 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가 아니라 지식인 자체가 지배 계급이 되어버린 지식기반 사회에서 전복적 지식인의 가능성, 일상의 삶과 매일의 공부 그리고 혁명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접속되는 길에 대한 고민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갔다.

       
     

    장정을 하면서, 그리고 어제 밤 함께 토론을 하면서 지식의 신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지식의 얼굴’이란 말로 구체화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컬어 지식 기반 사회라고 한다. 지식이 이제 곧 생산력이 된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이미 생산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제 지식인 자체가 지배계급이 된 것이다.

    국익, 경쟁력, 개발, 성장, 유연화 등 이들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지식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구체적인 얼굴은 지워져 있다. 각종 통계자료와 수치들만이 있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농민, 장애인, 매장당하는 갯벌들과 난도질당하는 산들의 얼굴을 그 지식인들은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이 생산하는 지식의 얼굴은 오로지 돈이 되는 것만이 가치를 가지며 화폐로 계산되는 이익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니 그것을 위해 살라고 명령하는 얼굴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장정에서 만난 얼굴들은 나에게 다른 지식의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부안, 새만만금 갯벌, 군산, 서천, 홍성을 거치는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얼굴들. 어제 대천으로 가는 도중에 지나쳤던 어느 지역에서 우리에게 금일봉을 주시며 수고 한다고 말해주신 지역 주민, 어제밤 우리를 재워 주시며 함께 걷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말씀하신 교회의 목사님, 오늘 홍성으로 가는 도중 잠시 쉬어가는 우리에게 열심히 하라며 음료수를 선물해주신 가게 아저씨, 그리고 ‘FTA 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이라고 외치는 우리를 만나면 언제나 힘내라고 미소지으며 말해주시던 농민들의 얼굴들이 길 위에서 내가 만났던 얼굴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더 이상 살아있는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갯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조개와 그 갯벌 위에 쏟아 부을 흙과 돌을 위해 수탈당하여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산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물었다. 너의 지식은 나의 얼굴을 알고 있냐고, 너의 지식은 나의 얼굴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 얼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얼굴이 네 지식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그 얼굴은 도움을 요청하는 약자의 얼굴이 아니라 결속과 접속을 요구하는 강자의 얼굴이었고, 투쟁을 촉발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우리의 지식이 가져야 할 신체성이란 바로 우리의 지식이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얼굴이 우리가, 내가 가져야할 지식의 얼굴일까? 어떤 얼굴이 우리 지식이 가져야할 신체성일까? 물론 답변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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