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오물의 도시’? ②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민족 차별과 빈부 차별
    2018년 10월 01일 09: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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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대한제국 한성부, 19세기 워싱턴을 벤치마킹하다”

19세기 말부터 ‘오물의 도시’라는 오명(汚名)에서 벗어나기 위한 서울의 노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시작되어 부침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성위생회의 활동으로 오물 처리체계가 마련되어 근대적 형태를 갖추는 듯했다.(자세한 내용은 “서울은 ‘오물의 도시’?” 참조)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방행정 차원의 활동이 아닌 ‘위생조합’ 활동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일관성 있고 효율적인 오물 처리를 위해서는 지방행정 차원의 경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또한 한성위생회의 오물 처리에 대해 위생적이라며 환영하는 민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한성위생회가 주도적으로 오물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위생비를 강압적으로 징수하는 폐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개인적인 차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위생비 거부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의 움직임에 당황한 통감부는 위생비 납부 거부를 배일주의(排日主義)와 연결시키기까지 하였다.

한편 오물 처분장 주변에 사는 민들은 냄새와 오물 수거 태만을 이유로 “위생이 아니라 살생(殺生)”이 분명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처럼 한성위생회가 마련한 오물 처리체계는 또 한 차례의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살생(殺生)이 아닌 위생(衛生)을 위한 노력

하지만 개편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강점 이후 부제로 행정이 일원화되면서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원적인 지방행정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부제(府制)를 공포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한성위생회도 “특이한 지방공공단체는 시정 통일의 방침상 영구히 그 존속을 인정할 수 없다”는 지침으로 인하여 모든 업무를 경성부로 옮기는 ‘부영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부 직영이 이루어졌던 1917년까지는 경찰 촉탁 방식을 이용한 조정과정이 필요했다.

사진 설명. 왼쪽: 경성부는 쓰레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까지 도입하였으나 부분적인 이용에 그쳤다.(출처: 『매일신보』 1919. 07. 18) 오른쪽: 빈민들이 쓰레기를 운반하는데 쓰일 망태기를 만드는 모습(출처: 『매일신보』 1925. 02. 16)

경성부는 오물 처리를 시행하기 위해 서울을 남부(5구역), 북부(4구역), 동부(2구역), 서부(4구역), 용산(4구역)의 다섯 개의 부로 구획하였다. 5부의 각 구역에는 인부 및 마차를 배당하고 감독사무소를 두었다. 감독사무소에는 오물 수거 인부를 감시하는 인력(감독 1명, 순시 1명 혹은 2명과 인부감독(人夫取締))을 배치하였다. 인부는 수거한 오물을 인부감독에게 검사받은 뒤 미리 교부한 발송표(發送表)에 날인(捺印)받고 지정한 처분장에 오물을 버렸다.

하지만 경성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거한 오물을 처분하는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분뇨 처분의 경우 한성위생회 시기에 분뇨 처분에 큰 역할을 하였던 남산상회가 1920년에 영업을 종료하여 처분이 더욱 어려워졌다.

경성부는 1922년 8월 제예사업조사회를 설립하여 지속적인 연구 끝에 분뇨를 장기간 저류하여 유해미생물을 소멸시켜 비료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또 비료로 이용하지 못한 분뇨는 아현리 고지대에 분지를 만들어 관을 이용하여 마포로 흘려보낸 뒤 선박 수송을 통해 강 주변 농촌에 공급하도록 하였다. 1927년에는 부에서 직영으로 처리하던 비료를 경성비료주식회사에 불하하였다. 이처럼 분뇨 처분방식을 개선하려는 노력 아래 버려지는 분뇨의 양은 어느 정도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쓰레기 처분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였다. 경성부는 일단 타는 쓰레기를 간단한 방법으로 소각하여 처리하고 타지 않는 것은 매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대부분의 쓰레기를 매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23년에는 쓰레기를 연료로 이용한 공동 대욕장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비용문제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쓰레기는 매립방식을 유지하게 되어 매립된 쓰레기 때문에 냄새가 발생했으며 하천 오염 문제도 나타났다.

한성위생회에 적자를 기록하던 오물 처리사업은 부영화 이후에도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오물 처리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세입은 오물 매각, 공공기관 오물 처리 비용이었다. 여기서 분뇨 매각은 어느 정도 수입을 창출하였으나 쓰레기 처분 수입은 극히 적었다.

억만원의 경비와 억만의 마차와 인부라 하드래도

경성부가 오물 처리체계를 개편하는 과정은 부침은 있었지만 그 이전보다 많은 비용과 인력을 투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하여 경성의 인구는 나날이 증가해 한정된 자원으로 오물 처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역 간 차별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 언론은 1923년 당시 오물 수거 작업계획표에 남북부의 차별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경성부가 오물 수거 작업에서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북부 인구를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수거 횟수나 마차 운반 횟수도 남부보다 북부가 더 적다는 것이었다. 특히 쓰레기 수거는 분뇨의 경우보다 더 차별이 심하다고 하였다.

실제로 [표1]을 살펴보면, 분뇨 수거의 경우 경성 북부는 15,425명이고 남부는 9,298명에 불과함에도 북부 5구, 남부 7구로 나누어졌다. 남부는 마차 횟수 평균이 북부보다 약 200대 많게 배정되었는데 이것은 남부가 인구에 비해 대소변의 양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여도 차이가 큰 것이다. 쓰레기는 남부에 비해 북부의 인구가 약 1.8배, 쓰레기양은 1.6배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마차 횟수가 1.2배 많으며 마차 인부는 8배나 차이가 난다. 이처럼 오물 처리 구획·기구·인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경성 남북부 오물 처리의 성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표1] 소제작업계획표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오물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 남북촌 차별을 근거로 ‘경성부’ 당국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위생비는 똑같이 받으면서도 일본 거리만 청소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억만원의 경비를 증가한다 하드래도 억만의 마차와 인부를 부린다 하드래도” 남북부의 차별을 개선하지 않으면 북촌은 결국 오물 처리체계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지역 유력층들은 여론을 인지하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부협의회에 참석해 공격적으로 부 당국자를 비판하였다. 1924년 3월 부협의회에 참가한 지역 유력층은 위생과장의 실적을 비판하며 남부와 북부의 오물 수거 차별을 언급하였다. 1926년 부협의회에서는 전성욱(全聖旭: 1877. 05. 20~?)이 ‘경성부는 일본사람의 경성부가 아니며 경성부민의 경성부’라고 하면서 오물 수거에서 ‘조선인을 따로 취급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였다.

사진설명. 경성부가 수거하지 않아 길을 덮을 정도로 방치된 쓰레기(출처: 『매일신보』 1921. 11. 18)

오물 수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지역 간 빈부 격차에 따른 차별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 1924년 6월 10일자 「불평」 투고란에서는 부자동네인 견지동은 변소 청소를 잘해주면서 가난한 사람의 동네는 변소를 치워주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경성부 위생계원은 고의가 아니었다고만 답하였다. 1922년의 한 기사는 위생인부에게 웃돈을 주어 자신 집의 분뇨를 먼저 치우게 하는 상황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청소부를 체험했던 아카마 죠타로(赤間長太郞, 1886~?)도 주로 일본인들이 분뇨 수거 인부에게 10전 혹은 20전을 더 주고 순서상 편의를 얻고자 한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경성부가 오물 처리체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차별이 또 다른 문제로 부각되었다. 오물 처리에서 경성부의 지역 차별은 감수해야 할 일부분이었을까? 일부분으로 취급하기에는 신문에서, 부협의회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지방행정에서 으레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민족’이라는 문제와 빈부 차별이 얽혀 한층 더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이전과 다른 방향의 개편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강력히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관보』.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성부위생과, 1928 『경성부위생시설개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경성부사』3

김은진, 2017 「20세기 초 일제의 서울지역 오물 처리체계 개편과 한국인의 대응 」, 가톨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아카마 기후, 서호철 역, 2016 『대지를 보라』, 아모르문디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년보(1914년)』

필자소개
가톨릭대 일반대학원 국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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