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살, 계동 그리고 올림픽의 추억
[역사의 한 페이지] 송파구가 올림픽구로 바뀔 뻔
    2018년 09월 28일 08: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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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지문환과 지경식, 지씨 집안 아작내다”

“애들아,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원기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합니다.
“된장찌개를 가족들과 먹는데 귀가 막혀서 옆 사람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맛있다는 이야기예요”
“아하, 그렇구나, 혹시 원기랑 다른 생각을 하는 친구 있어요?”
원기의 대답을 듣고 있던 태윤이가 원기의 대답에 이상했나 봅니다.
“선생님 그런데요, 맛있는데 왜 귀가 막혀요?”……”

– 강문정, 군포시민신문 2018.2.7.

어린이 교육 현장의 한 장면이다. ‘기가 막히다’는 말은 신체의 원동력인 `기(氣)`가 막혀서 잠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이른다. 실제로 몹시 좋은 것이나 어처구니없는 것을 보았을 때, 또는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쓰는데, 이 기사에 소개된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흔히 `귀가 막히다`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쓰인 그 말이 새로운 파생어를 만들어내면서 원래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어느 개그 프로에서 ‘귀가 막히고’에 덧붙여 ‘코가 막힌다’는 말을 붙여 쓰면서 이제 사람들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말을 하나의 숙어처럼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당연하다’는 뜻에서 파생된 ‘당근이지!’라는 말도 재미있다. 이 말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당연(當然)’이라는 말이 뿌리(根)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연근(蓮根)이라는 식물을 연상하면서 ‘당근’이라는 뿌리와 연관을 지었다는 설, 빨리 타자를 칠 때 당연보다 당근이 조금 더 편하고 말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생겼다는 설, ‘당연히 근거 있지’라는 말의 줄임말이라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있어 기원을 단정해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점점 많이 쓰기 시작하면서 이 말은 사회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냥 줄여서 ‘당근!’이라고 해버려도 자연스럽게 ‘O.K!’의 뜻으로 통하게 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말(馬)이 당근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당근이지!’를 응용한 ‘말밥이지!’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 말은 사회성을 얻지 못하고 곧 소멸되고 말았다.

말과 지명은 생명이다

이렇듯 말은 생명체와 같아서 태어나는 순간 그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라 끊임없는 성장과 변형을 일으킨다. 대중이 원래의 용어를 변형해서 새로운 용어를 선택해 쓰기 시작하면 그 말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말이라는 것이 어떤 계기들로 인해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 흐름을 놓쳐버리면 원래의 의미와 동떨어진 채로 그 말이 쓰이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대학 친구들과 마포의 한 돼지고기 집에서 갈매기살을 먹었다.

돼지고기를 먹는데 갈매기살이라…

친구 셋은 ‘갈매기살’이란 이름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고기 모양이 갈매기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아니다. 고기 맛이 갈매기(白鷗) 고기 맛하고 비슷해서 그럴 것이다.’ ‘갈매기(白鷗) 고기를 사람들이 어떻게 먹느냐?’ 이러기를 수 분 만에 결론은 쉽게 나버렸다. 인터넷 검색! 우리가 알고 싶은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

검색 결과는 이렇다. 돼지의 횡경막과 간 사이에 붙어 있는 살점이 있는데, 간을 막고 있다고 해서 ‘간막이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뱃속을 가로로 막고 있다고 해서 ‘가로막살’이라고 부른다. 소로 치면 안창살쯤 되는 부위이다.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부위는 아니지만 쫄깃쫄깃한 맛 때문에 점차 인기를 끌면서 돼지고기 집에서 정식으로 팔리는 부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간막이살’ 또는 ‘가로막살’이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발음의 ‘갈매기’살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이 그래서 그렇지 실제 갈매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포에서 갈매기살로 장사가 제일 잘 되는 집 이름이 ‘부산갈매기집’이란다. 돼지 가로막살에서 갈매기살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다음 갈매기로 유명한 곳이 부산이니 부산과 갈매기가 결합되어 가게 이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말의 변화 과정은 그 자체가 재미있고도 경이롭다.

[사진] 갈매기와 갈매기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의미 상관없이 용어를 빌려 온 것(왼쪽은 박건호 사진, 오른쪽은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CGu0의 그림)

비단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명(地名) 역시 그러하다. 원래 지명은 고유한 역사성을 담고 있어서 그 이름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 얽힌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로구 사직동은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던 데서 유래했으며, 왕십리, 답십리라는 곳은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하여 붙은 이름이며, 세검정은 인조반정 후 반정세력들이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경기도의 의정부(議政府)는 조선의 중앙부서인 의정부 소속의 둔전인 ‘의정부둔(議政府屯)’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에서 나왔으며, 송파구에 있는 문정동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이곳에서 마신 우물이 맛이 좋아 칭찬을 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이 마을에 많이 살았던 문씨(文氏) 성과 우물 정(井)자를 따서 문정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명 역시 원래 역사성만 담은 채 고정되어 있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 역시 역사의 부침에 따라 변해간다. 역사는 새로운 일들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때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려했던 것처럼 때로는 권력자의 욕망이 개입하기도 한다. 지명의 변화 자체가 역사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변화라는 것도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의 불규칙성은 예측을 넘어선다. 이로 인해 때로는 현재의 지명만 가지고서는 그 뿌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계동, 문래동 그리고 삼전동

몇 가지 흥미로운 지명의 변화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서울 중구에 계동(桂洞)이 있다. 현대그룹 사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얼핏 보고 계수나무를 뜻하는 ‘계(桂)’자 때문에 이곳에 계수나무가 많았거니 하겠지만 그 유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이 있어서 제생동(濟生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가 이 제생동이 점차 발음하기 좋게 계생동(桂生洞)으로 변한다. 그런데 1914년 동명 제정 때 계생동의 ‘계생’이 ‘기생(妓生)’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해서 ‘생’자를 생략하면서 ‘계동’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알지 못한다면 ‘계동’에서 ‘제생원’의 역사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겠는가?

[사진] 제생원에 기원을 둔 서울 종로구 계동은 현대그룹 본사 건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현대그룹을 검색하면 계동은 없고, 도로명 주소 ‘종로구 율곡로 75번지’로 뜬다. 2014년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실시됨으로써 지번 주소와 함께 그 땅에 얽힌 고유한 역사성도 동시에 지워져 버렸다. ‘길 이름’ 하나로 어떻게 그 길 주변의 많고 많은 사연과 역사가 다 설명되겠는가? (인터넷 사진)

또 서울 영등포구에는 문래동이 있다. 원래 이 곳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만든 방직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옥정(絲屋町)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해방 후 지명에서 왜색을 빼기 위한 취지로 방직기의 순우리말인 ‘물레’를 음차한 ‘문래’로 개칭되었다. (어떤 이는 원래 이 일대가 안양천과 도림천을 끼고 있어 모래가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 ‘모랫말’이라 불렸는데, 이 모랫말을 음차하여 문래동이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송파구의 삼전동(三田洞)으로 가보자.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한자에 셋을 뜻하는 ‘三’이 붙어있다. 송파구청 홈페이지의 ‘동명 유래·연혁’에는 이 마을에 유일하게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이것은 한자를 곧이곧대로 뜻풀이한 것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원래 이 곳은 ‘삼밭게’로 불렸는데, 삼을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마전포(麻田浦)라고도 불린 이유이다. 그러니 ‘삼전’은 삼밭이 많았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삼’의 음을 내는 한자로 쉽게 쓸 수 있는 ‘三’으로 바꿔 쓴 것으로 보인다. 삼(麻)이 삼(三)으로 변하면서 삼전동은 ‘삼밭이 많은 동네’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밭 3개가 있는 동네’로 해석되는 것이다.

88 올림픽의 추억

이렇게 말과 지명의 다양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잡은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탄원서’ 한 장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 탄원서는 1988년 송파구 개명을 둘러싼 논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며칠 전인 9월 17일에는 우리 역사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을 때인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한 날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현재의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이 6.25전쟁 중 국군의 38선 돌파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과 비교해서 이 9월 17일이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이 생긴 날이므로 이 날로 국군의 날을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1988년 한국 현대사의 큰 변화의 계기가 된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날이 9월 17일이다. 이런 이유로 광복군에 대한 글은 다음 기회로 미루더라도 88 올림픽에 대한 글은 한 편 써서 이 날을 기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이전 수집한 탄원서 자료를 들춰낸 것이다.

송파구에 비교적 오래 살았던 인연도 있고, 1988년 당시 나는 이 개명 문제를 알지 못했던지라 한편 신기하고 또 한편 재미있어서 몇 년 전 수집했던 자료였다. 크기는 B5 크기의 갱지에 단면 인쇄된 것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22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목은 그냥 ‘탄원서’로 되어있다.

이 탄원서에 담긴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한 세대 전인 1988년으로 돌아가 보자. 1980년대 대한민국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올림픽 준비 열기로 몸살을 앓았다.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을 통해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메우고, 정권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모든 것이 올림픽으로 통했다. 당시 86 아시안게임도 개최 예정이었던 터라 정부는 ‘86’과 ‘88’을 함께 묶어 만든 요술 방망이로 희망적 미래라는 폭죽을 터뜨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회 현안은 덮여버렸다.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먼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상계동, 사당, 목동 등 서울의 판자촌 다수가 철거되고, 그 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고, 이에 생존권을 지키려는 빈민들은 거세게 저항하였다. 올림픽 준비로 부산하던 1988년 6월 29일 서울과 경기권의 도시 빈민 800여명은 명동성당에 모여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생존권 쟁취대회’를 갖고 “반민중적 올림픽을 규탄하고 빈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현 군부독재에 대해 강력히 투쟁할 것”을 표방하였다. 이 빈민촌 철거 문제는 김동원 감독이 당시 제작한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보면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사진] 88올림픽 개최를 위해 다수의 도시 빈민의 삶이 유린되었다.(위, 다큐 <상계동 올림픽>의 한 장면), 88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학생들 중심으로 표출되었다. 사진은 당시 대학생들이 만든 팜플렛이다. 이들은 30년 뒤 남북의 지도자가 만나 2032년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추진에 합의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래, 박건호 소장)

또한 올림픽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대학생 중심으로 서울 올림픽이 분단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남한의 단독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움직임이 표출되었다. 급기야 1988년 5월 서울대생 조성만이 “공동올림픽 개최”, “미국 축출”, “양심수 석방” 등을 건의하며 할복 투신 자살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논란을 뒤로한 채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올림픽이 성공리에 치러졌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84년 LA올림픽이 한 쪽 진영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들이었던 데 비해 서울올림픽에는 양 진영이 모두 참가했다는 것부터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고, 동서 진영의 화합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에 새로운 논란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올림픽이 열린 송파구의 개명 문제였다.

한 장의 탄원서가 전해주는 송파구 개명 논란

원래 송파구 지역은 서울특별시의 성동구에 편입되어 있던 곳인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로 분구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1월 1일을 기해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어 나왔다. 지금도 강동교육청과 강동등기소가 송파구에 있는 것은 이런 역사의 흔적이다. 그런데 강동구에서 이 지역이 분구될 때 ‘잠실구’, ‘올림픽구’, ‘송파구’라는 명칭이 후보에 올라 경합을 벌였으나 송파동이 신설구의 중심지이고, 송파나루와 송파산대놀이와 같은 전통 문화 고취라는 이유로 송파구로 선정되었다. 이곳에 지금은 뽕밭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잠실구’는 탈락했고, 외래어라는 이유로 ‘올림픽구’도 최종 탈락하였다.

이렇게 송파구로 이름이 확정되고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집권 민정당이 다시 정부에 송파구를 올림픽구로 개명하자고 명칭 변경을 건의하면서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둔 상황에서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올림픽으로 통하던 시기였으니 이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개명을 둘러싼 논란은 올림픽 개최 기간에는 잠시 관심 밖에서 멀어졌다가 올림픽이 끝난 직후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강조하는 쪽은 올림픽구로의 개명을 지지했고,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이들은 송파구 고수를 주장했다. 다수의 구민들은 후자 쪽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뉴스 한 토막을 보자. 1988년 10월 24일자 MBC뉴스는 ‘송파구 주민, 구명 개칭 문제 의견 분분’이라는 제목으로 이 논란을 보도하였다. 이때 앵커는 백지연이었고, 취재기자는 손석희였다. 이 보도에 등장하는 두 시민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찬반의 논리를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988년 10월 24일 MBC 뉴스는 ‘송파구 주민, 구명 개칭 문제 의견 분분’이라는 제목으로 송파구 개명을 둘러싼 논란을 보도하였다. 제일 왼쪽이 당시 취재를 맡은 손석희기자다.(MBC 뉴스 캡쳐화면)

“김진덕씨(송파구 주민): 우리는 새로운 역사에 창조적인 올림픽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올림픽 구의 명칭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올림픽이라는 민족과 역사에서 기대를 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파라는 말을 정했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엄창섭씨(송파구 주민): 역사의 자체를 봐도 이름을 바꾼 데가 없어요. 그러나 하필 우리만 바꾸는지.. 우리는 송파구에서 올림픽을 해서 기쁩니다. 그 올림픽로가 있고, 올림픽공원이 있고 이런 것으로 아주 족하지요. 그런데 그냥 송파구를 바꾼다니까 좀 섭섭하고 바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다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지명 고수와 지명 변경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새롭게 창조된 지금의 역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전통과 결부된 역사를 따를 것인가라는 일종의 ‘역사논쟁’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내가 수집한 탄원서 한 장은 송파구를 올림픽구로 바꾸지 말자는 의견을 담고 있는 자료로 제작 시기는 올림픽이 끝난 후 20일이 지난 10월 22일이고, 위에 소개한 MBC뉴스 이틀 전의 자료이다. 이 탄원서 한 장은 88올림픽이 끝난 직후 송파구 개명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탄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탄원서

송파구를 올림픽구(五輪區)로 바꾸지 맙시다. 송파는 언덕 위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산 좋고 물 맑은 조상들의 발자취가 담겨져 있고 백제(위례성) 도읍지며 삼남으로 통하는 대로이고 송파진(송파나룻터)은 옛날 교통수단의 교역지이며 송파 산대놀이(문화재49호) 답교놀이가 있고, 전국에서 제일 손꼽혔던 송파 오일장이 섰으며, 송파 씨름에서 황소를 끌어야 가슴 펴는 장사였었다. 송파는 500년 역사가 담겨진 많은 유적지와 송파산대놀이 송파답교놀이 송파나루터 송파씨름이 있으며 이웃에는 석촌 백제초기 적석총 방이백제고분 비석거리 풍납동토성 대왕좌약수 임경업 장군의 생가터 충열부군당 삼전도비 외에도 많은 조상들의 유적 마을인데 경상도 전라도 시골 산골을 가도 송파라 하면 잘 알고 있는 지명이며 이런 역사의 발자취를 버리고 올림픽구로 바꾸고자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선열들께서 깜짝 놀라실 것이다. 올림픽은 24회가 지나도 세계 어느 나라 지명을 바꾼 일 없고 올림픽은 체전이지 한국의 역사는 아니다. 올림픽은 올림픽경기장 올림픽공원 올림픽대로로 보존하며 기념으로 두고 세계 어디서든지 서울올림픽하면 되지 올림픽구로 고칠 필요가 없다. 역사와 유적 조상들이 즐겨 부르시던 소나무 송(松) 언덕 파(坡) 송파구로 그대로 두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1988년 10월 22일 송파구 구민 일동

  1. 언덕 위에 소나무 푸르게 잘 자란다.
  2. 올림픽구가 무엇이냐 우리말로 송파구다.
  3. 선조들의 발자취 하루아침에 고치지 말라.
  4. 서울시 송파구가 올림픽시 올림픽구라니.
  5. 주체성 있는 아테네, 동경, LA 자부심 없는 올림픽시 올림픽구
  6. 지명은 역사이고 올림픽은 체전이다.
  7. 송파구는 영원하고 올림픽은 지나갔다.
  8. 올림픽 선수들은 송파구라 알고 갔다. ”

[사진] 송파구를 올림픽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주장을 담고 있는 탄원서이다. (1988년 10월 22일, 박건호 소장)

송파구로 남든, 올림픽구로 바뀌든 모두다 역사를 반영한 지명은 되었겠지만, 1988년 담론의 장에서는 결국 ‘송파구’가 승리했다. 송파구가 올림픽구를 이겼다. 잠시 스쳐가는 올림픽이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탄원서 말대로 ‘송파구는 영원하고 올림픽은 지나간’ 것이었다. 송파구가 올림픽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송파구에는 올림픽동, 즉 오륜동이 만들어졌다. 이 ‘오륜동’의 이름으로나마 올림픽은 자기의 역사를 지명에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올림픽과 관련된 지명 논란은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재연되었다. 올림픽에 맞춰 개통한 서울-강릉간 KTX의 진부역의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서였다. 올림픽 스타디움과 프라자에 가장 가까운 역인 관계로 원래는 진부역 뒤에 ‘올림픽프라자’를 괄호에 넣어 병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창군민들의 반대로 ‘오대산’이라는 명칭을 병기하게 되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평창군의 한 관계자는 “올림픽은 잠시뿐이고, 대회 이후에는 오대산을 관광 명소로 키워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면서 “진부역 뒤에 ‘올림픽 플라자’라는 명칭 대신 ‘오대산’을 붙여야 한다는 군민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대산’이 이긴 것이다. 지금 현재 평창올림픽의 상징이었던 올림픽 스타디움과 올림픽 플라자는 대부분 철거되고 없다. 달항아리 성화대 정도가 남아 그 날의 영광과 환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진부역 뒤에 ‘올림픽 플라자’를 붙였다면 어쩔 뻔 했을까?

당근!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민들의 선택은 지혜로웠다. 어떤 지명을 쓸지 결정할 때는 근시안이 아니라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함을 비로소 알겠다.

[사진] 진부역 모습이다. 진부역 뒤에 병기할 명칭으로 ‘올림픽 프라자’와 ‘오대산’이 서로 대립하였으나 결국 ‘오대산’으로 결정되었다. (위, 인터넷 사진). 2018년 8월 말의 평창군 올림픽 플라자 일원의 모습이다. 대부분이 철거되어 지난겨울 열정과 열기의 증거를 찾기 힘들다. 이런 마당에 역 이름이 ‘진부(올림픽 프라자)’이라면 얼마나 허망했을 것인가? 이름 하나 짓는 것도 이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래, 연합뉴스 사진)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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