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떤 존재일까
[종교와 사회] '유일신'론과 이분법
    2018년 09월 06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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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거창의 인문학 공부 모임에서는 보통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가장 진보적인 인사 한분과 가장 보수적인 한 분을 모시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진보와 보수 간에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는 것이 다시 증명되었다고나 할까, 역시 너무나 상호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누가 말했듯이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한국 사회에 아주 시급한 일이라는 의견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그날 대화가 잘 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한 분은 교수 출신의 사회학자로서 평화와 통일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였고, 다른 한 분은 전문적인 종교인으로 기독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나는 사회학이 뭔지 잘 모르고, 더구나 평화와 통일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해 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회학자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나도 기독교회 목사이기에 그 참석하신 목사의 의견에 대해서는 한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기독교는 무엇일까? 하나님, 하느님이라고 하는 신은 어떤 존재일까 잠시 다시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목사나 나나 똑같은 기독교회 목사인데 서로 믿는 기독교가 다른 기독교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고, 그 분이 믿는 하느님과 내가 믿는 하느님과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목사에게 물어도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믿는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고 바른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 둘, 같은 기독교인이 대화를 했어도 대화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 기독교가 하느님(神)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초월적인 인격신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신론(有神論)이라고 하는데 이런 분이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유일신론(唯一神論)이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하느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신 이해가 꼭 잘못되었다거나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21세기에는 보다 더 폭넓은 하느님 이해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하느님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숭배하는 것

대개 유일신론의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기에 저 높은 하늘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려다보면서 간섭하고 감시하는, 마치 재판관이나 검사, 형사 또는 왕 같은 하느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혹시 그런 하느님께 잘못을 해서 벌 받지는 않을까, 또는 하느님께 잘 보여서 남보다 많은 복을 받아야겠다는 식의 인과응보적 하느님으로 믿고 섬기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욕망 달성이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자기중심적 혹은 배타적 종교심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믿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신학자 포이에르바흐나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신 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 기독교가 이런 정도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에 이미 죽은 신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성서에도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해도 장성한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전13:11)고 했는데, 초월적 유일신론은 21세기 이제는 넘어서야 할 구세대의 하느님 이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유일신론은 대개 힘(Power)을 숭상하게 하고, 가부장적 사고에 머물게 되어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선과 악, 신과 인간, 서양과 동양, 의인과 죄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등 이런 식으로 나누고는 모두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결국 힘없고 열등한 존재인 후자들은 우월한 전자들이 마음대로 해도 좋은 미천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대화의 시간에 참석한, 초월적 유일신론에 사로잡힌 목사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평화는 힘 있고, 의롭고, 기독교국가인 선한 미국의 편에 서야지, 약하고 나쁘고 무신론자들인 죄인 북한의 입장에 서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런 신앙을 만드는 그런 하느님은 이미 19세기에 죽었고, 없다는 것을 한국 기독교는 알아야 한다. 21세기의 하느님(神)은 더 이상 저 높은 보좌에서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하느님은 아니다. 이제 참 하느님은 더 이상 남과 북,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어 판단하지 않는다. 참 하느님은 모두를 다 하나로 포용하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다. 하나의 신이다.

하나의 신은 모두를 차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인보다 죄인, 강자보다 약자, 남자보다 여자, 이성애자보다 동성애자, 인간보다 어쩌면 인간의 욕심으로 고통당하는 동물, 식물, 온 생태계, 이렇게 소외되고 지배당하는 자들에 대해 더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어머니 같은 모성애적 하느님이다. 더 나아가 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왕 같은, 아버지 같은 신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此兩者, 同出而異名 라 했다. 하느님이라 하면 벌써 하느님이 아니요, 無는 만물의 시작이고 有는 만물의 어머니다. 이 양자는 이름만 다르지 사실은 같은 것이다. 이미 유영모와 함석헌도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말했다. 없으신 듯 있으신 듯 약자 편에 내재하시는 참 하느님은 道, 空, 無心, 알라, 天主, 씨ᄋᆞᆯ, 하느님,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을 수 있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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