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연안파의
    어설픈 권력장악 시도
    [붉은오늘 사이드스토리] 1956년
        2018년 09월 01일 1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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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붉은오늘 사이드스토리’ 주제는 북한의 정치와 권력구조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소위 ‘8월 종파사건'(붉은오늘 방송 링크)과 관련하여 이 사건의 한 주역이었던 연안파와 관련한 내용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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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선배를 잘못 만난(?)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맡게 되는 김재봉이었다. 해주일보 경성지사에서 근무하던 김재봉은 고향 친구 안상길의 연락을 받고 종로의 후미진 여관으로 찾아갔다. 비밀리에 상해임시정부를 다녀온 안상길이 꺼내놓은 것은 임시정부 헌법, 독립신문, 그리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채권이었다.

    김재봉이 더 놀란 것은 연통제였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국내에 비밀 행정부를 만들기 위해 기획한 것이 연통제였다. 안상길은 경북 교통책(책임자)으로 선임되어 있었다. 안상길과 안동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았지만 채권 한 장 팔지 못한 채 체포되었다.

    김재봉이 6개월의 징역을 살고 고향 풍산읍 오미리에 돌아왔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일경들이 자주 출몰하여 동태를 감시하자 종손의 안위가 걱정된 문중에서는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 마을 현애리의 김시현이 잠시 고향에 들렀다. 김시현은 풍산읍의 엄친아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고 학업은 최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게다가 김시현은 일본으로 유학,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풍산읍에 금의환향한 인물이었다.

    영화 <밀정>의 주인공인 김시현은 만주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잠시 국내의 정세를 살피러 귀국한 상황이었다.

    김시현은 1921년 11월(1922년 모스크바로 변경)에서 개최되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곧 국내를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그는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여유분의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김시현은 김재봉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오자고 제안했다. 김재봉은 한 번도 소속되어 본 적이 없는 조선노동대회 대표자격으로 김시현을 따라나섰다. 엄친아와 함께 떠나는 길을 문중에서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한 것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였다. 이르쿠츠크파는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후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의 유일한 공산당을 승인 받는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대회는 성공적이었지만, 뒤늦게 모스크바에 도착한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지도자 이동휘는 이르쿠츠크파가 유일당으로 승인받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코민테른은 딜레마에 빠졌다. 이르쿠츠파에는 러시아국적의 한인2세가 상당수였고 그 중에 일부는 볼셰비키 당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이 자금을 제공하고 먼저 관계를 가진 것은 상해파였다. 게다가 상해파는 국내에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코민테른은 두 당의 통합을 주문했고 트로츠키까지 중재에 나섰지만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코민테른은 두 당 모두 승인을 거부하고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서 통합 당대회를 개최할 것을 통보했다. 통합 당대회는 시작부터 파국이었다. 상해파의 이동휘는 이르쿠크츠파 소속의 참가한 대의원들의 대표권을 표결을 통해 박탈하면서 오로지 머릿수로만 대회를 강행했다. 하지만 대표권이 심각한 것은 상해파였다. 국내조직의 대표로 참가한 상해파 대의원은 자신이 어느 지역과 조직을 대표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촌극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르쿠크츠파는 대회장을 이탈해 치타에서 독자적인 당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회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김재봉도 선택을 해야 했다. 김재봉은 이르쿠크츠파를 따라 치타로 이동했다.

    두 당은 모두 자신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유일당이라고 주장했지만 코민테른은 격분했다. 지노비예프는 두 당의 해산을 통보하고 앞으로 당을 자임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르쿠크츠파와 상해파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당을 자임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김재봉이 귀국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여장을 풀었을 때 변수가 발생했다. 코민테른은 국내에 당을 건설할 것을 권고하면서 고려총국을 설치했다. 코민테른은 이르쿠크츠파와 상해파의 핵심인물을 모두 배제하고 국내에 귀국하는 인물을 선택했다. 뜻하지 않게 김재봉은 고려총국 국내부 대표권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왔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건설된 것은 화요회의 힘이 크게 작용했지만 서울파(서울청년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조직들이 당에 가담한 것은 김재봉의 고려총국 국내부 대표권이 크게 작용했다. 국내조직들이 볼 때는 준(準) 유일당의 위상으로 작용한 것이다.

    연안파와 소련파의 어설픈 권력장악 시도

    역사에서 이렇게 어설픈 권력장악 시도가 또 있을까. 1955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대부분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문받았다. 귀국한 김일성은 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한 연설이 공개되자 김일성은 3차 당대회를 앞두고 비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가 과도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을 해야만 했다. 개인숭배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에둘러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벗어나 동유럽과 이른바 비동맹외교를 추진하려는 계획을 확정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이 위기에 몰려있다고 판단하고 망설였던 계획을 꺼내들었다.

    김일성이 동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의 당 위원장 자리를 박탈하고 내각총리만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계획이었다. 김일성을 실각시킨다는 것도 아니고 권한을 일부 제한한다는 계획을 합법적인 방법, 즉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결정한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우선, 연안파와 소련파가 합작을 했지만 중앙위원회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일성의 만주파와 그에 우호적인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김일성이 외유 중일 때 자신들의 계획을 밀어붙이면 중앙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정세인식 수준이었다.

    8월 2일로 계획되어 있던 중앙위를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자 강행하지 못하고 8월 30일로 연기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이 안건에도 없는 정치연설을 통해 김일성의 경제정책 오류와 개인숭배를 비판했지만 강제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8월 중앙위 전원회의)이라고 부르는 이 반나절의 에피소드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영원히 사라졌다.

    연안파의 지도자인 김두봉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한글을 연구하던 김두봉은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규식의 신한청년당, 이동휘의 한인공산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주도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김두봉이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담한 것은 임시정부는 이름뿐인데다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의열단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건설하고 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있었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연안파의 2인자인 최창익은 국내에서 서울파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두 차례의 검거로 화요회가 주도하던 조선공산당이 와해되자 (국내)상해파인 김철수가 당대회를 소집할 때 참여했다.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 후 출감하자 허정숙과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김두봉와 최창익은 독립운동 경력에 공통점이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적의 한인2세인 한빈은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이때 최창익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양명과 함께 3차당 안의 당내당인 레닌주의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공청을 사실상 장악했다. 역시 체포되어 복역 후 출감하자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최창익과 한빈은 공통점이 있지만 출신은 완전히 달랐다. 8월 전원회의에서 정치연설을 통해 김일성을 실각시키려 했던 윤공흠은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운 조종사였다. 대담하게도 윤공흠은 자신이 배운 비행기술을 이용해 비행기로 암살과 폭파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의열단과 긴밀히 협조관계를 구축했다.

    조선민족혁명당 내 균열이 생긴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외에 당을 건설하지 말 것과 당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조직은 즉각 해산하라는 코민테른의 11월 결정서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공산당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열단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과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최창익과 한빈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남경군관학교 출신의 젊은 간부들도 동참했다. 어렵게 조직한 조선의용군도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들이 장링, 충칭을 거쳐 중국공산당의 거점인 연안(옌안)에 도착한 것은 1941년이었다. 최창익과 한빈은 김두봉을 주석으로 조선독립동맹을 건설하고 (최)무정장군의 부대와 합류해 조선의용군을 창설했다. 무정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은 중국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해방 후 무정장군이 김일성보다 인민들에게 더 인기 있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도 이런 이유였다.

    연안파는 출신과 이력이 다른 이들이 코민테른 결정을 따르면서 만들어진 우연의 산물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8월 전원회의와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일사분란한 구심점이 없었다.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최소한의 병력을 준비하지도 않은 것은 차라리 소극(笑劇)이었다. 유일당, 1국1당이 가져온 희극(戱劇)이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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