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안동교회,
    요즘에 이런 교회도 있다
    [그림 한국교회] '분립 개척'의 모범
        2018년 08월 16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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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헌법이 세습을 금지하는데도 명성교회의 부자간 세습을 용인하는 총회재판국의 몰상식한 판결에 온 나라가 술렁이며 지탄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회헌법수호와 명성교회 세습철회를 위한 예장목회자대회’ 준비 실무위원장을 맡아 여러 지역을 순회하는데 일선 목회자들의 뜨거운 지지가 놀랍습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복절이면 조국해방의 굳은 신념이 담긴 육사의 ‘광야’가 떠오릅니다. 이원록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수차례 구금당했고, 1944년 북경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 ‘264’를 아호로 삼을 정도로 시인은 항일정신이 투철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8.15 해방을 “도둑같이 온 해방”, “하늘이 준 떡”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해방을 미리 알았다고 하며 해방을 도둑질하려거나 자기 공로로 주장하는 자들을 경고하며 민중들만이 민족해방을 위해 싸웠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결단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친 이들이 있는데, 경북 안동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표적입니다. 그 중에 석주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확보한 군자금을 가지고 중국 간도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하여 무장항일투쟁군대를 양성합니다. 석주는 서로군정서의 최고책임자로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은 관장인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끈질긴 노력 끝에 세워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15,056명 중 2183명이 경북 출신이고, 그중에 안동은 367명으로 월등히 많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립니다. 생생한 성지인 독립기념관 앞 내앞마을은 고풍스런 한옥의 김씨 집성촌인데, 항일운동을 위해 마을을 떠나 걸어서 중국 망명길에 오른 이들이 150여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유교와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서 기독교가 흥왕하였던 것은, 안동교회 등이 시대적인 소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3.1혁명 당시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김병우 장로는 3월 13일 장날에 교회 종소리에 맞춰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은밀히 계획하였으나 예비검속으로 유치장 안에서 만세소리 없이 종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불씨를 지폈습니다. 3월 18일,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생인 조사(요즘의 전도사) 이상동이 안동 중심에서 태극기를 모방한 연에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혼자 만세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금방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이후 모의는 계속되어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안동의 11개 교회 교인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합니다.

    이상동 조사가 경성감옥에서 복음을 전해 회심한 4인 중에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제39회(1954년) 총회장으로 신사참배 결의 취소성명을 낸 이원영 목사가 있습니다. 이제 많은 교인들이 유림과 합세하여 만세운동에 나서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투석전이 벌어졌을 때 두 교인이 총에 피살되었고, 임시정부로 가려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여러 명이 고초를 겪습니다.

    1909년에 설립된 안동교회는 1911년에 부임한 김영옥 초대 목사에 의해 튼실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알고 보니 예장 총회장으로 존경받은 고 김형태 목사(연동교회 원로)의 조부였습니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요 민족지도자로서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마다 선교사가 준 노새와 가옥을 팔아 건축헌금을 드렸고, 경북북부지역의 교회를 섬기며 안동교회를 지역사회를 섬기는 건실한 교회로 세웠으며, 교회가 민족운동의 보루라는 믿음으로 3월 만세운동의 주역이었고, 경북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독립공채 모집을 독려했으며 신간회를 세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안동교회가 자랑할 것이 많지만, 110여년의 역사에서 분열이 없었고 모범적으로 분립개척을 한 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교인들을 나누어 안동서부교회와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하여 개척교회를 세우는 식으로 20개 교회를 분립하거나 설립하였습니다.

    또 교파를 넘어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하여, 1951년 안동에서 안도제일감리교회를 개척할 때 안동교회 남선교회와 여전도회가 감리교의 목사 급여를 후원하고 건축헌금을 보냈으며, 김광현 목사는 조상국 집사에게 안동교회를 떠나 감리교회를 섬기도록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또 1974년 감리교회가 예배당이 소실되었을 때 정성껏 건축헌금을 모아 지원했습니다. 1953년 성결교회가 설립되도록 전도집회를 적극 지원하였고, 구세군교회가 안동에 정착하는데 도왔습니다. 심지어 가톨릭 성당을 세울 때도 협력하였다고 하니 진정으로 어머니교회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안동교회는 지역사회의 어머니가 되고자 많은 선교활동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림=이근복

    담쟁이로 뒤덮인 아름다운 석조예배당은 친근합니다. 1987년 예장총회 청년회전국연합회 전국대회를 할 때, 마루바닥 예배당에서 집회하다 시내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며 대규모 시위했던 기억이 납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교직에서 해직된 안동교회 김대성 집사의 복직을 요구하며 안동교육청을 항의 점거했고, 안동농협을 점거농성하고 전경상 집사의 원대복귀를 요구하여 합의를 받았습니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준공하였는데 설계자는 이화여대와 철원제일감리교회를 건축한 미국 평신도선교사 보리스 (William Merrell Vories)였습니다.

    이번 안동교회 방문에서 가장 고무적이었던 것은 저를 안내한 전경상, 김대성 장로님이 담임목사를 존경하고 자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헌신적이고 진실하며 검소하고 끊임없이 교회발전방안을 모색한답니다.

    석조예배당 옆 100주년기념관은 크고 어린이도서관과 카페 등이 있는데 석조예배당의 담임목사실은 비좁았습니다. 역대 담임목사들이 대대로 사용하였다고 그냥 쓴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실에 걸린 총회장을 지낸 두 원로목사 김광현 목사와 김기수 목사가 현 김승학 담임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은 가족사진처럼 보였습니다. 교우들과 주민들로부터 존경받은 목사들이 있었기에 안동교회가 민족역사와 지역사회에서 제 몫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사회가 염려하는 형편이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절망하여 떠나는데 안동교회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건강한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장(통합)총회에서 교권을 장악하여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이 지역출신들인 ‘안동사단’(대표적으로 김삼환 목사)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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