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무과,
    체제수호의 완충장치
    [책]『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유진 Y. 박/푸른역사)
        2018년 07월 21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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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로 읽어낸 조선 후기 역사

    조선의 역사는 1392년부터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왕조이지만 식민지배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의 역사가 끝나다보니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은 조선시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무인의 역사를 통해 상기한 이분법적인 통설에 기반하여 조선 후기역사를 이해하는 큰 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 조선 조정은 무과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는지 그리고 백성들은 합격하더라도 무관이 될 수 없었던 무과에 왜 백성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는지 조선 후기 무과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저자는 무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종종 간과되어 왔던 방법론과 이론적인 이슈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1608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총 477회의 무과에 대해 현존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무과와 같은 조선 후기의 특정 제도들이 어떻게 피지배층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정부의 부정부패와 농민의 몰락과 같은 문제가 계속되는데도 왕조가 지속되는 데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설명한다.

    무과의 역사, 체제의 완충장치

    임란 이후 조정에서는 공로가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전과 달리 무과를 대규모로 시행했고 북쪽 변경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1620년의 무과에서는 만 명이 넘는 합격자를 양산하여 ‘만과萬科’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었다. 1609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무과 가운데 254번의 무과에서는 한번에 100명이 넘는 많은 합격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합격자들이 실제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해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과는 더 이상 국방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관의 지위 하락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무과응시에 더욱 열을 올렸고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를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즉, 체제의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조선 조정은 무과를 통해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빈번한 무과의 설행이 관직 권위의 실추 등 또 다른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조정이 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층들은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화적 자산을 일부만 공유함으로써 유연하게 사회위기를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배층들은 독점적으로 향유했던 문화의 일부 특히 과거 합격이라는 중요한 관문 특히 무과의 관문을 피지배층에게 조금씩 양보하며 체제불만이라는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통념에 대한 도전

    저자는 한국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던 보편적인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양반’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원문에서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을 ‘귀족aristocracy’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조선의 양반을 귀족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는 양반의 성격이 고려시대의 지배층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지배층이 어떻게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과와 무인들이 어떤 역할과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통사적으로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양반 특히 문신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떤 사회적 제도를 이용하여 특권을 유지하며 세습해 나갔는지 과거科擧, 결혼, 입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연대기 자료를 포함해 문·무과 급제자의 합격자 명단을 바탕으로 저자의 해박한 보학譜學 지식을 더해 인적 네트워크를 밝히고 그 네트워크가 어떻게 양반을 귀족으로 불리도록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밝히고 있다.

    한 사회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정의할 것인지 여부는 그 사회 전체의 성격규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제로 한 동안 한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검토되지 않았던 거시적인 문제였다. 저자가 조선의 지배층의 호칭에 대한 보인 관심은 500년이나 지속된 조선왕조의 성격규정과 관련된 큰 틀에 대한 거시적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탄탄한 자료 분석으로 뒷받침

    저자의 조선 후기의 위기와 무과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탄탄한 한국사 자료 이해에서 그 견고함을 더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한국사 공부를 하여 전산화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기자료(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를 비롯하여 각종 방목榜目(문·무과 합격자 명단)과 같은 관찬사료뿐만 아니라 지방지, 문집, 호적戶籍, 민담, 소설, 회화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그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첫 번째로, 조선시대 전체 무과급제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2,327명의 무과급제자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러한 자료 구성은 무과급제 연구에 대한 분석 중에서 가장 방대한 샘플이다.

    두 번째로, 이전에 간과되었던 법전, 호적戶籍, 읍지, 문집, 방목榜目, 그리고 족보 등무과제도 관련 자료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이전 연구에서는 이러한 자료들이 충분히 이용되지 않았거나 심지어 빠지기도 했다.

    세 번째, 구전되거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자료를 분석해 무과제도가 당시의 서민문화를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고찰했다. 본래 무과의 기능은 국가가 중앙관직의 무관을 뽑기 위한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으며, 이는 1894년 무과제도가 폐지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군담소설 등을 분석해 평민들이 말 타기와 활쏘기 같은 기능을 시험하는 무과를,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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