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6개월 유예
“정부, 갈수록 기업 편향”
좋지 않던 노·정, 갈등 더 심화될 듯
    2018년 06월 21일 0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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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청와대, 더불어민주당이 내달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에 실시되는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을 6개월간 단속이나 처벌하지 않는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 주 52시간제를 시행하되 이를 위반한 사용자에 대한 처벌은 6개월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준비기간 부족을 이유로 “6개월 계도기간을 달라”는 경총의 요구를 수용해 제도 시행 열흘을 앞두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노동계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며 지금 당·정·청이 할 일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임금삭감 보전대책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박범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전날인 20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 회의가 끝난 뒤 브리핑에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하고 제도 연착륙을 위해 올해 말까지 6개월간 계도기간, 처벌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20일 열린 당정청 회의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연착륙을 위한 계도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단속·처벌 유예) 논의를 해왔다”며 “다만 처벌 여부는 행정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공식화하는 데 약간의 고민이 있었는데 모처럼 경총에서 제안을 해와 응답을 한 것”이라고 했다.

법정 근로시간을 위반한 사용자를 노동자가 고소·고발했을 때 처벌에 대한 재량권을 동원할 수 있다는 방침 역시 논란거리다. 박범계 수석대변인은 이날 당·정·청 회의와 관련해 “고소·고발 사건의 경우라도 주 52시간 적용을 위한 일정한 준비기간이 필요한 점과 사업주가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면 그런 사정까지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와 여당의 방침처럼, 국민의 공감대가 있다면 수사하는 쪽에서도 입건 유예 등 재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위반 시 사업주가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2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노동계 “처벌면제 꼼수 말고 임금삭감 보전 대책 마련해라”
정의당 “정부·여당, 여전히 기업 편향적으로 사고”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 사실상 유예되면서 노동계는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좋지 않던 노정 갈등이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에서 당·정·청의 방침에 대해 “강행법규인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사용자의 법 위반에 대해 처벌을 면제해주기 위한 온갖 편법과 묘수”라며 “단계적 시행으로 이미 자본의 편의를 봐준 입법임에도 300인 이상 중견기업이 아직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허튼 핑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지방선거 압승 이후 급속도록 친자본 친재벌로 선회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사용자들에게 부여된 6개월의 처벌면제 계도기간은 편법과 꼼수, 불법과 횡포로 ‘최악의 주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설계하고 밀어붙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주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는 계도기간 없이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며 “지금 당정청이 할 일은 처벌면제 묘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편법과 꼼수에 대한 엄중한 감독과 처벌, 임금삭감에 대한 보전대책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정치권에서도 노동시간 단축 유예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소득주도성장론, 노동존중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기업편향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21일 오전 상무위회의에서 “올 초 여야가 어렵게 근로시간 단축을 합의하고 반년 가까이 흘렀고, 거기다 이번 법률은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3단계를 거친다는 계도기간이 이미 포함된 것”이라며 “대통령 ‘임기 내 1800 시간대 노동시간’을 실현할 의지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 문제는 정부와 여당이 여전히 기업 편향이라는 기존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지난 번 최저임금법 개악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비용은 노동자에게 떠넘겨졌다. 정부가 노동자와의 약속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로만 여기고 있는데, 도대체 촛불정부에서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느냐”고 질타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또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때는 언제든 준비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러한 준비 부족을 근거로 제도의 시행을 미룬다면 제대로 정착되는 제도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라며 “어려움이 있어도 먼저 시행하면서 단점을 보완해야 할 문제를 애초부터 시행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택한 것에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정부가 임금보전 대책 등 제도 보완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견해가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서 소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조업이나 저임금 노동자, 시간급으로 돈을 받는 사람들이 타격을 받게 된다”며 예컨대 10시간 일하고 10개를 생산하던 것을 8시간 일하고 10개를 생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생산성을 늘리면 임금도 보전을 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사 간, 노사정 간에 타협을 통해 임금 보전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또한 “불가피한 경우 (정부가) 임금 보전의 정책 지원을 활용하는 방법을 쓰면 된다”며 “이런 식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기에) 부족한 조건이 있다면 채우는 식의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재계 등의 주장에 대해선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를 보면 근로시간이 단축될 때마다 ‘경제가 절단난다’, ‘기업들이 망한다’라는 얘기가 나왔다”면서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자기 생활의 여유를 갖고, 사업주는 연장근로를 통해서 사업을 문제없이 잘 풀어왔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도 그만큼 경제적이든 아니면 노동 생활에 있어서 선순환을 만들어왔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시간 노동을 하는 환경을 개선할 경우 고용창출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교수는 “선진국 같은 경우 파트타임을 통해 여가와 가족을 챙길 수 있는 일자리가 많다 보니 평균 근로시간이 줄어든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만큼 사람들과 일자리를 나누지 못한 채 임금 근로자들 중심으로는 너무 과다하게 일을 많이 하고 있다”며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면서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선순환의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나라다. 제대로 쉬고 가족들과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없는, 일 중독 사회였다”면서 “우여곡절 끝에 최대 68시간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을 52시간으로 줄이게 된 과정은 우리 사회가 가야 될 올바른 방향”이라고도 했다.

반면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소득 감소 부작용은 임금보전 대책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이날 같은 매체에서 “제도를 불합리하게 만들어놓고 문제가 되면 나중에 보완하자고 한다. 그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라며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을 뺏고 기업의 경영을 위협해 놓고 문제가 되면 천천히 찾아보자는 이런 무책임한 짓들을 정부가 계속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병태 교수는 또한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2000년대 유럽 북구의 아주 근로를 제일 적게 하는 시간의 평균과 같다. 유럽과 한 18년 정도 차이밖에 없다”며, 한국이 장시간 노동 국가라는 통계는 왜곡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라는 선순환 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노동시장의 고용이나 해고에 대한 자유가 없기 때문에 기업들이 (그동안) 일자리를 못 나눴던 것”이라며, 근로시간이 단축돼도 해고 요건을 완화하지 않으면 일자리 창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했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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