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민주주의, 투표
    [밥하는 노동의 기록] 투표날 아침
        2018년 06월 19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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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다. 나는 이 말을 어렸을 때부터 들었다. 어떤 것의 절정을 꽃이라 비유해 왔으니 투표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생각했다.

    나의 첫 투표는 1997년 대선이었다. 권영길씨가 받은 306,026표 중 한 표가 나의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선거 운동도 뛰었다. 날도 추운데 군소 후보라고 서러운 일 참 많았다. 후보 이름을 래핑한 유세차는 언감생심, 파란색 포터에 앰프와 가로 세로 열 개씩 쌓아 올린 수상기를 싣고 다녔다. 수상기가 얼까봐 스티로폼으로 감싸고 청테이프로 둘렀다.

    트럭을 세워놓고도 유세를 시작하지 않기에 무슨 사정인가 물어봤더니 전기를 구하기 위해 이 건물 저 건물로 뛰어다니는 중인데 경비 아저씨가 계속 내쫓는다 했다. 이런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선배들은 매일 보도자료를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안고 언론사를 찾았다. 그래도 ‘건설 국민승리21’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TV토론은 그 서러움의 정점이었다. 군소후보 합동 토론회에 나온 우리 후보의 좌우에는 신정일 후보와 허경영 후보가 있었다. 신 후보는 무려 신흥종교의 창시자이자 교주였으며 허 후보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한얼교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거나 국회의원을 모두 파면하겠다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말하는 나의 후보는 너무 멀쩡해서 이상했다.

    그렇게 97년 권영길씨에게 표를 준 이후,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사표 제조기로 살고 있다. 가난한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고 당선 가능성 없는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처음으로 투표하던 날, 아버지는 모듬회를 앞에 놓고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왜 멀쩡한 표를 죽은 표로 만들었냐 물어보셨다.

    유권자는 그저 당선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당선된 후보에게 준 표는 살아있는 표고 낙선한 후보에게 준 표는 죽은 표라는 말은 민주주의도, 투표도,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사표심리. 나는 이 말을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처음 들었는데 20년 동안 몇 번의 투표를 거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국가가 나서서 이런 말을 가르치는 것은 유권자를 기만하는 일이다.

    선거철이 되면 가끔 회자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있었다. 대통령 후보 역의 최수종이 젊은 유권자들 앞에서 한 ‘노인들이 지팡이 짚고 투표장 올 때 놀러 나간 당신들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들이니 투표부터 하고 와라’ 일갈하는 그 장면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선택권이 온전히 보장받지 않는 상황에서 유권자는 최선을 궁리하는 대신 최악을 피하는 것에 집중한다. 단판에 끝나는 투표와 거대 정당에게만 유리한 선거법은 ‘될 사람 밀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유력 후보의 당선 실패를 그에게 표를 주지 않은 유권자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우상호 의원은 대놓고 ‘심상정은 나중에 찍으라’고 말했다. 거대 정당의 선대위원장이 정의당 후보 지지자에게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놈의 사표 심리 때문이다.

    투표율만 높으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지도 못하면서 미래를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노인들이 꼴보수에게 표를 줘서 이 나라가 망한다, 20대가 투표 안 해 나라가 망한다 하지만 나는 투표권을 가진 이후 딱 두 번 빼고 항상 투표장에 갔다. 그 두 번은 산후 조리와 가족 여행 때문이었다. 11월에 비행기 표를 살 땐 다음 해 5월에 대선이 치러지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투표장에 갔지만 내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계속 민주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며 욕을 먹었다. 내가 나의 최선을 선택한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될 사람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바꿔놓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당신들에게도 나에게도 될 사람이 있다. 그것이 같지 않다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니다. 물론 나도 안다. 나를 욕하는 당신들 중 많은 사람들이 표는 될 사람에게 주고 돈은 안쓰러운 사람에게 준다. 그러나 미래는 최선을 바라면서 준 표에서 나오지 안쓰러워 준 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투표만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의 최소한을 위해 국가가 허락한 단 하나의 합법 행위일 뿐이다. 세상은 무엇을 할 때보다 항상 해오던 것을 하지 않을 때 바뀐다. 노동을 멈출 때에서야 자본가는 노동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소비를 멈출 때에서야 기업은 누가 자신들에게 돈을 썼는지 안다.

    나의 국가는 시민의 다양한 불복종 행동을 일단 불법으로 규정해놓고 투표라는 문 하나만 열어놓았다. 게다가 그 투표의 방식도 나의 요구를 제대로 실현할 수 없게 못 박았다. 노조는 귀족이고 파업과 시위는 떼쓰기이고 세입자는 건물주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이고 소수자는 무임승차자인 국가의 민주시민은 투표 당일 인증샷을 찍고 개표방송을 보며 노인네 망국론 혹은 이십대 개새끼론을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후 잠이 든다. 나는 이런 국가를 공화국이라 말할 수 없다.

    마냥 하는 일이 그것인지라 나는 민주주의를 살림과 같이 본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바로 티 나는 그것. 그러니까 투표는 민주주의에서 대청소 같은 이벤트다. 계절마다 하는 집도 있고 달마다 하는 집도 있지만 대청소 한 번 한다고 집이 매일 깨끗한 것이 아니다. 투표만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일상의 투쟁이 투표를 유의미하게 할 뿐이다.

    6월 13일 지방선거 투표 날의 아침밥. 샐러드와 비빔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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