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과 '국적'이라는 관념
[왼쪽에서 본 F1] 한국계 드라이버
    2018년 06월 18일 09: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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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출범한 F1 월드 챔피언십에는 69번째 시즌이 펼쳐지고 있는 2018년까지 모두 40개국에서 853명의 드라이버가 참가했습니다. 아시아로 범위를 좁히면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까지 5개국이 모두 25명의 F1 드라이버를 배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F1 팬들에겐 아쉽게도 한국 국적으로 F1 그랑프리에 출전한 드라이버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심상치 않은 드라이버가 한 명 있습니다. 한국계로는 최초로 GP3에 출전해 챔피언 타이틀 경쟁을 펼쳤던 한세용 선수가 2018년에는 역시 한국계 최초로 F2 무대에 진출해 지난 5월 13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역사적인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GP3와 F2는 F1으로 향하는 등용문과 같은 무대입니다. 특히 F2는 F1을 제외하면 가장 성능이 뛰어난 레이스카로 경쟁을 펼치는데, 현역 F1 드라이버 중 다수가 F2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F1 입성에 성공했습니다. 한세용 선수의 F2 우승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한세용 선수는 F2 진출 전 르노 F1 팀의 선택을 받아 한국계 최초로 F1 팀의 공식 리저브 드라이버가 됐습니다. F2 첫 승 직후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된 인-시즌 테스트에 참가한 것처럼 리저브 드라이버에겐 여러 차례 F1 테스트 기회가 주어지고, 만약 정규 드라이버에게 그랑프리에 출전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면 대신 그랑프리에 참가해 F1에 데뷔할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한세용 선수가 F1 팀의 리저브 드라이버가 됐다는 것은 한마디로 한국계 F1 드라이버의 탄생 가능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세용 선수의 F1 진출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국계’ F1 드라이버 탄생의 의미에 대해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세용 선수는 영국 국적을 주 국적으로 선택하고 ‘잭 에잇켄’이라는 영국 이름으로 GP3와 F2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잭 에잇켄 선수는 엄연히 영국 선수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한발 양보해도 한국계 스코틀랜드인일 뿐이라는 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 어머니를 둔 한세용 선수는 항상 레이스카의 자기 표시에 유니언 잭 옆의 잭 에잇켄과 함께 태극기와 한세용이라는 한글 이름을 표기합니다. 헬멧에는 유니언 잭과 함께 큼지막한 태극기가 디자인되어 들어가 있기도 하죠. 한글을 사용해 SNS에 자주 글을 쓰는 개인적인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GP3와 F2의 중계진은 잭 에잇켄이 언급될 때면 언제나 ‘브리티시 코리안’이라고 부릅니다. 리저브 드라이버 역할을 하는 르노 F1 팀과 현재 F2 소속 팀인 ART 그랑프리에서도 SNS에 잭 에잇켄을 얘기할 때는 유니언 잭과 태극기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한국계’라는 표현에 태클을 걸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F1에 가장 근접한 ‘한국계’ 드라이버 한세용 선수

물론 ‘국가’를 따지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F1 팬이 아니라면 ‘한국계’ F1 드라이버의 탄생에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고, ‘자국 선수’ 운운하며 애국심 고취를 얘기하는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로 들립니다. 더구나 F1과 같은 프로 스포츠라면 더욱 국적을 따질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서 보는 시각이라면 더더욱 국가를 강조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 코너에서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인 F1을 포함해 모터스포츠에서 국가를 강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F1은 드라이버는 물론 각 F1 팀, 심지어 개최지까지 국가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룹니다. F1 그랑프리 이벤트는 국가 연주로 시작해서 국가 연주로 끝나는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는 F1에서 정말로 국가라는 개념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다분히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F1 팬 중에는 제법 고전적 국가관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포츠에서 각 국가를 대표하는 드라이버 간의 대결을 실제 국가 간의 충돌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제임스 헌트와 오스트리아 출신 니키 라우다의 대결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영국 팬이 아주 많았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독일과 묶어 생각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면서 영국 팀의 영국 출신 드라이버에 대한 국수주의적 응원에 열을 올리곤 했습니다.

헌트와 라우다의 대결과 비슷한 반응을 여러 차례 목격한 F1이 점차 팬들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점차 상업적인 스포츠를 지향하며 변모하기 시작한 F1은 드라이버 사이의 갈등, 팀 간의 격돌을 종종 국가와 국가 간의 충돌로 포장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후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홍보나 마케팅은 F1이 자주 ‘이용’하는 아이템이었습니다.

F1은 순수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가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을 애써 숨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태도는 F1이 오히려 국가라는 관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국가’라는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던 많은 사람과 근본적인 가치관은 다르지만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F1 역시 그들과 비슷한 국가관을 가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조금 더 쿨하게 반응한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스위스 출신이지만 프랑스 국적으로 F1 챔피언십에 출전 중인 로망 그로장

우리나라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다수가 국가나 민족 등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국적 문제나 국민의 의무에 대한 문제 등이 과하게 심각하게 다뤄지곤 합니다. 특히, 어떤 스포츠의 국제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는 경우 선수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합니다. 그런 점에서 F1 드라이버들의 국가관은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일단 현역 F1 드라이버들 중 적지 않은 수의 드라이버가 다중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2중 국적은 매우 쉽게 찾을 수 있고, 3중 국적 이상의 다중 국적을 가진 드라이버들도 있습니다. 물론 F1에서는 각 드라이버가 ‘첫 번째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랑프리가 종료되고 시상대에 오를 때는 각자 하나의 나라를 대표하게 되어있지만, 그와 별개로 2중 국적 이상의 다중 국적이 흔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2중 국적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다양한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드라이버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디펜딩 챔피언이자 현재 F1 최고의 드라이버로 손꼽히고 있는 루이스 해밀턴의 경우 영국 단일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가 그레나다 이민자의 자손이라는 점을 들어 스스로 그레나다와 영국 두 나라를 모국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한세용 선수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실제 국적과 다른 나라를 F1에서의 국적으로 선택하는 드라이버도 있습니다. F1이나 모터스포츠가 어느 나라의 드라이버 라이센스로 그랑프리에 출전하느냐를 기준으로 국적을 따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하스 소속으로 활약하고 있는 로망 그로장 선수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스위스인이지만, 프랑스의 르노가 오랫동안 자신을 후원해줬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으로 F1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1970시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뒤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던 요헨 린트의 경우, 독일인이지만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워줬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F1 드라이버 중 적지 않은 수가 국적이나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국가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F1의 국가와 국적을 강조하는 마케팅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F1 팬들이라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오히려 여유로운 관전자가 되어 상황을 즐깁니다. 국가란 것이 여러모로 부정적인 개념으로 여겨질 여지가 있지만, 스포츠에 한정해 즐기는 아이템으로 삼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국수주의의 입장에서 국가를 내세우는 것은 반대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꼭 국가와 국적을 따지면서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한국계’ 선수를 응원하면서 한국인이 즐거워하는 것을 꼭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니긴 하고요. 무엇보다 한국계 F1 드라이버의 탄생 가능성 때문에 상품성에 민감한 한국의 자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가만히 있던 한국의 F1 팬들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갑자기 더 많은 즐길 거리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터스포츠 팬이라면 그 성향에 관계없이 기대할만한 일이란 뜻이죠.

게다가, 국가라는 꺼림칙한 관념을 즐길 거리로 소화해버린다는 것도 왠지 재밌어 보입니다. 국가라는 개념에 거부감부터 드는 사람이라면 F1 드라이버들의 가벼운 국가관처럼 그저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습니다.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F1인 덕분에 오히려 국가와 국적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아이러니도 펼쳐지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계 F1 드라이버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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