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중·민족운동의 요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승동교회, 백정 중심의 민중교회로 출발
        2018년 03월 12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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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1/ 어느 날 양반들이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선교사님, 우리 양반들에게 따로 앞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습니다.”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신분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닙니다.”

    *역사2/ 3.1운동 기념비, “3.1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

    *역사3/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곽안련 목사(알렌 클라크)는 여운형을 그의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임명하였고, 몽양은 5년간 승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이는 1893년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 담겨있는 역사입니다.

    3.1운동은 일제에 항거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혁명이자, 한국교회 역사를 혁신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는 기독교를 외래종교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거나 백안시하던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선봉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한 핍박과 희생을 목격한 민중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오히려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한국기독교의 역사Ⅱ』 P.40)

    승동교회(그림=이근복)

    당시 교세가 20만여 명으로 인구의 1.8%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은 그리스도교가 민족사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교회 지도자였다는 점 보다는, 독립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하는데 교회가 희생적으로 활동하여(피해자의 20%) 거점역할을 한 점을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합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일제 경무총감부에 독립선언의 사실을 통고했고 곧 구속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바로 시가행진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만세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승동교회의 역할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지하에서 청년면려회장 강원벽을 중심으로 경성의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 20여 명이 모여 3.1만세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날 승동교회가 교회적으로 참여하였고, 3월 14일에는 차상진 담임목사가 교우들과 ‘12인의 장서(청원서)’를 작성하여 총독에게 제출한 일로 인하여 투옥됩니다. 그후 승동교회는 계속 사찰을 받았습니다.

    승동교회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었지만 실은 백정들이 중심이 된 민중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완고한 신분제사회에서 백정 박성춘은 자식들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곤당골교회(승동교회 전신)에 나가게 합니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쓰러졌을 때,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극진히 치료합니다. 고종황제 주치의가 천민을 치료하였으니 사람들이 놀랐고, 그도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성춘이 승동교회에 출석하자, 양반들은 함께 예배할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들은 들락거리다가 선교부의 허락으로 북촌에 안동교회를 세웁니다(1909년). 1911년에 박성춘은 승동교회의 초대장로가 됩니다. 무어 선교사에게 신앙훈련을 받은 박 장로는 계급타파에 앞장섰고, 만민공동최의 연사로 나서기도 합니다. 아들 박양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한인 최초로 양의사가 되었고, 3.1운동 당시 만주 독립군 단체인 대한국민회를 크게 지원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딸이 성균관 박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의 동생인 신필호의 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승동교회 역사는 골곡이 많습니다. 1940년 4월 진보적인 조선신학교(한신대 신학대학원 전신)가 개교된 곳이지만,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될 당시, 세계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WCC를 진보와 자유주의라고 공격하며 참가를 거부한 합동측 총회가 모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계층, 이념, 지역 등의 간격으로 극심히 대립하는 오늘날, 제3지대를 추구한 몽양 여운형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곽안련 목사의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된 몽양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만나서 민족현실에 눈을 떠서 고향 양평에 교회당을 겸한 광동학교를 설립(1907)하였는데, 가나안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몽양은 평양신학교를 2년 다닌 후 신학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14년 난징 금륭대학에 입학하려고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독립운동에만 매진하였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커서 정치가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몽양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이끌었으나 권력을 장악한 보수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내몰렸고, 결국 1947년 백주 테러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올해 3월 1일, 집회와 강연에서 당시 영향력이 있던 일반 사회지도자들은 독립무용론이나 패배주의에 빠져 선언서 서명을 거부하였고, 결국 종교인들이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위해 작년에 시작한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은빛순례단’의 행사가 출발점인 승동교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은 승동교회가 전형적인 보수교회임에도 이런 행사를 교회마당에서 열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역사성 때문입니다. 행사 중 종탑 앞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1913년, 곽안련 목사가 현대식으로 건축한 교회당 벽의 빛바랜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역사의 흔적이었습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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