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에 대한 반란
[종교와 사회] Me-Too 운동을 보며
    2018년 03월 02일 09:46 오전

Print Friendly

요새 Me-Too 라는 운동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다. 좀 더 일찍 이런 운동이 일어났어야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일어나고 있으니 한편 다행이라고나 할까. 유명 작가나 연극인, 영화인, 심지어 종교인들까지 높은 권력과 권한의 자리를 이용해서 성폭력과 성추행이 비일비재했으니 우리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60년을 넘게 살아온 남자인 나로서도 ‘글쎄, 남자들이 원래 좀 그런 동물적인 어쩔 수 없는 성정이 있는 것 아닌가’ 하면서 은근슬쩍 남자들의 입장을 두둔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의 과거 문화가 그렇지 않았는가. 남자들이 여자 알기를 그냥 그 정도로, 대충 마음대로 쉽게 다룰 수 있는, 남자보다 좀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문화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늘 아들, 아들 하고 나를 키웠으니 내가 여자를 좀 무시하는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이번 미투 운동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는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담론들이 깨어져 나가며 오히려 부끄러운 것들이라는 것이 자꾸 들어나는 것이 사회가 더 발전해 나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Me-Too 든 You-Too 든 자꾸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깨트려 나가는 운동이 더 일어나야 사회는 더 공정하고 공평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21세기는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되는 시대이다. 과학의 발전이 바로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발전되어 오지 않았는가.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한편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역학을 당연시만 여겼다면 상대성이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 아니겠는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과학과 철학과 문학과 사상은 발전해 온 것일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이유이다. 북한의 김영철이 천안함 침몰의 책임자라고 불변의 진리로 믿는 자유한국당의 논리가 과연 그러한가 질문을 던질 필요가 그래서 있는 것이리라.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것이 21세기 포스트 인간 시대의 화두가 아닌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교적 진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어린 왕자로 살다가 어느 날 가비라 성의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만나,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인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산으로 간 것이다. 살고 죽는 당연한 자연스러운 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자 자기 자신을 부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바로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도 그런 뜻이리라. 현재 나의 자리를 당연시 여기지 않고 그 자리를 부인하면서 더 깊은 진리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하늘 하나님의 아들인 왕자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고등종교들이 주장하는 각자의 불변하고 당연한 교리적 진리라는 것도 과연 그러한가, 다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극락에 가고, 인간으로 환생할 것이고, 저렇게 하면 지옥에 가고 동물로 환생한다. 또는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복락을 누린다 등등 각자 주장하는 당연한 종교적 진리라는 것도 비판적 시각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천년, 이천년 전의 종교적 진리 체계를 무조건 다 수용하기에는 현대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며 다면적이다. 나치 정권에 대항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주여, 주여’ 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처럼 기독교를 값싸게 팔아버리는 이런 천박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비그리스도적인 종교는 이제 현대에는 한마디로 갖다가 버려야 한다고까지 했다.

‘무조건 믿으라’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칸트는 진정한 믿음이란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 여기는 신조나 신념의 체계들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신앙을 ‘회의적 신앙(doubtful faith) 이라고 하고 이것이 참 믿음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인간사회에는 당연히 해야 하는 윤리 도덕적 가치들도 사실 많이 있다. 그래서 진리 자체를 바라보아야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말도 생긴 것이리라. 불교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좌우, 여야 하면서 깊은 골짜기를 만든 한국사회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의미는 내가 이미 옳다고 여긴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 기준으로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다. 내 기준, 내가 믿는 종교, 가치관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 당연한 것을 부인하라는 말이다. 소위 말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바르게 분별하고 식별하는 비판적 사고를 하라는 말이다. 비판적 사고를 통해 보편적 진리의 자리에 들어가라는 의미다. 그래서 진리의 길은 어렵다. 더구나 종교적 진리의 길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 바른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도덕경 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대답해 준다 생각된다. 물처럼 다투지 않고 겸손히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만이 진정한 비판적 사고의 방법으로 더 깊은 진리의 자리에 들어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평화교회 목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