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에게 버림받은 '슬픈 또는 나쁜' 영화
        2006년 04월 05일 05: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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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사실과 100% 일치 할 수 없다. 하물며 역사가들조차도 역사란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고 말하는 판에 영화가 실제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바라는 건 너무 무리다.

    실제 사건이 영화로 옮겨질 때 작가인 감독은 자신의 시각과 강조점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 한다. 이 과정에서 취사선택이 발생하고 극의 전개를 위해 시간 순서가 뒤바뀌거나 아예 가공의 인물, 사건을 덧붙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창조’를 위한 ‘거짓말’인 셈인데, 하긴 얼마 전 타계한 백남준 선생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사기”다.

    드라마를 위한 손질, 다시 말해 ‘창조적 사기행위‘가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작가인 감독이 판단할 문제다. 다만 많은 경우 그런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감독이기보다는 외부의 자본이나 권력이다.

    전자는 대부분의 할리우드판 역사영화들이다. 이 경우 동기는 이윤이다. 할리우드식 표현으로는 ‘흥행’이다. 후자는 30년대 이후 소련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역사영화들이다. 이 경우 동기는 인민대중을 사상적으로 교화시키고 혁명영웅들을 칭송하는 것이다. 소비에트식 표현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타임머신 극장’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이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어떻게 현실이 재구성되는지 비교하고, 재구성의 이면에 숨겨진 힘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디에 숨겨뒀는지 모를 때는, 그냥 모르기로 하자.

    * * *

    첫 번째로 타임머신을 탈 영화는 1960년 할리우드가 만든 <스팔타커스Spartacus>다.

       
     

    이 영화는 이윤이라는 상업적 동기에 눈이 멀면 역사를 어디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지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 3시간짜리 영화는 ‘스팔타커스라는 노예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다’는 것만 빼고 모조리 허구다. 여기에 비하면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합리적인 학술행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죽하면 메가폰을 잡았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죽을 때까지 이 영화를 자기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영화를 가능한 사실적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시나리오에는 스팔타커스의 이름을 빌린 사람만 나올 뿐이었다. 만약 감독이 허용된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면 돈 많이 버는 기술자랑 뭐가 다르겠는가. 나에겐 <스팔타커스>가 그 증거”라고 고백했다.

    영화가 이 지경이 된 데는 스튜디오와 스타의 입김이 작용해서다. 제작을 맡은 유니버설은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겁이 나서 시나리오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주연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는 역사의식보다는 자신의 남성미를 과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영화가 허무맹랑하다는 비판이 줄을 잇자 1991년에 나온 복원판에는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문구가 추가됐다.

    우선 스팔타커스가 누군지 알아보자. 타임머신의 시계바늘을 기원전 73년의 이탈리아로 돌리면 우리는 로마 정예군과 반란군이 마주하고 있는 살벌한 풍경을 보게 된다. (원래 우리말 표기법으로는 스파르타쿠스가 맞는데 영화가 스팔타커스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했다.)

    이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는 지도자가 바로 도주한 검투사(글래디에이터!) 노예인 스팔타커스다. 스팔타커스는 3년 동안 로마를 공포에 떨게 만든 노예반란을 지휘했다. 초기에 검투사 중심이었던 그의 반란군은 나중에 도주한 일반 노예들까지 합세하면서 12만명으로 늘어났고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기원전 71년 크라수스에게 패했고 스팔타커스도 숨졌다.

    많은 역사가들은 당시 노예들의 반란이 로마 사회를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스팔타커스가 죽었을 때 로마의 지배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후배 반역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칼 마르크스는 평생 스팔타커스를 존경했다. 체 게바라도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스팔타커스단’을 만들었다. 1928년 소련이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경기대회의 이름은 ‘스파르타키아드’였다.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건 천만 다행이다. 체 게바라가 이 영화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봤다면 이렇게 중얼거렸을 거다. “아예 소설을 써라…”

    큐브릭 감독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스팔타커스가 로마의 용병이었다가 버림받고, 노예가 되는 과정을 그리려 했지만 별로 영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것으로 고쳐졌다. 영화 속 스팔타커스의 로맨스는 대부분 커크 더글러스의 요구로 추가됐다. 또 카이사르는 스팔타커스와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대중이 잘 아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영화에 등장했다.

    스팔타커스가 반란군의 유일한 지도자로 묘사된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는 여러 명의 반란 군 지도자들 중 한명이었다. 말하자면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절대적 지도자로 그려졌기 때문에 계속 반란군을 지휘하지만 실제로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한동안 반란군을 떠났었다고 한다.

    크라수스가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쫓았다는 묘사도 사실이 아니다. 영화 속 마지막 전투도 반란군이 로마군을 먼저 기습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로마군이 생포한 반란군에게 누가 스팔타커스냐고 묻자 너나할 것 없이 ‘내가 스팔타커스요’하고 나서는 대목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100% 허구다.

    실제 역사는 이렇다. 로마는 애초에 반란군을 한명도 살려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스팔타커스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생포한 6천명의 반란군을 모두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스팔타커스는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다. 전투 중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 반란 노예.

    하지만 영화는 스팔타커스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박히는 장면으로 끝난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에 매달린 스팔타커스는 마르크스가 존경했던 반역자의 모습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예수처럼 그려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할리우드가 힘을 쏟은 주요 작품들이 <벤허>, <십계>같은 기독교 선전영화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할만 하다.

    이처럼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욕을 지금까지 듣고 있는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매카시의 마녀사냥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유명한 할리우드 좌파 달튼 트럼보다. 그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영화 제작 전부터 미국 보수파는 상영금지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보수파는 달튼이 스팔타커스를 로마 지배계급에 맞서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로 묘사할까봐 두려웠다.

    이런 이유로 영화의 흥행을 걱정한 주연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후반작업 중 큐브릭 감독에게 작가 이름을 바꾸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했던 감독은 이 밉살스런 요구를 무시했고 트럼보의 이름은 영화 끝 자막에 그대로 올라갔다. 좌익 경력자들의 영화관련 취업을 가로막고 있던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가 현실적으로 무력화된 게 이 영화부터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비록 해방에 실패한 반란노예에 관한 영화지만 다른 영역에서의 해방에는 기여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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