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태백산맥 광산촌
    검은 산 검은 물, 그곳의 이야기
    [책소개] 『너는 검정』 (김성희(지은이)/ 창비)
        2018년 02월 10일 10: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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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 없는 방』 『오후 네시의 생활력』 등으로 한국만화계에 뚜렷한 획을 그어온 만화가 김성희의 장편 『너는 검정』이 출간되었다. 1980년대 사북, 고한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탄광촌 아이들의 성장기를 담은 작품으로, “독자적인 힘이 있는 작품” “’그래픽 노블’이라는 수식이 이만큼 어울리는 작품도 없다” “아리면서 묘하게 아름다운 작품”(이상 만화웹진 『유어마나』) 등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문제(『먼지 없는 방』), 3040 비혼여성의 삶(『몹쓸 년』 『오후 네시의 생활력』), 용산 참사와 철거민 문제(『내가 살던 용산』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장애아동 통합교육(『똑같이 다르다』)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주로 동시대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다루어온 김성희 작가는 『너는 검정』에서 처음으로 먼 과거를 다루며 더욱 깊어진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다년간의 철저한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강원도 산촌의 분위기와 생활상을 재현해냈다. 더욱 섬세하고 풍부해진 그림체로 그려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부침하는 사춘기 소년의 내면은 마치 한편의 대하소설을 읽은 듯한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

    1980년대 태백산맥 광산촌…검은 산 검은 물, 그곳의 이야기

    1980년대 태백산맥 깊은 골짜기의 탄광촌. 어른들이 탄광으로 일하러 간 사이 아이들은 광산에서 캐낸 석탄을 쌓아놓은 저탄장을 놀이터 삼아 뛰놀고, 서로 이유 없이 치고 박으며 싸우고, 용돈벌이 삼아 탄좌 노동조합 선거 홍보물을 돌린다. 방치된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친 생활방식을 닮아간다. 광산촌을 철없이 뛰놀던 주인공 ‘창수’에게도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매일 부지런히 돌아가던 탄광의 갱도가 붕괴하며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아버지는 진폐증에 걸려 광부 일을 그만두고, 단짝친구 남석이는 주정뱅이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태백으로 떠난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본 창수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엇나가고, 학교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올리면서도 비행을 일삼으며 답답한 탄광촌을 떠나는 꿈을 키운다. 어느 날 창수는 보충수업비를 불법적으로 인상해 뒷돈을 챙기려는 선생들의 계획을 알게 되고, 급우들과 함께 보충수업비 인상 반대를 외치며 수업 거부 운동을 펼친다.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불의에 맞서낸 창수는 짜릿함을 맛보지만 그것도 잠시, 학교는 창수에게 ‘빨갱이’ ‘좌경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여 창수를 퇴학시키려 하고, 결국 창수는 뜻하지 않게 고한을 떠나게 된다.

    시대의 소용돌이를 담다

    김성희 작가의 작품세계는 크게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문제를 다룬 『먼지 없는 방』, 용산참사와 철거민 문제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 등의 르포 만화와 삼사십대 비혼여성의 삶을 다룬 『오후 네시의 생활력』 『몹쓸 년』 등의 내면 만화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평해진다. 『너는 검정』은 두 세계에서 작가가 보여온 특장점을 모두 계승한다. 주인공 ‘창수’의 독백을 중심으로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나가면서도 주변 인물들을 통해 1980년대 탄광촌의 현실을 빼곡하게 기록해나간다.

    1980년 사북항쟁 이후 탄광촌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 석탄산업을 나라의 기간산업이라 선전하면서도 광부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갱도가 무너져 다리를 다치고 진폐증에 걸려 실직하게 된 광부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게 장사와 막일을 전전하며 가정경제를 이끌어나간 어머니, 가부장제하에서 폭군이 되어가는 큰형과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에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는 누나…

    시대의 소용돌이와 가난을 이기지 못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사춘기 소년의 내면은 더욱 뒤틀리며 시대를 닮아간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일인칭의 주인공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지면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창수는 성장하며 자신을 억누르는 가부장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뒤틀린 시대의 폭력을 내면화한다.

    독보적인 감성의 글쓰기와 더욱 깊어진 그림체의 결합

    『너는 검정』에서 김성희의 함축적인 글쓰기는 빛을 발한다. 『검은 물 검은 산』이라는 제목으로 케이툰에서 연재(2016.4.~2017.2.)할 당시 “소설의 서사를 에세이의 문체로 시의 리듬 속에 풀어”(『유어마나』 DCDC)낸다는 평을 받기도 한 작가 특유의 글쓰기는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사려 깊게 표현해낸다. 거친 욕설과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가 오가는 사이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잠언처럼 들리는 창수의 독백은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작가는 기존과 사뭇 다른 그림체와 스타일을 통해 한층 더 깊어지고 넓어진 작품세계를 구현해낸다. 혼돈스럽게 흩날리는 선은 잿빛 먼지가 가득한 태백산맥 탄광촌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배경 묘사와 대조적으로 인물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듯 굵고 짙은 선으로 한껏 외양이 왜곡되어 있다. 불안한 듯 떨리는 작가의 펜선은 사춘기 소년의 불안감과 시대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전달하는 듯하다.

    작가는 끝내 고한을 떠나는 창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창수처럼 학교를 이탈하든, 살던 커뮤니티를 이탈하든, 한국을 떠나든, 거침없이 이탈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사회에 염치가 있다면, 이탈자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책 없이 집을 나선 창수들에게 사회가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의 주변부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작품을 이어온 작가다운 말이다. 『너는 검정』으로 한층 성숙한 작품세계를 구축해낸 작가가 다음에는 어떤 곳을 바라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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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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