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언어의 위계질서
    절대강자 영어와 외국어의 등급들
        2018년 01월 29일 02: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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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언어에 아주 민감합니다. 인생의 거의 절반을 출생국이 아닌 여러 곳에서 살고, 늘 주위에서 모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을 들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직업적인 관심사일 수도 있죠. 저는 1996년부터 몇 개월간 잡은 제 첫 직장은 바로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국립인문대에서의 조선어 교원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국내에 가서 반대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그 뒤로는 노르웨이에 가서 첫 6년 동안 또 조선어를 가르치고…

    언어를 안 가르친 지 벌써 12년째지만, 그래도 여전히 언젠가 할 수도 있는 직업적인 일 중의 하나로 느껴집니다. 좌우간, 언어에 민감한 이상, 어딜 가도 늘 그 곳의 “언어적 위계질서”가 무엇인가에 대해 속으로 궁금하게 됩니다.

    가령 노르웨이만 해도 물론 누구나 노르웨이어의 가까운 친척언어인 영어를 대충이라도 다 잘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영어 구사력의 사다리”는 분명 있긴 하죠. 예컨대 노르웨이 고급관료나 대기업 임원, 대학 교원들의 영어는 아예 영국인으로 오해 받을 만큼 캠브리지의 교실에 들어가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영어죠. 한데 노동자나 수공업자 같으면 영어회화를 물론 해도 어려운 단어를 잘 못 알아듣는 등 어휘력은 좀 모자라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과는 비교할 수 있는 정도야 아니지만, 나름의 “사다리”는 있긴 하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영어 구사력의 위계질서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어라는 건 한국에서는 더 이상 “외국어”라고 부르기도 어렵죠.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자본이 바로 영어 구사력이라면 이건 벌써 “외국어”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언어/문화생활의 일부분입니다. 조선왕조 시절에 한문이 외국어가 아니었듯이 말이죠.

    영어는 아주 특별한, 일종의 현대판 “내지어” 와 같은 위치를 누리고 있지만, 외국어들은 그 뒤를 이어 정확하게 줄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줄”, 즉 각종 외국어들이 내표하는 문화자본의 “가치”의 위계는, 시간과 함께 바뀌기도 합니다.

    1970년대를 한 번 생각해보시죠. 영어야 이미 그때도 외국어라기보다는 신분을 나타내는 필수불가결의 문화자본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영어만큼은 아니지만 영어에 가까운 높은 위치를 점하는 건 바로 일어였습니다. 다까끼 상을 위시한 당대 집권자들이 일어로 교육 받아 성장하며 일제시대 관념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기들끼리 일어로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었습니다. 개발주의 노선의 모델은 과거의 만주국이나 50~60년대의 반쪽통제경제의 일본이었으며 일본은 한국에서의 최대투자국이었습니다. 기술이전도 상당부분 일본을 통해 이루어지고 단기 방문자 중에서도 일본인들은 대다수이었습니다. 뭐, 약 199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에서도 반체제적 지식전달의 최고 수단은 바로 일어이었는데 말이죠…

    일어 그 다음에는 가장 높은 위신을 과시했던 언어들은 식민지 시대와 다르지 않게 독어 및 불어이었습니다. 명치시대 표현대로 “문명의 언어”들로 인식됐죠. 크게 봐서는 일어와 영어의 위치가 바뀐 게 유일한 차이였지, 식민지 시대의 언어적 위계질서는 상당부분 그대로 남은 셈이었죠.

    2010년대, 즉 오늘날 같으면 영어의 절대적인 위치는 가일층 강화됐지만, “일-불-독”의 위계질서에서는 상당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일”은 “중”으로 교체됐다고 봐야 합니다. 이미 동아시아의 경제적 패권은 중국으로 옮겼고, 무역국가인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변화에 엄청 빠르게 발맞추죠. 그다음에 영미권 중심의 글러벌리즘 시대인 만큼 “불-독”이 가졌던 “문명의 언어”라는 위신은 거의 희박해질 대로 희박해진 셈입니다.

    외국인생활안내서(베트남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사진=오산시청)

    무역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 나라에서는 외국어의 서열은 인제 “문화적 위신”과 함께 “경제”에도 좌우되며, 독일은 아무리 “경제대국”이라 해도 한국과의 무역총액으로 봐서는 호주보다 두 배 적을 정도로 비교적 중요하지 않죠. 그러니까 독과 불, 러까지는 “위신은 좀 있어도 활용가치가 낮은”, 일종의 2등 외국어로 전락된 셈입니다.

    그런데 경제적 활용가치도 절대 “다”가 아닙니다.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베트남은 한국의 제5, 6위 무역파트너로 부상돼도 베트남어가 문화자본으로서의 높은 위치를 점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국내 체류 베트남인은 15만명이나 되고 독일, 프랑스인보다 훨씬 많지만, 한국 지배층의 완고한 “탈아입구(脱亜入欧)적인”, 유럽 중심주의적인 문화의식이 그대로인 만큼 전국에 독어독문과는 베트남어과보다 여전히 훨씬 많습니다. 또 한국기업들이 아무리 캄보디아나 방글라데시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그 나라 출신들이 아무리 국내에 많이 와 있어도 크메르어나 벵골어는 국내인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는 한국 지배층의 “내지어”며 중-일어는 “1등 외국어”, “독-불-러-서”는 “2등 외국어”라면, 한국과 관계가 실질적으로 가장 활발한 동남아시아의 언어들은 아예 “등급”도 붙이기가 힘들죠…

    탈아입구(脱亜入欧)적 사고를 우리가 언제쯤 극복할 수 있을까 싶어요. 1960~80년대 재야 지식인들에게 제3세계 연대론적인 사고는 상당히 있어 보였지만, 한국이 준핵심부에 편입된 1990년대 초반 이후로는 “제3세계 연대론”에 대한 관심은 거의 꺼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이 오만한 “준(아)제국”이 된 건, 너무나 아쉽고 마음 아픈 일이죠….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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