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에 흐르는 묘한 긴장”
    By tathata
        2006년 03월 31일 09: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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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남동지역공단의 한양감속기업. 전 직원 270여명 중 170여명이 조합원이다. 한국노총 소속 노조이고, 노조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여 조합원의 복지와 노동조건 개선, 임금단체협상 등이 활발하게 진행돼온 곳이다.

    “민주노총 조합 생길까 막연한 두려움 있어요”

    하지만 복수노조 시대를 1년여 앞두고 노조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 따로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상황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최인식 노조위원장은 “아직 어느 조합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민주노총 조합이 생기는 것도 배제할 수 없어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민주노총 노조가 생겨 조합원이 노조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되고, 그것이 노조 간의 선의의 경쟁으로 이어져 노조의 힘이 현재보다 강하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라고 생각한다.

    “더 걱정스런 것은 회사가 관리사무직 노조 만드는 겁니다”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회사가 관리직 ` 사무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조를 설립하게 될 경우라고 지적한다. “회사가 관리직 중심의 새 노조에 교섭권을 우선적으로 부여하게 되어 생산직 노조가 교섭이 불리하거나 교섭권을 박탈당하게 될 경우 노조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는 것이다.

    창원 지역의 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복수노조가 된다고는 하는데, 그게 우리에게 도대체 영향을 미칠지 도통 알 수 없다. 뭔가 바뀌는 것은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고 대응해야 하는지 갑갑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조합원이 피부로 느끼는 분위기는 이와 비슷했다. 노동 현장의 대응은 아직 더디거나, 혹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레디앙>은 조용한 현장들 가운데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어 미래를 예감할 수 있는 현장을 중심으로 취재했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2007년

    12년째 무분규를 기록하고 있는 울산 현대중공업노조.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죽음 앞에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해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제명된 이후 현재까지 상급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 현대중공업노조가 지난 2월 대의원 수련회를 개최하고 있는 모습.ⓒ현대중공업노조
     

    최근에는 노조 임원의 금품수수 비리사건이 발생했다. 87년 ‘골리앗 투쟁’으로 민주노조의 깃발을 휘날렸던 현장에는 이제 고용안정과 정년연장을 희망하는 평균 근속년수 18.5년의 ‘늙은 노동자’들이 있다. 한 조합원의 푸념처럼 “사고로 사람이 죽어나가도 노조가 산재처리 적용을 요구하거나 작업장 환경 개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지금 현중노조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임원선거에서 ‘전노회’(현장 조직 이름)의 민주파 후보가 43.6%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물론 40%대의 지지가 곧바로 전노회의 지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현 집행부와 회사측에 대한 불만에 대한 반사표가 많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지만, 변화를 감지하기에는 충분한 수치다. 김형균 전노회 의장은 “고립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하고 대책을 세우는 등 민주노조를 복원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7년 노조민주화 추진운동이 20년을 지나면서 2007년에는 복수노조 체제의 민주노조 건설로 그 형태가 변화된 것이다. 김의장은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기대감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자동차 노조 “분열은 공멸, 조합원도 잘 알아”

    현대 자동자 노조의 경우 외부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조 집행부나 다수 활동가들은 복수노조 설립의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고 있다. 올해로 근속년수 15년째의 한 현차노조 조합원은 “현장이 분열돼 있다고는 하지만 민주노조의 단결을 져버릴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라며 “흩어지면 공멸이라는 정도는 조합원들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 현대자동차노조가 지난 8월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노조는 올해를 ‘산별노조 전환의 해’로 선언하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현대자동차노조
     

    하부영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도 “노조가 분열되면 이는 곧 조합원 자신들의 기득권 저하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회사의 사주를 받아 제2노조를 설립한다는 것은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용남 현대자동차 노조 정책2부장은 “오는 6월에 실시되는 금속연맹의 산별전환 총투표가 복수노조 시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조업 사무직 노조 가능성 높아져

    기아자동차 과장급 이상의 관리직 노동자들은 지난해 2월 금속노조에 가입해 기아자동차사무관리직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이 노조를 설립한 배경에는 2004년 11월 기아차가 과장급 이상 사원 104명을 대기발령하고 사직을 강요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기아차 내에는 이미 기아자동차노조가 존재하지만, 단체협약에 의해 과장급 이상의 노동자는 가입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그래서 이들은 기아차관리직노조를 결성해 금속노조에 가입한 후 금속노조 기아차관리직지회로 활동하고 있다. 금속노조에 직접 가입하게 되면 현행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아차관리직지회 외에도 지난 1월에 현대자동차 관리직 노동자 20여명이 금속노조에 가입했으며, 지난해 12월에 창립한 대우버스사무직지회 160여명 조합원도 금속노조에 가입한 상태다.

    ‘어용노조’의 길도 열린다

    복수노조는 노동자에게 단결의 자유를 열어놓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용자가 지배 ․ 개입한 노조를 설립할 ‘자유’ 또한 열어놓는다. 어용노조 설립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과기노조 산하 산업기술평가원지부는 지난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경고파업을 단행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체교섭에 성실히 임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자는 것. 산기평지부는 과기노조의 단협요구안을 가지고 교섭을 요구했으나 평가원 쪽은 “이미 다수 근로자가 가입한 산기평노조와 단체협상을 맺었는데, 소수에 불과한 산기평지부와 또 맺으라는 거냐”며 “다수에 맞춰 소수가 따라가야 것 아니냐”고 성실교섭을 거부했다는 것이 지부 관계자의 말이다. 산기평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름도 생소한 ‘1사 1단협’의 원칙.

    단일노조였던 산기평지부에 산기평노조가 생긴 것은 지난 2004년 9월. 산기평지부 조합원 69명이 지부를 탈퇴한 뒤 재가입을 신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임시총회를 개최해 산별노조에서 기업별노조로 조직형태를 전환했다.

    산기평노조는 강남구청에 노조설립을 신고했으나, 산기평지부는 산기평노조가 회사의 지배 ․ 개입에 의해 설립되었고, 산기평지부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어 무효하고 주장했다. 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은 모두 산기평지부에 손을 들어주고 강남구청은 설립필증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산기평 측은 산기평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산기평지부와는 불성실 교섭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형수 산기평지부장은 “법원판결로 산기평노조가 회사의 지배 개입에 의해 만들어진 노조임이 판명 되었으나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초 산기평지부의 단체협약 내용 중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호조치, 산업기술평가원의 사회적 책임과 회계 투명성 등이 회사를 내내 불편하게 만들어 직접 노조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1년에 2조원에 이르는 국가예산을 관리하는 평가원에게 이는 당연한 요구였다”며 “회사가 내부 고발자를 도려내고, 마음대로 예산을 주무르기 위해 노조를 설립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 107명의 산기평지부 조합원은 현재 25명으로 줄어들었고, 이들은 대부분이 산기평노조로 이전했다.

    비정규직 조직화 상대적으로 유리

    복수노조가 되면 정규직 노조의 조직대상 제한으로 인해 그동안 노조설립이 어려웠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노조설립이 가능해진다.

    한국전력의 전화상담원 노동자 70여명은 지난 8일 한전 서울본부 로비 앞에서 밤샘농성을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아웃소싱계획을 철회하라는 것이다. 한전은 ‘고객센터 운영의 전문화 및 선진화로 경영효율성 제고’라는 명목으로 기존에 비정규직으로 고용했던 노동자를 일종의 도급형태인 아웃소싱으로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 한국전력 전화상담원 노동자가 지난 3월 ‘아웃소싱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참세상
     

    이에 전화상담원 노동자는 노조설립을 결의하고, 해당관청에 설립신고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유는 이미 한국노총 소속의 한전노조가 있기 때문에 복수노조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결국 전화상담원 노동자들은 ‘법외노조’로 파업에 돌입해야만 했고, ‘정당한 파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전 측은 계속해서 “민 ․ 형사상 책임을 묻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조합원을 협박했고, 전화상담원 노동자들은 강제적으로 아웃소싱을 통한 고용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 딴 나라 얘기

    마포구청에서 수 년 째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씨(42)는 “복수노조? 그 사람들 얘기지. 노조 만들면 이 자리도 잘릴 게 뻔한데 누가 그런 위험한 일을 발 벗고 하겠냐”며 말도 꺼내지 말라는 분위기다. 올 해로 3년째 대구의 한 기업체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강아무개씨(30)는 “연말이 되면 재계약 여부를 노심초사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냐”며 손사래를 쳤다.

    중소 ․ 영세사업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17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서울의 한 인쇄 매체회사. 사장과 관리직 간부 2명을 제외하고 14명이 조합원이다. 이 회사의 한 조합원은 “우리 노조가 둘로 갈라진다는 얘기는 노조 그만 접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희한한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이다.

    다른 소규모 사업장에서도 비슷한 반응이다. “이견이 있으면 술로 풀고, 사장이 딴 노조 설립할리도 없겠지만, 설사 하더라도 뻔히 다 보이는 판에 복수노조는 뚱딴지”라는 게 공통된 말이다.

    위에서 열거한 사례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복수노조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일례들을 모은 것으로, 현장에서는 복수노조가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미 균열은 조금씩 틈을 벌이고 있었으며 노동운동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부영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의 말이다.
    “복수노조 때문에 노동운동이 망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내부의 분열이 문제이며 노동운동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새우지 못한 채 노동자들이 단결투쟁의 필요성을 망각하는 것이 문제다. 복수노조는 대세이며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 복수노조 시대를 노동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조직의 건설로 세를 확대하며 조직률을 일정부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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