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울의 평화적 고립
    [낭만파 농부] 눈 덮인 날의 화암사
        2018년 01월 22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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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개] 눈 소복이 쌓인 오후엔 무얼 하세요? 넋 놓고 창밖 설경을 내다보나요? 혹, 눈덩이 굴려 눈사람이라도 만드시나요? 사실 말이지… 이번 겨울엔 너무 자주 내려서 이젠 심드렁하죠.
    그럼 이건 어때요? 눈 속에 파묻힌 화암사 나들이! 느낌이 오세요?
    그럼 함께 가요. 눈 쌓인 오후에~ 일기예보가 맞다면 모레(10일, 수요일) 오후가 되겠네요. 다들 짬을 내시고, 잠깐 일손을 놓으시고~ 아, 땡땡이도 환영^^ 눈 쌓인 수요일 오후에 만나요!!

    동네 ‘톡방’에 그 이틀 전 올린 메시지다. 다행히(?) 예보가 들어맞았고, ‘대설주의보’까지 떨어졌다. 느낌으로는 6~7년 만의 큰 눈이지 싶다. 이번 겨울 들어 몇 차례 내리긴 했지만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다.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언젠가 일본영화 <설국>에서 본 어마어마한 눈사태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발을 묶어두기엔 충분했다. 마을 어귀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2백 미터 남짓한 비탈길이 꽤 가팔라 차량이 나다니기 어려운 탓이다. 그나마 전날 동구 밖 도로가에 미리 차량을 내다 세워 둔 덕에 직장에 다니는 두 이웃은 낭패를 모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눈이 수북이 쌓였으니 예고한 대로 겨울 산사 나들이를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동네 톡방.

    [화암사 나들이] 예보대로 눈이 많이 내렸지요? 온통 하예요. 햇볕이 좋긴 하지만 많이 쌓여 쉬 녹지는 않을 듯 하고요. 해서 조금 뒤 예정대로 눈 속에 파묻힌 화암사로 떠나려고 합니다~

    아침부터 눈 쌓인 도로를 따라 엉금엉금 출근전쟁을 치른 직장인들의 눈총과 부러움을 뒤로 하고 읍내 주차장에 모인 인원은 열 명 남짓. 대부분 나처럼 농한기를 지나고 있거나 직장에 매이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놀랍게 ‘땡땡이’를 친 경우도 있었다.

    절간으로 오르는 계곡 길은 그리 험하지 않은데다 장관을 이룬 설경까지 더해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건축물을 이루는 기둥과 벽, 나무 구조재를 빼고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 작은 절간. 바람까지 불어와 풍경소리 황량한 적요. 수목이 쌩쌩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시원의 세계. 추위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 거스를 수 없는 묵언의 울림. 미처 가늠하지 못한 기운이 거기 있었다.

    눈은 쉬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외등을 밝힌 창밖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눈 덮인 산 속을 헤매던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금방이라도 창문을 두드릴 것 같은 느낌. 어느 순간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섰는데…”로 시작하는 동요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래, 밥벌이 하러 갈 일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나다닐 곳도 없는 농한기 농사꾼 아니던가. 스스로 산문을 걸어 잠그고 고립 속의 평화를 맛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면벽수행 삼매경에 빠질 것은 아니니 토끼가 찾아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하지만 ‘평화고립체제’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전해줄 게 있노라고, 집으로 통하는 진입로가 눈으로 막혔다 하여 지금 마을 어귀 찻집에 머물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발목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헤치고 동구 밖 찻집까지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언제 보아도 정갈하게 꾸민 방안, 통창 너머로 아름다운 은세계가 펼쳐 보인다. 따끈한 쌍화차 한 잔으로 몸을 덥힌 뒤 판화작품 한 점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가 삽살개한테 뭔가를 속삭이는 그림이다. 황금개띠 해를 맞아 건네는 선물이라고 했다.

    거의 때를 같이해 서울 사는 벗한테서도 기별이 왔다. 이 쪽에 문상할 일이 생겼으니 내려가는 길에 들러도 되겠냐고. 여부가 있나. 다시 동구 밖으로 걸어 나와 이번엔 승용차를 타고 30키로 남짓 떨어진 익산의 한 장례식장을 향했다. 노면에 눈이 쌓인 구간이 있어 거북이운행을 피할 수 없었다. 벗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밤이 깊었다. 그새 꽤 격조했던 터라 이슥토록 주거니 잣거니 한 술잔이 꽤 되었다.

    이튿날 아침, 그가 일찌감치 길을 떠난 뒤로 또 찾아든 토끼는 없었다. 눈도 더는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따사로운 햇볕이 높 덮인 들녘을 내리쬐니 쌓였던 눈은 시나브로 녹아내렸다. 이윽고 차도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도 풀렸다. 네댓새만이지 싶다.

    고립된 동안에 들여온 건 없고 먹어치우기만 했으니 이것저것 꽤 바닥이 나 있다. 눈 녹은 차도를 시원스레 달려 읍내 가게로 장을 보러 나가는 기분이 어찌나 상쾌하던지. 차장 넘어 흘러드는 공기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네댓새의 짧은 고립에서 풀려나는 것도 이리 반가운데, <설국> 속 몇 길이나 쌓인 눈이 녹을 즈음 니가타 사람들이 느낄 해방감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풀기에는 이르다. 지금도 한겨울, 봄은 멀었다. 농사꾼의 진짜 새해, 설도 아직 달포를 기다려야 한다. 긴장 풀지 말아야겠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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