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
    ‘너는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③
        2017년 12월 19일 11:01 오전

    Print Friendly

    앞 회의 글 “방황하는 또 다른 나에게의 편지” 링크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

    어떤 사안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면 현상 유지를 원하는 사람은 “그럼,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다. 좀 머뭇거리면 “대안도 없으면서……”라면서 현상 유지가 답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 지배 세력은 항상 “그럼 대안이 뭐냐?”고 물어왔다.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문제는 많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현상 유지의 반대편 모습은 대안 없는 혼란과 무질서로 묘사된다.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 제기와 질문을 막는다. 일종의 폭력이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원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올바른 정답이냐를 놓고 논쟁한다. 그런데 경쟁적으로 제출하는 무수한 정답들은 서로 소통하고 공명하기보다 감정적인 논쟁만 평행으로 달리다가 힘없이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정답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답은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한다.’, ‘조직해야 한다.’, ‘투쟁해야 한다.’, ‘연대해야 한다’라는 걸로 요약되고 구호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이 당연한 정답을 실행에 옮기려는 의지의 일관성과 단호함이 없다고 상대를 비판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정답인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판받는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에 힘을 쏟는 것이 정답인데 이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받는다.

    이렇게 주어진 정답은 평가와 비판의 잣대로 작동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닐까?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멋진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또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 라는 사실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배고파도 도둑질을 하지 못하고,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배계급의 억압 장치를 지적하고자 던진 질문이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구조 밑바닥에 깔려있는 대중의 심리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다. 그러면 빌헬름 라이히의 질문을 비틀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한국 사회의 가난한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왜 싸우는가가 아니라, 착취당하고 고통 받는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왜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우지 않는가? 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왜 투쟁을 하고, 그 투쟁이 왜 정당한지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관심과 연대를 호소해 왔다.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다수 가난한 노동자들이 ‘왜 조직하고 싸우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대로 조직하고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그동안 던졌던 정답이나 당위를 질문으로 바꿔 보는 것은 어떤가?

    첫째,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는 정답과 당위는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왜 스스로 조직하고 싸우지 않는가?’로.

    둘째, ‘노동조합 조직률을 높여야 한다’는 정답과 당위는 ‘왜 노동조합은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조직적 무기가 되지 못하고 있는가?’ 또는 ‘노동조합은 과연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가?’로.

    셋째, ‘민주노총은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정답과 당위는 ‘왜 민주노총은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가?’로.

    넷째,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과 연대해야 한다’는 정답과 당위는 ‘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는가?’ 또는 ‘어떤 상황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가?’로.

    질문은 논쟁을 촉발시키고, 소통의 물꼬를 트게 하고, 해답을 찾으려는 다양한 노력을 하게 만든다. 제대로 된 질문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자극한다. 정답은 미리 주어지거나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소통과 논쟁, 그리고 실천 과정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하나의 정해진 답에 의문을 품지 않는 강한 신념 체계는 일시적으로는 힘이 될지 모르지만 얼마 안 가서 변화의 힘을 상실한다. 지금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모든 주어진 정답을 의심할 수 있는 진실한 회의주의자가 절실한 때이다.

    관료적 관성에서 벗어나기

    선종에는 말을 탄 사람의 우화가 전해진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기에 말을 탄 사람은 어딘가 중요한 곳에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길가에 서있던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그러자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말에게 물어보시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을 타고 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을 멈출 수도 없다. 말은 우리를 끌고 가는 습관의 힘으로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다.

    역사가 오래된 노동조합일수록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인다. 선거, 단체교섭, 파업과 집회, 각종 회의……. 매년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 역사가 오래된 노동조합일수록 잘 정리된 매뉴얼이 있다. 그리고 그 매뉴얼을 잘 아는 경험 많은 간부들이 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오랜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그 매뉴얼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에는 활동가는 점점 줄어들고 반복적인 일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만 늘어난다.

    관료주의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동안 해왔던 관성대로 사업을 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관료주의는 창조적인 발상과 변화를 귀찮아하고 심지어 적대시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명상의 한 측면인 ‘사마타samatha’는 ‘그치다止’는 뜻이다.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사유와 실천의 관성을 끊어 내는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사찰에서 진행했던 위빠사나 수행에 참여한 적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신문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을 끊어 내고, 묵언하면서 오로지 나의 몸과 마음의 변화만을 관찰한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관성과 타성에 그저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 한번 달리는 말에서 내려서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도 한국GM에서 다른 활동가들과 비슷한 패턴으로 노조 활동을 했다. 현장조직에 속해서 활동하고 임금 인상 투쟁을 하고 선거 때가 되면 선거운동을 했다. 주로 정책이나 홍보의 역할을 맡고, 특히 홍보물을 쓰는 책임, 속칭 ‘글쟁이’ 역할을 맡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조선일보>의 한 칼럼을 보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는 칼럼으로 기억하는데, 글을 쓰는 방식이나 문체가 상당히 낯이 익다고 느꼈다. 전체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격 대상의 약점을 잡고, 그 약점을 침소봉대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속한 현장조직의 입장에서 집행부를 공격할 때나, 선거 때 다른 후보를 공격할 때의 글쓰기 양식하고 정말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다른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남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그때의 각성이 철학과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했고, 일기도 쓰고 블로그도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관성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유와 실천 방식의 회로에 갇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회로 안에서 정말 중요한 일도 많고, 그 일을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다들 바쁘다. 1만4,000명의 조합원이 있는 한국GM 노동조합을 유지 운영하는 데 얼마나 할 일이 많겠는가? 민주노총 역시 관행적 실천을 유지하는 것, 기존의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말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회로 안에서 모든 일들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차이 없는 반복, 헐벗은 반복이 끊임없이 지속된다.

    ‘몸 살림’이라는 자기 몸을 치유하는 운동이 있다. 몸 살림에서는 아픈 곳을 찾고 몸을 아픈 방향으로 움직인다. 관성적으로 움직였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움직인다. 그러면 무척 아프다. 그 아픔을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픔으로써 치료된다. 운동이란 자신의 약점, 아픈 곳을 찾고 그곳에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픈 곳이 바로 관성적인 몸놀림이 반복되던 곳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타원의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발견한 케플러라는 천문학자가 있다. 그런데 케플러도 당시 모든 사람들처럼 행성은 원 모양의 궤도를 따라 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 동안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 튀코라는 천문학자가 죽으면서 물려준 관측 자료가 제자였던 케플러 손에 들어왔다. 케플러는 그 관측 자료로 행성의 완전한 원운동을 증명하려 했지만 관측 결과는 계속 어긋났다. 결국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타원 운동을 전제로 관측 자료를 맞춰 보았고 완벽하게 일치했다. 만일 케플러가 행성의 원운동이라는 관성적 사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관측 자료를 폐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관성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관성적으로 어떤 활동을 반복하다 보면 특정한 사유 패러다임에 갇히게 된다. 그 패러다임에 갇힌 채 의심을 품지 않으면 뻔히 보이는 경험적 사실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얼마 전에 민주노총 금속노조 임원 선거가 있었다. 많은 활동가들은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금속노조 임원 선거에 관심이 적고 각자 자신이 속한 사업장 출신에게 표를 몰아주는 ‘묻지 마 투표 성향’을 개탄했다. 하지만 그동안 모든 선거운동 진영이 조합원들의 이러한 ‘묻지 마 투표 성향’에 의존하거나 이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전국적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정파 조직들은 조합원 수가 많은 현대, 기아, 한국GM 출신으로 임원 후보를 구성해서 선거운동을 한다. 선거운동은 각 후보 진영이 내세우는 공약이나 주장, 후보의 자질보다는 대공장 표를 모으기 위한 후보 전술과 정파 조직을 통한 선거운동원의 동원이라는 선거 공학에 따라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표가 적은 비정규직, 여성,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대표성은 철저히 무시가 된다. 민주노총 선거나 여타 산별 노조들의 선거 성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조합원 직접 투표로 대표자를 뽑는다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에 안주한 채 대의제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던 관성적 사유, 관성적 실천이 반복되어 온 결과이다.

    관성이 된 자본주의적 사유 방식은 너무 강력해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세계에 대한 어떠한 상상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수구보수 언론은 재벌 총수가 구속되면 그 기업이 곧 망하기라도 할 듯이 호들갑을 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장이 기업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은 고용돼 일을 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그 기업을 직접 운영할 수는 없을까? 국내외적으로 노동자 자주 관리와 협동조합적 소유 등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성적 회로에서 벗어나 뭔가 창의적인 일을 찾아나서는 것은 정말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노동사업, 사회사업이라고 부르지 않고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창조와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닌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30년을 지배해 온 뿌리 깊은 관성이 있을 것이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들은 충분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관성에서 벗어나고 고정된 패러다임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이 처한 현실에 강한 의문을 품어야 하고, 낯설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11월 30일 한국지엠 부평,창원,군산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부평공장 앞에서 비정규직 우선해고 중단과 총고용보장을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낯설게 만들기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빅토르 위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책을 써 보겠다고. 사람들은 묻는다. 무슨 책? 회고록? 아니면 노동자 교육용? 나는 답했다. “나의 고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라고. 책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나는 자신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과연 노동운동에 대해서, 노동조합에 대해서, 동료 노동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많은 시간을 접하고 경험했다고 과연 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하면 질문이 없고, 질문이 없으면 고민이 없고, 고민이 없으면 현실을 이해할 수 없고, 결국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대상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나의 지난 활동도,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사고방식도 모두 낯설게 바라봐야 한다. 외부 연구자들이 연구를 위해서 공장 현장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면접, 설문, 비교 연구, 상상력 등 많은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반면에 그 공장 현장 안에 있는 사람이 그 현장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익숙함의 늪에서 나와서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낯설게 만들기는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그 현실은 낯설게 다가온다. 내가 공장을, 노동조합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 때문이다. ‘어떻게 노동조합 현실이 이렇게까지 되었지?’, ‘너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물음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면서부터 그 동안 나의 삶의 전부였고,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노동조합 활동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스물일곱에 대우자동차에 입사해서 30년을 근무한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나는 두 번 해고되고, 두 번 구속되고, 또 두 번 복직했다. 함께 싸우고 함께 구속되고, 함께 복직 투쟁했던 많은 동료들이 있다. 치열하게 함께 싸웠던 선배, 동료들은 정년을 앞두고 있고, 젊디젊던 후배들도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간다. 그리고 가만히 노동조합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는 뜨거운 열정에 가득 찼던 선배들이나 동료, 후배들의 옛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 과거의 열정과 패기에 넘치던 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세상일에 냉소적이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지금 내 앞의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의 모습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눈다. 우리 둘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만나서 결혼했다. 아내는 말한다.

    “결혼할 때는 노동운동을 하려면 많은 걸 희생하면서 어렵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운동을 안 한 애들보다 더 잘살아.”

    연탄불 갈며 살다가 기름보일러 때는 반지하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 삶을 사랑했던 20대 후반의 나와 내 아내가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우리 삶을 너무나 낯설게 바라보지 않을까?

    낯설게 만들기는 단지 인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중요하다.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 바로 싸워야 할 대상이고 바꿔야 할 대상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너무나 익숙한 자본주의적인 삶을 낯설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노동운동의 변화를 고민한다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 엉켜 있는 익숙함의 뿌리에서 몸을 빼내고 외부를 향해 움직이면서 지금과는 다른 무엇을 꿈꾸어야 한다. 자신이 접하는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속)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