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 우리는, 지금 우리는
    전문노련 창립 30년 기념행사 열려
        2017년 10월 18일 04: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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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과거는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제조업만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조합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선두에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약칭 : 전문노련)이 있다.

    전문노련은 현재 공공운수노조를 만들어 온 중심 중의 하나다. 87년 노조 결성 직후 끊임없이 연대를 모색해 온 정부출연기관, 경제사회단체, 엔지니어링 등 전문기술분야의 노동자들은 88년 7월 16일 연구전문노동조합협의회, 89년 10월 14일 전문노련, 그리고 97년 7월 3일 공익노련(전국공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후 공공연맹을 거쳐 지금의 공공운수노조로 발전해 왔다. 과거 1만 7천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한 전문노련은 현재 17만명의 공공운수노조의 주역 중 하나다.

    “30년 전 6월 최루탄을 맞으면서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어 7~8월 그 뜨겁던 여름, 노동법해설 책을 들추며 노조를 만들었다. 우리는 노동자라는 자각과 함께 조금이라도 역사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당당한 역사였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당당히 선언했다. 가슴이 지금도 뜨겁다. 30년 전 민주노조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다. 작년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물결 속에서 그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가 늙고, 세파에 시달려도 그 때의 정신은 오롯이 살아 있다. 전문노련의 정신은 생생히 살아 있다. 낭떠러지에서 한발 내딛는 심정으로 시작했으나 지금 우리는 늠름하게 여기 모여 있다. 우리가 선택한 길, 걸어온 길이 비록 험난했으나 우리가 옳았고, 정당했고, 의로웠다.”

    처음 인사말을 한 김문철 전문노련 초대위원장의 말처럼 당당한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10월 14일, 프레스센터 옆에 있는 뉴국제호텔 15층에서 “1987-2017, 그 때 우리는 지금 우리는”이라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 날 행사에는 전문노련을 이끌어 온 김문철, 허영구, 박태주, 양경규 위원장을 비롯하여 각 단위노조 간부를 역임한 80여명이 참가했다. 특히 당시 언론노조 위원장이자 업종회의 의장이었던 권영길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도 국회의원 당시 지역구인 창원에서 87년투쟁 3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음에도 자리를 같이 했다.

    “87년 30주년이 되는 올해 뜻 깊은 행사를 하고, 불러줘서 고맙다. 소주를 마실 때만이 아니라 항상 ‘처음처럼’ 살아가자. 요즘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모이면 얼굴이 굳어지는 특성을 보이는데 여기는 아주 밝고 환하다.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자”라는 권위원장의 축사에 이어 “다시 전문노련 결성대회에 온 듯하다.”라는 허영구 2대 위원장의 말처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처음 이런 자리의 필요성이 얘기된 것은 5월 27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신길수 동지 추모식 자리였다. 전문노련 부위원장을 역임한 신길수 동지는 IMF를 맞아 회사가 강제 퇴출당하자 이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추모식 후 식사자리에서 87년 투쟁 30주년이 되는 올해, 초기에 노동조합을 해 왔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 나왔고,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6시에 시작한 행사는 결국 새벽 3시가 넘는 2차, 3차로 이어졌다. 한때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벼랑 끝 선택을 과감하게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노동법이 정한 30명의 발기인을 모으려고 노심초사한 사람들, 첫 발기인이 되어 현재 노동조합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 그들이 있어 오늘의 민주노조가 있음을 기억해 두자. 전문노련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닿아 있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아래 자료는 공공부문노동운동사를 정리 중인 박용석 동지의 글에서 인용한 것임)

    ‘관변연구소’로 찍혀 있던 연구기관에도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열기를 타고 산업연구원(9.22)을 시작으로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전자통신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등에서 그해 12월까지 대거 노조가 결성되었다. 사용자단체인 서울상공회의소(8월), 무역협회(9월)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한국통신산하 한국데이타통신(8.28), 한국전력기술(12.7), 대림엔지니어링 등이 연대에 필요성을 공유하여 1988년 7월 16일 32개 노조가 <연구전문기술노동조합협의회>(연전노협)를 발족한다. 이들은 당시 전두환의 측근인 허화평이 소장으로 부임한 현대사회연구소노조(88.2.6)의 노조탄압에 맞선 연대파업에 돌입한다. (이후 89년 3월 농성중이던 19명 조합원 전원이 해고된 현대사회연구소노조의 위원장이 현재 언론인으로 활약 중인 정관용이고, 사무국장이 현재 공공운수노조의 공공사업본부팀장인 김철운이다) 이 파업은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최초로 기획된 업종별 연대파업으로 기록된다.

    올바른 공연예술 쟁취를 위해 투쟁한 예술의 전당 노조의 40여일간의 파업투쟁도 있었다. 89년 7월 19일 파업을 시작, 공권력 투입으로 조합원 전원이 연행되었지만 투쟁은 지속되었고, 결국 이사장해임과 함께 조합원에게 적용된 고소고발 취하는 물론 무노동무임금 적용마저 깨버렸다. 이 투쟁은 이후 문화예술진흥원, 방송광고공사, 독립기념관, 체육진흥공단 등 문화공보부 산하 공공기관의 노조결성과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91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12월에 매각방침이 발표되자 2년 넘게 집회, 농성, 파업 등 민영화 대상 공기업 중 가장 끈질기게 투쟁했다. 노조 파괴로 악명높은 한진그룹이 인수한 후 노조 무력화를 시도하자 94년 7월 21일부터 35일간 장기 파업을 진행했다. 이 투쟁으로 노조활동 및 노동조건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92년 9월 23일 전자통신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연구소는 파업 1시간만에 공격적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노조는 28일간 파업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무력화를 시도한 이 음모는 연대투쟁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고, 3년 뒤 대전지방법원의 위법판결과 97년 4월 사측의 상고포기에 의해 12억원을 환급받았다. 이 후 공격적 직장폐쇄가 불법이 된 이유다.

    1994년 4월 15일 전국과학기술노조가 설립되었다. 14개 지부 3,200여명이 참여, 복수노조 체제 하에서 처음으로 산별노조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 5개월간 투쟁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단위노조의 조건부 해산’을 통한 합법적 신고필증 교부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낸 것이고, 이로서 산별노조가 본격화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해방이후 최초로 기업별 노조를 해산하고 아래로부터 건설한 산별노조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산별전환 모델은 이후 의보노조, 대학노조로 계승되었다.

    사회복지노조의 대표주자인 홀트아동복지회노조의 1996년도 투쟁도 기억되어야 한다. 7월 11일부터 5일간 파업투쟁을 통해 임금체계 개선, 인사위원회 참여 등을 합의했으나 이후 새롭게 부임한 새로운 회장의 노조탄압으로 조합원이 75명 중 18명만 남을 정도로 각종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강력한 연대투쟁과 조합원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 97녀녀 6월 회장이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이 투쟁은 이후 에바다, 사랑의 전화, 혜인원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2000년대 민주노조활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소중한 토대가 되었다.

    이날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투쟁을 직접 담당했거나 연대를 조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그때엔 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며 함께 했지/ 인간이 인간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향해 함께 했지…./ 허나 친구여/ 서러워 말아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많으니/ 후회도 말아라 친구여/ 다시 돌아간대도 우린 그 자리에서 만날 것을/ 젊음은 흘러가고/ 우리 점점 늙어간다 해도/ 우리 가슴 속 깊이 서려있는/ 노래 잊지 말게”라고 축가를 부른 꽃다지 정윤경, 당시 전문노련 노래패 ‘들무새’를 지도했던 민중가수의 노랫말처럼 그들은 비록 늙어간다 해도 “가슴 속 깊이 서려있는 노래”를 잊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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