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걷이 시작,
    멧돼지 욕할 게 아니다
    [낭만파 농부]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2017년 09월 21일 04: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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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작을 예감하던 참이었다. 작황도 나쁘지 않고, 노릇노릇 나락 때깔도 좋아 “태풍만 잘 피해가면…” 그러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처참하다.

    분토골 세 배미 여기저기가 쑥대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질척한 논바닥에 쓰러진 벼 포기가 짓이겨져 있다. 저래가지곤 도저히 거둬들일 수가 없다. 지름이 족히 2~3미터는 돼 보이는 쑥대밭이 예닐곱 곳이나 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심하게 요동친다.

    멧돼지가 분탕질한 곳이 달의 분화구처럼 여기저기 패어있다

    멧돼지들이 진흙탕 목욕을 하고 난 흔적들이다. 이 육시랄 것들. 모내고, 풀 뽑고, 거름 주고… 게다가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을 떠올리니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 따져보니 멧돼지만 욕할 게 아니다. 끝까지 물 단속을 잘 했어야 하는데, 살펴보니 수문을 틀어막았던 나무마개가 빠져 있다. 늦장마가 왔을 때 물이 콸콸 들어왔으니 논바닥은 진흙탕 목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 되어 있었으리라. 결국 멧돼지만 탓할 일이 아닌 셈이다.

    농사라는 건 끝판에 가서야 성패가 판가름 나게 돼 있다. 반년이 한 주기인 벼농사만 해도 다섯 달의 작황이 아무리 좋아도 풍흉은 막판 한 달에 달려 있다. 지난해도 그랬다. 벼이삭이 팬 직후 도열별인지 깨씨무늬병인지가 논배미를 휩쓰는 바람에 소출이 30% 넘게 줄었더랬다.

    올해는 바로 옆에 붙은 익산지역에 ‘먹노린재’가 창궐해 전체 경작면적의 절반이나 피해를 봤다는 소식이다. 워낙 생소한 벌레여서 약을 쳐도 잘 듣지 않고 이 놈들이 벼이삭의 즙을 빨아먹어 고스러진 벼 포기를 그저 바라볼 밖에 없다는 것이다. 멧돼지의 분탕질은 그에 견줘 피해 정도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이 이리 언짢은데 반년 농사를 한 순간에 망쳐버린 이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이번에도 절감한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 한낱 멧돼지 같은 야생의 짐승한테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미물’인 먹노린재마저 농약이 듣지 않는다지 않는가. 자업자득,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다. 온실가스를 그리 만들어내 자구온난화를 부르고, 그 결과가 이상기후요, 요동치는 생태계 아닌가. 도대체 누굴 탓할 건가 이 말이다.

    어쨌거나 가을은 깊어 가고, 하늘은 유난히도 곱다. 이 시절 나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농사꾼에게 맡겨진 일을 고분고분 하겠노라 몸을 낮춘다.

    지난 한 달 남짓 ‘짧은 농한기’를 느긋하게 누리다가 엊그제부터 가을걷이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요즘 가을걷이야 콤바인(수확기) 한 대가 도맡아 하니 준비라고 해야 콤바인 ‘도우미’ 노릇, 다시 말해 제초작업과 논바닥 말리는 일이 전부다.

    이 즈음의 제초작업이란 이제껏 논배미에 살아남은 피 이삭을 베어내는 피사리를 뜻한다. 다행히 올해는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데 원산배미에는 고춧대를 닮은 여뀌바늘이 온 논배미에 ‘천지삐까리’다. 대가 꽤 굵고 목질이 단단해 콤바인 칼날에 부담을 주니 뽑아내야 한다. 어찌나 빽빽한지 생각보다 작업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확 직전에는 논두렁에 우거진 수풀을 한 번 더 베어줘야 한다.

    콤바인이 제대로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논바닥을 잘 말려야 한다. 내가 부치고 있는 논 가운데는 수렁논이 많아 일찍부터 물을 떼고 빼내야 한다. 심한 곳은 벼 포기를 뽑아내 논 가운데로 물길을 내는 ‘도구치기’를 해줘야 한다.

    수풀에 덮히고 흙모래가 쌓여 막혀 있던 도랑을 퍼내 물이 흐르고 있다.

    먼저 도랑치기. 논을 둘러싸고 흐르는 도랑(배수로) 바닥에 쌓인 흙모래와 유기물을 퍼내는 준설작업이다. 이미 지난봄에 한 차례 준설작업을 했던 원산배미는 수월하게 끝났는데 분토배미는 애를 먹었다. 질긴 풀이 도랑 바닥에 뿌리를 벋어 단단히 엉켜 있는 통에 그걸 퍼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쇠스랑에 걸린 풀뿌리와 낑낑 줄다리기를 하노라니 오십 중반의 쉰내 나는 나이가 떠올라 약간 서글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쉬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도랑치고’ 다음에 이어지는 관용구는 당연히 ‘가재 잡고’겠지. 물론 논도랑에 가재가 있을 리 만무하다. 풀줄기와 뿌리가 썩어 있는데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물 흐름이 막혀 고이는 바람에 썩었지만 오염물질은 아니다. 막힌 풀뿌리를 퍼내자 시커멓지만 물 흐름이 살아났다. 거기서 드렁허리를 자주 보게 된다. 뱀장어와 미꾸라지를 섞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놈은 오염에 매우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물장군까지 종종 눈에 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에 해당하는 생태지표종이라고 한다.

    이제 보니 멧돼지에서 시작해 물장군에 이르렀다. 벼 포기에는 지금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온갖 날벌레를 노리고 있다. 메뚜기는 지금이 한철이다. 벼 포기 사이를 지나노라면 팝콘 튀듯, 콩을 볶듯 한꺼번에 튀어 오른다. 그 속에서 벼 이삭은 누렇게 영글어가고, 햅쌀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에 기가 죽었다고 해야 하나? 이리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깃들어 살아가는 게 잘 사는 것이겠지.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겠지.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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