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를 부정당했던 존재, 여성
    [아트살롱] 미술과 여성1 - 페미니즘에 대하여
        2017년 09월 19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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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이전, 서양 미술사에서 기억할 만한 여성 작가가 있는가? 잠시 읽던 글을 멈추고 생각해보자. 도대체 어떤 작가들이 있었을까? 그럼 과학자는? 여성 철학자는? 다른 전문 분야로 넘어가보자. 최근에는 클라이밍, 축구, 야구, 수영, 종합격투기, 볼링,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 영역에서도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는데, 왜 20세기 이전의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을까?

    사상가들의 생각이나 문화를 통해 여성의 이미지를 한 번 살펴보자.

    “여자는 머리카락은 길어도, 생각은 짧은 동물이다.”(쇼펜하우어) “여자는 깊이 있는 척 하는 껍데기이다.”(니체) “여자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떤 남자보다 우러러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여자가 그런 업적을 이루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키에르케고르) “여자는 죽고 나서 석 달 뒤에 철이 든다.”(라틴 아메리카 속담) “여자를 만든 것이 알라의 유일한 실수다.”(이슬람 속담) “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 한다.”(한국 속담) “여자 세 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한국 속담) “인류의 악은 여성이 들였다.”(기독교 역사)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공자)

    상황이 이렇다면, 역사는 체계적으로 여성의 음성을 억압했고, 역사에서 여성을 삭제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머레이 북친의 말마따나, 서양이든, 동양이든, 남반구든, 북반구든 지구는 여성의 대대적 패배를 선언하는 남성의 지배욕이라는 공모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미술사라고 별 다를 바 없다. 그 중에서 서양의 미술계의 입장을 잠시 살펴보자.

    “1435년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는 『회화론』에서, 미술가란 학식 있는 사람이고, 미술작품이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개인의 독특한 표현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처음 사용한다. 물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개인이란 ‘남성’을 의미했고, 여성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알베르티는 글에서 미술에 대한 기술과 평가에서 여성이 생산한 작품을 남성이 생산한 작품보다 ‘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여성의 공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다.

    1550년에 처음 출판되고, 1568년에 개정․증보된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화가․조각가․건축가 열전』은 ‘남성, 백인, 천재’라는 관점의 예술사 서술을 보여준다. 바사리는 초판에서는 여성 예술가들을 한 명도 언급하지 않았다가 개정판에서 13명의 여성 미술가들을 언급하는데, 여성미술가는 천재가 지닌 창조력보다는 성실함을 가지고 있다고 논한다. 남성은 자신의 미술을 통해 장엄함을 성취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은 높은 신분이거나 고결한 행실의 소유자만이 미술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세기의 한 저술가는 ‘여성이 비범한 재능을 습득해 남성화되려고 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취미 삼아 하는 것이 좋다. 천재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그녀는 남자다.’라고 말했다.

    또한 가장 잘 알려진 미술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 곰브리치(Ernst H.J. Gombrich, 1909~2001)의 『서양미술사Story of Art』(1961)와 젠스(H.W. Janson)의 『서양미술사Story of Art』(1962)를 살펴보면, 여성 미술가의 작품 도판이 하나도 없다.”(박병률, 「위대한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 미술사에서의 포함과 배제」, 『포함과 배제의 문화정치학을 위하여』, 부산대학교 출판부, 2010, 87-88쪽.)

    그 역사적 증거를 하나 보자. 다음 그림은 요한 조파니(Johan Zoffany)가 그린 <영국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이라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여성이 두 명 있다. 어디 있는지 찾아 볼 수 있을까? 당시에 여성은 미대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들어갔)었고, 심지어 저 그림의 상황을 볼 때, 더더욱 여성은 참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성 누드를 그리고 연구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의 누드를 보고 그릴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의 누드를 봐서는 안 되었고, 그래서 그릴 수도 없었다.

    요한 조파니, <왕립아카데미의 회원들>, (1771)

    시선의 비대칭성이라 말할 수 있는 일이 소위 오늘날에도 있다. 포르노에서 여성의 신체는 전부 드러나지만, 남성의 신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관음증적 시선도 이러한 비대칭성이 작동한다. 그러니, 위 상황은 노골적인 관음증적 시선이 가부장제라는 틀 속에서 공공연히 작동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화가였던 조파니가 여성이 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그리자니 남성의 공분을 살 것 같고, 그리지 않자니 역사화가로서 역사를 왜곡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파니는 일종의 꼼수를 사용한다.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부재하지도 않게 여성을 그려 넣는 것이다. 이쯤이면 그 두 여성이 어디에 있는지 여러분은 알아채셨으리라.(그래도 몰랐다면, 조안 조파니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시면 좋겠다.)

    여성은 역사에서 소수자(minority)이자 주변이었다. 주체가 될 수 없는 배제된 존재이자, 역사의 굴욕을 한 몸에 받는 존재로 역사에서 삭제 당한 존재였던 것이다. 에드모니아 루이스(1845-1911)의 경우를 보면, 배제의 대상인 소수성이 단순히 하나의 정체성 차원에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드모니아 루이스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치퍼와족 인디언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인종과 여성이라는 두 차원의 소수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은 백인 여성들의 것과는 달랐다. 조각가인 그녀는 흔히 조수를 사용하는 단순한 작업조차 허용할 수 없었다. 자기 작업의 완성도가 남성 조수의 도움 탓으로 귀속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던 후원자들은 그녀의 소수성을 빌미로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용기를 꺾었다. 심지어 그녀의 소수자 정체성 때문에 후원을 한다는 식의 동정어린 지원 역시 그녀를 충분히 압박했다.

    심지어 평단의 평가조차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이를 테면 “내가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면, 그 여성들 중 한 명은 흑인이었다. 석고 색과 완전히 대조되는 피부색은 그녀의 명성을 깎아 내리는 요인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는 헨리 제임스가 조각가 윌리엄 웨트모어 스토리의 전기에서 루이스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말이다. 여성이자 유색인종이 당해야 할 억압 그리고 그런 시선의 연장에서 그녀의 작업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쌍하다거나 이국적으로 취급되는 상황은 소수성의 소수성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중층적 모순이었다.

    에드모니아 루이스 <히아와타의 구애(The Wooing of Hiawatha)> (1866)

    『블랙 라이크 미』라는 책이 있다. 미국 인종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르포인데, 이 책은 백인 남성이 미국의 흑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스스로 흑인이 되어 직접 겪은 차별을 보고한 책이다. 저자인 존 하워드 그리핀은 피부과 전문의의 도움과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먹고 강한 자외선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선탠을 해가며, 자신을 흑인으로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 책 때문에 인신공격을 당하고, 고향에서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한참 후인 1975년에는 KKK단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고생은 결국 인종차별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피나는 노력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실이 있다. 그는 흑인 ‘여성’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난 번 기사를 참조하자면,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스스로 ‘남성성’ 도는 ‘마초성’을 유지시켜야 했다.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의 틈바구니에서 흑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했을까?

    최근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상황들이 생기고 있다. <히든 피겨스>라는 영화도 그렇고, 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흑인 여성 문학을 발굴하면서 삭제된 줄 알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귀환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여성이, 그리고 중층적 모순을 겪고 있는 여성이 아직 정당한 발화자가 되기엔 여전히 장애가 많다.

    남성=발화자 vs 여성≠발화자로 역사의 서사가 구성되어 있고, 그 서사 속에서 남성이 신사의 너스레를 떨든지, 아니면 오만을 부리며 맨스플레이너가 되는 세계에서 여성은 발언하지 못하는 타자일 뿐이었다. 그저 대상화되고, 일방적으로 해석되고, 배제되고 추방되는 여성들은 앞선 요안 조파니의 그림에 등장하는 비대칭적 시선에 노출되거나 그저 시선적 탐닉의 대상이 되었고,주 남성의 설명 앞에 수동적 경청을 강요당하는 객체였던 것이다.

    최근 이에 반기를 든 여성들이 있었다. 그 최초의 사건으로 주디 시카고를 소환하고 싶다. 시카고는 대학 초년생이던 당시 역사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시카고는 역사 교수의 첫 마디에 굉장한 감흥을 받았던 터였다. 그 말인 즉, “인류 역사에 여성은 거대한 기여를 했다.”였다. 하지만, 그 다음 발언이 시카고의 분노를 자극했다. 그 말은 바로 “역사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였던 것이다.

    주디 시카고 <디너 파티> (1974-79)

    <디너 파티>의 상세 이미지

    이에 저항하듯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이다. 여성의 신체를 비유하는 삼각형의 구도,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데코레이션 된 음식들, 그리고 여성성을 상징하던 전통의 상징(수놓기, 배짜기, 도예)들을 동원했다. 최종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형태로 여성들의 만찬을 기획함으로써 그들의 이야기(History)가 아닌 그녀들의 이야기(Herstory)를 기획한 것이다.

    미술에서도 오브제이던 여성‘들’이 오브제를 거부하고 그의 역사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성의 주체화 선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주체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주어지는 정체성도 아닐뿐더러,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성의 그늘이 드리워진 경우도 많았다. 큰 하나의 마초에 대결하기 위해 새로운 또 하나의 마초가 될 수도 없었다. 이는 모방된 남근일 수 있었다. 객체 또는 타자가 주체의 자리로 들어오기는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비체의 전략이다. 비체는 이념이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정할 수 없는 존재인 소수자와 달리 남/여, 주체/타자의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저항의 힘‘들’로 귀환할 수 있는 존재이다. 덕분에 비체는 미래를 고정된 정체성의 볼모로 삼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 비체는 잠재성을 극대화한 존재이므로 늘 변화하는 다양성의 힘을 표현한다. 이 다양성으로 주체라는 허구적 중심을 터뜨려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었다. 이제 미술계에 비체(abject)의 지속적 귀환이 시작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미술이라는 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다음에 계속…)

    필자소개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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