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의 삶 바꾼
    87년 7·8·9 대투쟁의 동력은 ‘연대’
    [인터뷰] 그때의 청년노동자들, 현대차 김강희·이상도
        2017년 09월 18일 03: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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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까지, 화염병과 보도블록이 하늘 위로 날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마에 붉은 투쟁의 머리띠를 동여매고 감옥에 끌려 들어가고 회사에서 쫓겨나도 그 사실 자체가 자랑스러웠던 시절. 해고를 당해도 배를 곯지 않아도 됐던 시절. 내 주머니 밖의 문제라도 함께 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 정부와 언론의 노동운동에 대한 악의적 선동에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던 시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싸움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모든 노동자가 계급을 나누지 않고 같은 장소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지 않아도 됐고,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있게 됐다. 관리자들의 폭행에도 저항할 수 있는 시절을 맞이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탈 자동차도 생겼다. 당시 노동자들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그렇게 기억했다.

    어느덧 차게 식은 바람이 부는 2017년 9월, 삶의 가장 뜨거운 여름의 한 장을 보냈던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울산을 찾았다. <레디앙>이 만난 사람들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김강희·이상도 조합원이다. 8일 오후 4시 현대자동차 문화회관에서 만났다.

    김강희 조합원은 86년 11월에, 이상도 조합원은 7·8·9투쟁 직후인 87년 11월에 처음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20대 초중반이었다. 당시엔 배 속에 있던 자녀가 지금은 성인이 됐고, 투쟁의 맨 앞줄에 섰던 이들이지만 지금은 뒤로 물러나 노동조합의 평조합원으로 있다.

    왼쪽부터 김강희 이상도 조합원

    신나 불 붙듯 서버린 기계들, 그리고 달라진 노동자들의 삶
    600원 받던 노동자들, 자가용을 꿈꾸다
    바리깡으로 강제로 머리 밀고, 툭하면 때리던 회사 문화…노조 생기니 모두 사라져 

    87년 7월, 여느 날과 같던 현장이 어느 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동료들과 김강희 조합원 사이로 어떤 이들이 ‘임금인상하라!’, ‘어용노조 물러나고 민주노조 만들자’는 종이를 들고 공장을 돌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공장의 모든 라인이 멈췄고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은 ‘와악! ’하는 함성을 치며 모였다.

    “전국적으로 곳곳의 사업장에서 투쟁이 일어나던 무렵이었는데 우리 회사에선 안 일어나나 했는데 그 일이 일어난 거다. 말 그대로 신나에 불 붙인 듯 전체가 손들고 공장에 나와 버렸다. 그날부터 공장이 서 버렸다”

    “그날로 ‘어용노조 퇴진시키고 민주노조 임시집행부 인정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회사 본관에 5백여 명이 밤늦도록 모여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씩 했다. ‘두발 단속 하지 마라’, ‘복장 자율화하자’, ‘임금 올려달라’. 그때 나온 요구들을 정리해서 회사랑 협상을 했다. 이틀인가, 사흘 만에 민주노조의 임시집행부가 인정이 됐다”

    7·8·9투쟁 전에도 노조는 아니었지만 회사 내에 노사협의회가 있었다. 회사는 임금과 처우 문제를 이 기구에 설명했다. 당연히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김강희 조합원이 입사한 첫 해 시급은 635원이었다. 2개월 수습 딱지를 떼고 나서 650원을 받았다. 그해 연말 인상된 시급액은 고작 30원이었다. 그가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건 자신의 시급이 아니라, 10년 차 선배들의 월급봉투를 봤을 때였다.

    “10년 이상 선배들이 시급 1000원 정도를 받았다. 회사에 들어와 일한 지 십 몇 년이 됐는데도 그 정도 돈밖에 못 받고 있었던 거다. ‘내가 시급이 1000원이 되려면 10년 이상을 일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정말 착잡하고 답답했다”

    7·8·9투쟁으로 노조가 만들어지고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돈’이다. 매해 30원씩 오르던 시급은 87년 그 해 한 번의 임금협상으로 170원이 올랐다. 이듬해엔 시급이 천원을 넘겼다. 김강희 조합원의 표현대로 노조가 생기고 “노동자들의 삶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노동자들도 자가용을 갖기 시작했다. 나도 92년도에 처음으로 중고차를 한 대 샀다. 그 전에 노동자가 차를 사는 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10년 이상된 선배들은 자녀들 학교 보내고, 먹고 살면 끝이었다. 자기 자가용을 사거나, 집을 마련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평생을 월세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워낙 임금이 적고, 그 돈 안에서 먹고 사는 데 급급했으니까”

    전보다 많은 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내 집’ 마련의 꿈도 품게 됐다. 노동자들끼리 주택조합을 통해 한푼 두푼 모아 보다 저렴하게 집을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주택조합으로 지어진 집들은 여전히 울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규직 내에서도 다르게 적용되던 임금체계도 바뀌었다. 정규직이지만 단순노무직으로 분류돼 사내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았던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을 단순노무직이 아닌 ‘일괄 생산직’으로 통일했다. 임금인상률이 동일하게 적용되면서 임금 차이도 미미해졌다.

    변화는 경제적인 것에 머물지 않았다. 말 안 듣는다며 정강이를 발로 차던 관리자에게 ‘때리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노동자들은 ‘두발 단속 금지’, ‘복장 자율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들을 그 당시엔 노조가 생긴 후에야 회사에 요구할 수 있었다.

    7·8·9투쟁이 막 끝날 무렵 입사한 이상도 조합원도 노조가 생긴 후 이전에 받았던 인간적 모멸감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전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상시적으로 느끼고 살았다. 제가 입사했을 때까지도 조회 시간에 조반장한테 쪼인트(정강이)를 맞고 그랬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깨갱’이었다. 머리가 좀 길면 회사 정문에서 바리깡으로 그대로 머리를 밀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노조가 생기고 좀 지나고부턴 노조 대의원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줬다. 그 전엔 노동자 개개인이 맞고 가만히 있었다면 이젠 반발할 수 있게 된 거다. 그야말로 현장의 민주화였다”

    김강희 조합원은 이를 두고 “회사 주도의 지배 질서들이 무너진, 문화의 혁신이었다”고 회상했다.

    6월 항쟁이 정치적 혁명이었다면, 7·8·9투쟁은 우리 사회, 경제와 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꿨다. 자본의 중심으로만 굴러가던 회사에서 노동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들어준 ‘경제적 혁명’, 경제 민주화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노동자의 삶 바꾼 7·8·9투쟁의 동력 ‘연대’
    현중 사업장 연대투쟁 후 해고 “후회없어요. 오히려 자랑스러웠죠”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동력은 ‘연대’였다. 내 밥그릇과 관계없더라도 같은 노동자의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기계를 멈추고 거리로 나왔기에 변화는 가능했다.

    1990년 4월 28일, 이상도 조합원은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려 투입되려던 공권력을 막기 위해 싸우다가 해고됐다. 내 사업장, 내 임금 문제가 아닌 다른 사업장 문제로 싸우는 일은 지금으로선 쉽지 않은, 아니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물었다. “연대 투쟁은 왜 하신 거예요?”

    “왜라뇨. 그때는 연대투쟁이 당연한 거였다. 회사도 다르고 뭐 별 다른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그래도 같이 싸우고 막아주고 하는 게 당연했다”

    “그땐 옆 사업장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연대해야 한다는 게 기본 정신이었다”(김강희 조합원)

    당시 현대자동차노조는 내부 성과급 문제로 회사 본관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 중이었다고 한다. 노조위원장은 현대중공업 투쟁에 개입하지 말라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철야농성을 하던 대의원들과 출근하던 조합원 대부분이 현대중공업 노조 투쟁에 투입된 공권력에 맞서 싸웠다.

    “바리케이트 치고 화염병 던지고…어느 순간엔 출근하는 사람들이 다 튀어나와서 엄청난 싸움이 돼버렸다”

    이상도 조합원은 당시 그 투쟁으로 해고됐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돈에 눈먼 노동자였다. 입사 3일 만에 조반장이랑 멱살 잡고 싸운 이유가, 야간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게 이유였다. 돈 벌어야 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면서 90년까지 큰 활동 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4월 27일 야간 근무하려고 들어왔다가 대의원들 철야농성장에 지지 방문 갔다가 뭣도 모르고 그렇게 됐다. 젊어서 그랬나…당시 나 말고도 해고가 30여명, 구속이 12~3명은 됐다”

    해고된 뒤 연대투쟁에 나선 것에 후회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상도 조합원은 손사레를 치며 “그땐 그런 거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투쟁하지 않는 노조, 연대하지 않는 노조

    해고를 감수한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변화를 이끌어냈던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귀족노조’라는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비난은 물론, 노동계 일부에서도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상도 조합원은 이런 비난들에 못내 섭섭한 마음도 든다.

    “귀족노조라고 매도당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현대차 노조가 비정규직 연대투쟁을 많이 하지 못한 건 인정하지만 내부적으로 비정규직 노조 만들고, 학습하고, 논쟁하는 과정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조 요구만을 가지고 우리 조합원을 다 설득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우리 요구와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를 섞어서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언론이나 정치권, 자본에선) 우리 요구는 죽여 버리고,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를 문제로 불법투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래놓고 또 선전할 때는 ‘귀족노조 배 채우는 투쟁한다’고 비난한다”

    “현대차 노조가 단협에서 회사에 (비정규직) 사회연대기금 만들자고 했다. 정규직 조합원 임금 일정부분 양보해서 만들어진 기금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노력은 평가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 혜택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사회연대기금의 공을 현대차 회사로 돌린다” (이상도 조합원)

    물론 현대차 노조를 비롯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나 최저임금 등 자신들과 크게 관련이 없는 투쟁에 소극적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리고 대공장 노조 내부에 만연한 이기주의에 대해서도 반성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7·8·9투쟁 이후 노조가 만들어지고 현장 권력에 대한 개편이 좀 더 질서 있게 이뤄졌다면 좀 나았을 수 있다. 물론 당시엔 이 거대한 사업장을 그렇게 통제할 만한 능력이 (노조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로 (과거에 조합원들이 기댈 수 있던 대의원의 권력이) 지금은 너무 과해졌다. 방만하고 무질서해졌고, 이런 시스템은 대중의 극단적인 이기심을 부추기는 기제가 되고 있다” (김강희 조합원)

    “옛날엔 회사가 조합원을 직접 관리했다면 지금은 조합원과 회사 사이에 대의원이 중간에 끼어 있다. 관리자가 대의원만 통제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대의원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없는 회사 정책이 많다. 이 말은 반대로 대의원의 동의만 얻으면 회사가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회사와 대의원의 유착관계가 우려될 정도로 심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상도 조합원)

    조합원들이 더 이상 투쟁하지 않으려고 하는 노조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데에도 우려를 나타냈다. 노조가 함께 싸워 노동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사회적 조직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풍토에 대한 비판이다.

    “과거엔 현장 조합원들은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정 정도 요구가 충족되고 요구하는 것들이 싸우지 않아도 이뤄지다보니 노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함께 투쟁하고 쟁취하는 조직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나한테 자판기처럼 물건을 내줄 수 있는’ 그런 노조만을 필요로 한다. 참여하지 않고 요구만 하는 그런 분위기가 생겼다”(이상도 조합원)

    노조 내 이런 분위기는 다른 사업장의 문제를 결과적으론 외면하는,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한계를 가져왔다. 이상도 조합원은 노조가 일정 부분 이렇게 변질된 것이 회사의 영향이 크다고 봤다.

    “회사가 교묘하다는 게, 강성 대의원과 온건 대의원이 있으면 온건 대의원의 요구만 수용한다. 예를 들어 산재 처리 문제도 강성 대의원이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다가 회사와 얘기가 잘 통하는 온건 대의원이 요구하면 바로 들어주는 거다. 조합원은 자기에게 이로운 대의원 뽑는 것 외에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대의원도 표에 도움이 되는 정도까지의 조합원만 관리한다. 옛날처럼 투쟁하며 싸우고 감옥하고 그래야 하는 대의원이었다면 할 사람 없을 거다”

    연대하지 않는 노조, 그들 정규직 노조만의 문제일까?

    시들해진 연대의 원인은 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의 이기심 뿐 아니라, 기업별 노조라는 구조적 문제와 노조 지도력 약화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고 김강희 조합원은 지적했다.

    “구조적 문제, 노조의 지도력의 문제가 있다. 기업별 노조 운동은 연대하고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싸우는 것에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러면 노동계급 전체의 공동의 요구를 하나로 집약해서 강력하게 지도하고 끌고 갈 수 있는 핵심단위인 산별노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계급적 이익을 놓고 싸울 수 있는 구조적인 틀이 우리에게 없다. 그 틀을 금속노조, 민주노총이 잡아줘야 한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요구안을 내놓고 싸우겠나. 어찌됐든 기업별노조인데 구조적으로 그럴 순 없지 않나. 사회적 아젠다를 관철하기 위해 금속노조가 각급의 노조의 힘을 응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한계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힘 있는 대규모 사업장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은 상대적으로 계속 나아질 테고, 다른 사업장들은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거다.

    두 번째, 노동조합 지도단위에는 대중을 끌고 가야 할 책무가 있는데 요즘 노동조합 운동은 대중을 따라간다. 지도할 생각이 하나도 없다. 대중이 요구하면 현실에서 풀어내기만 급급하다. 대중을 지도하지 못하고 따라만 가다 보니 ‘귀족노조’, ‘지들의 배만 채우는 노조’로 평가받는 것이다“

    87년 7·8·9투쟁…“말을 할 수 있는 사회의 시작”

    이렇듯 7·8·9투쟁 이후에 노동운동의 한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자에 한정하지 않고 7·8·9투쟁은 우리 사회 전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7·8·9투쟁의 주역들인 두 조합원에게도 7·8·9투쟁이 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한줄 답변’을 요구했다.

    “노조가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한 계기였다”(김강희 조합원)

    “말을 할 수 있는 사회의 시작이었다”(이상도 조합원)

    2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김강희 조합원은 “아, 올해가 7·8·9투쟁 30주년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들에게 7·8·9투쟁은 아주 먼 과거이고 잊지 못할 역사이자,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흘러버린 시간처럼 그들도 그때만큼 뜨겁진 못하다. 또 그것을 못내 미안해하고 있다.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유지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 퇴직할 때까지만이라도 열심히 하면 좋은데 몸도 안 따르고…사실 식어진 가슴이 다시 데워지지 않는 것도 있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이 참 민망하고 미안하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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