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톤도 모스크바도 아니다"
    중립, 양자택일 선택 거부의 매력, 그리고 문제성
        2017년 08월 18일 11: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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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도 워싱톤도 아니다!” 이 말은, 한국/조선 전쟁에 대한 유명한 영국 맑스주의자/”국가자본주의” 이론가 토니 클리프(1917-2000)의 촌평이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인 토니 클리프는, 그가 (사회주의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여겼던 소련/중국/북조선 측도, 본인의 거주국인 영국을 포함한 미국/서방/남한 측도 지지할 수 없다고 천명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한반도 역사와 유관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매력을 지니죠.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도 “중립국”을 택했듯이 그 시대의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미 권위주의화되고, 억압성을 과시하는 두 체제 사이에 “택일”해야 한다는 상황 그 자체를 거부하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에 기대고, 친일파를 재기용한 늙은 도둑 이승만 밑에서, 더 넓게 보면 과거 식민지 시대 통치자들이 그대로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남한에서 인간다운 사회가 출현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한데 이미 그때쯤에 “작은 스딸린”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김일성은, 비록 민족국가 건설을 잘 해나가는 민족영웅이었지만, 개방적이며 평등한 사회를 그다지 지향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미 쉽게 포착될 수 있었습니다. 수령-당/관료-인민의 획일적인 위계적 체제 속에서는 이견을 관용할 여지도 많지 않았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남한 사회 주변부에서 살면서 “중립”을 지향했던 혁신정당 관계자나, 운이 좋아 밖에 나갈 수 있어서 한반도 바깥에서 남북한 양쪽 체제를 지양한, 보다 자유로운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해 일하는 게 적지 않은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예컨대 <화산도> 작가 김석범 (金石範)도 초기에 총련 편에 섰다가 결국 이런 형태의 정세관을 갖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조선적을 보유하여 한국에 입국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립”, 내지 양자택일 논리 거부의 근거는 충분했습니다. 소련/중국/북조선이 “국가자본주의”든 아니면 혁명의 보수화에 따라 생긴 국가 주도 “적색” 개발주의 사회든 간에 말이죠. 명칭이 중요한 거라기보다는, 이런 사회가 혁명적 지식인이 원하는 만큼의 민주성과 개방성을 보유하지 못하는 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결국 북에 가서 그 체제 속에 편입된 식민지 시대의 기라성 같은 조선의 양심적인 민족지성인, 허헌이나 백남운, 홍명희 같은 분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요?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북에 가서 원하는 활동을 마음껏 못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중립을 지킬 근거만큼 북에 갈 근거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그 주변의 신흥 관료들이야 스딸린의 보수화된 소련을 벤치마킹해서 혁명적인 무권력, 무국가 사회 아닌 관료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해방 직후에 이북에서 밑으로부터의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가 발산됐습니다. 북조선의 신흥 지도자들도 이에 상응하여 식민지 시대 공산운동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실시해야 했습니다.

    토지개혁, 남녀평등 법제화, 무상교육과 의료 원칙의 법제화…후자 같으면 남한에서는 지금도 꿈과 같은 이야기죠. 이런 개혁을 열광적으로 맞이하고,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집단적, 개인적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본 다수의 빈농, 중농, 영세민들은 새 체제의 당당한 지지층이 됐으며, 바로 그 지지는 지옥과 같은 3년간의 미국과의 전쟁에서 체제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된 거죠.

    50년대에는 위에서는 빨치산파가 여타의 계파들을 청산하면서 독자적 권력구조를 구축하는 한편 획일적인 권력체계를 공고화했지만, 밑에서는 수많은 민중들이 – 비록 매우 빈궁해도 – 여전히 해방된 새 사회 건설의 꿈속에서 살고, 새 사회가 부여한 수많은 교육, 의료, 신분상승의 기회를 활동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식민지 유산마저도 잘 청산이 안 된 당대 남한에 비해 훨씬 더 역동적이고 낙관적인, 다수에게 이로워 보이는 사회이었기에, 그런 사회를 택한 사람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할 수 있죠.

    이런 부분도 놓치면 안 됩니다. 소련 사회나 그 “형제국가” 사회들이 내부적으로 아무리 보수화돼도, 그들의 진영은 미국/서방 진영에 비해 늘 열세이었습니다. 소련과 동구, 중국이 북조선에 집행한 무상원조는, 미국이 남한에 퍼부은 원조(1949-71년간 약 130억불)에 비해 절반도 안 되었죠. 소련은 미국과 무기생산 경쟁을 벌여왔지만, 그 경쟁에서 리드해온 건 늘 미국이었고, 결국 그 경쟁의 후과로 미국이 아닌 소련이 국력 낭비돼 파산의 직전에 와서 페레스트로이카라는 형태로 포기 선언하여 해체 수순을 밟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워싱톤과 모스크바”라고 할 때에 이 둘이 마치 같은 무게의 세계 체제 중심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죠. 세계체제의 패권국은 늘 미국이었고, 소련은 그저 그 체제의 변두리에서 어떤 대안적 소체제의 구축을 실험적으로 시도해봤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보수화돼도, 소련과 그 “형제국가”들은 늘 우군을 필요로 했으며, 그 최적의 우군은 바로 각종의 해방운동들이었습니다.

    소련도 팔레스타인과 남아프리카 포함한 각종 제3세계 해방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했지만, 북조선도 이미 1956년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이집트를 지원한 것부터 시작해서 일찌감치 “제3세계 연대”를 시작했습니다. 국가예산에 비해 그 원조액은 소련/중국의 경우보다 훨씬 컸고요. 그러니까 마다가스카르 등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70년대에 주체사상이 유행했다는 건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그쪽 지식인들도 북조선과 같은 “자주적이며, 내부동원식, 내포적 개발”을 지향했죠. 아무리 내부동원해도 이렇게 세계체제 중심부 재력/기술력으로부터 고립된 개발에 내재적 한계가 있다는 냉혹하고 아쉬운 현실을,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식하게 됐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 스딸린/모택동/김일성 체제가 이미 “혁명”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만큼 “워싱톤도 모스크바도 아니다!”는 구호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한데 동시에 자의든 타의든 세계체제 중심부와 대결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러면서도 열세에 있으며 계속해서 각종 해방운동들과의 연대를 모색해야 했던 “모스크바” (북경, 평양 등) 가능성 내지 잠재성도 사후적으로 폄하하기만 하면 문제입니다.

    1950년의 모스크바/북경/평양에서는 ‘사회주의’를 발견할 수 없었겠지만, 해방을 향한 가난한 대중들의 에너지를 – 특히 북경과 평양에서는 –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유일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듯, 그 당시 상황에서는 북조선/중국에서 “민중적 가요 문화” 창작에 노력한 정율성의 길도, 결국 남한에 가서 혁신정당 사업하게 된 김성숙의 길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둘 다 중국에서 공산주의적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었는데, 차후 한 분은 문혁 때 고생하고, 또 한 분은 미군정 때도 1공 때도, 박정희 때도 계속 감옥행이고…어딜 가도, 양심적 사람에겐 한국 근현대사는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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