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하늘이
    못 속으로 내려오고
    [풀소리 한시산책] 유반 '우후지상'
        2017년 08월 08일 09: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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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 김종삼, 「비 개인 여름 아침」

    이제 장마도 끝물입니다. 한두 번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면 장마도 끝이겠지요. 이 장마가 끝나면 가장 무더운 한여름이 될 겁니다.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계절은 늘 한 계절 앞서 나타납니다. 한겨울인 1월에도 남쪽 바닷가 덤불 사리 밑에는 새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상대적으로 추운 서울 인근에도 양지쪽 돌 틈으로 작은 풀들이 솟아납니다. 여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위가 절정인 요즘도 논에는 벼꽃이 피어나고, 산에는 언뜻언뜻 가을빛이 보입니다. 때로는 가을처럼 맑은 하늘이 보이기도 하고, 한밤에 서늘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어쩌다 습도 낮은 날씨 덕분에 뭉게구름을 인 푸른 하늘이 열리는 날이면, 호수 위로도 군데군데 하늘이 내려오기도 합니다. 비 갠 어느 여름 아침 김종삼은 이런 하늘과 연못을 봤나 봅니다. 김종삼의 시심(詩心)으로 오늘 북송(北宋)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이며 시인인 유반(劉攽 1023~1089)의 시(詩)를 보겠습니다.

    雨後池上(비 온 뒤 연못에서)

    – 劉攽

    한바탕 비 지난 뒤 연못은 잔잔하여
    닦은 거울마냥 누각 처마 서까래 비추네
    홀연 동풍 불어 수양버들 춤추더니
    다시금 연잎 위로 후드득 빗소리 들리네

    一雨池塘水面平(일우지당수면평)
    淡磨明鏡照簷楹(담마명경조첨영)
    東風忽起垂楊舞(동풍홀기수양무)
    更作荷心萬点聲(갱작하심만점성)

    2017. 7. 25 남양주 능내 연꽃마을

    유반(劉攽)은 송(宋)나라 중앙교육기구인 국자감(國子監)의 직강(直講)을 지냈습니다. 사마광(司馬光, 1019년-1086년)을 도와 유명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전‧후한(前後漢) 부분을 기술하였습니다. 『자치통감』은 294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여기에 따로 목록만 모아놓은 것이 30권에 달한다고 합니다. 너무 방대해서 읽기도 힘들 정도죠. 그래서 주자(朱子 1130-1200)가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저술했고, 이것이 우리가 접하는 『자치통감』입니다.

    『자치통감』 저술은 사마광이 주관하고, 유반은 사마광의 다른 제자인 범조우(范祖禹), 유서(劉恕)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19년에 걸친 작업으로 여기에 너무 많은 정열을 뺏겨서 이후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시를 볼까요? 이 시는 좀 쉽죠. 그건 아마 교훈적인 내용이 아니라 당시(唐詩)처럼 자연을 노래했기 때문일 겁니다.

    ‘一雨(일우)’는 말 그대로 한번 내린 비니 소나기 정도가 되겠죠. ‘池塘(지당)’은 연못을 말합니다. 한바탕 퍼붓던 소나기가 그친 뒤, 연못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니 누각의 기둥이며 처마가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연못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라도 걸쳐 있으면, 아마 연못 속에도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있겠지요.

    그러다 또 동풍이 갑자기 불어오더니 넓은 연잎에서 후드득 소리가 납니다. 때로 소나기는 소리로 먼저 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소나기가 다시 오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마도 이미 내린 소나기로 버드나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바람에 날리어 비 오듯 연잎에 후드득 떨어졌겠지요. ‘荷心(하심)’은 말 그대로 번역하면 연잎 한 가운데이니, 바람에 후드득 떨어진 물방울들이 연잎 한 가운데로 또르르 굴렀을 거구요. 연잎 위에 물방울 구르는 소리는 안 들리겠지만, 눈으로는 보이니 귀와 눈을 더하면 ‘萬点聲(만점성)’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한여름 소나기는 내리는 곳이 한정되기 마련이죠. 심지어 강 건너편엔 비가 오는데, 강 이쪽은 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한여름 어느 날에 신경림 선생은 버스를 타고 한바탕 소나기로 물이 불어난 지리산 마천을 지났나 봅니다. 그러면서 쓴 「여름날 – 마천에서」라는 시를 보면서 한여름을 맞이해 볼까 합니다.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신경림, 「여름날 – 마천에서」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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