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대학다워야 한다
[기고] 뜬금없는 성명에 대한 해명
    2017년 07월 21일 0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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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들이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학정신의 회복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링크) 특별한 계기가 없었고, 그렇다고 콕 집어 요구하는 사항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다. 성명 발표에 동참한 한 사람으로 이 ‘뜬금없어 보임’에 대한 해명을 보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난 20년 넘게 한국 대학이 상업화되고 기업화된 것에 대해, 개인적인 저항과 소수의 목소리 말고는 반대의 흐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대학 구성원들이 대학을 병들게 할 병원균이 조금씩 침투해 들어올 때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그리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서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에, 대학구조조정 정책에 대해 작은 목소리나마 보태려고 결정한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지을 대학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근본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는, 전 사회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대학교 인문대학의 열아홉 명의 목소리가 이러한 논의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아래에서는 성명 참여자 전체가 아닌 개인의 의견으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내용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글, <대학: 담론과쟁점>에 실린 「비판정신의 실종과 민주화운동 세대의 이율배반」에 기초하고 있다.)

제주대 본관 모습

늦었지만, 그래서 부끄럽지만 우리는 발언해야 한다

대학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먼 곳을 내다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기존의 관행과 규칙, 사고틀을 넘어 새로운 지식담론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과학적 발견이 당대의 상식에서는 웃음거리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기술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권력과 재력이 사회를 지배할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관행과 상식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했던 것도 대학이었다. 기득권층을 지탱하는 권력 장치의 일부였음에도, 그래서 그 안에 권력을 탐하는 가짜 지식인이 가득했음에도, 대학이 가지는 비판적 정신은 사회의 진보와 공명했다.

대학은 미래를 향한 지식과 함께 그 지식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었다.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담론이 주어진 틀을 벗어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곳에서 배우고 길러지는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역량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지만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힘이었다. 종종 사회에 나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이렇게 길러진 비판과 소통 능력을 스스로 버리기도 하지만 대학의 학생은 대학 그 자체와 스승에게까지 도전적일 수 있는 패기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고립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학은 학문적 공동체들이 생겨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때때로 현학적이고 자기들 끼리만의 전문영역으로 침잠하기도 하지만 대학은 사소한 개념 하나에서도 논쟁을 벌이고 비판하고, 소통하고, 반성하는 학문적 토론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는 곳이다.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기에 사기와 협잡, 권력 투쟁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대학 구성원들은 그걸 부끄러워했고 공공연히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학은 ‘이상’을 추구하는 곳이었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을 때조차 돈과 권력의 논리를 좇는 현실주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는 이상이 보존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지금 대학은 앞장서서 대학으로부터 이상과 상상력을 몰아내고 있다. 연구과 가르침을 취업률과 효율성으로 측정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학은…

지금 제주대학교,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은 미래를 위한 지식담론을 생산하기는커녕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비판과 소통 능력을 가진 지식인을 만들기보다는 획일적인 기능인을 ‘생산’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학문적 공동체는 고사하고 교수들은 고립된 채 연구비를 얻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논문 찍어내기에 바쁘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대학의 ‘붕괴’는 학문과 교육을 돈의 논리로 따지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나태하고, 권위적이며, 비양심적이라고 ‘가정된’ 교수집단에게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능력을 연구역량에 따라 투명하게 평가하겠다는 것이 기본논리였다. 하지만 돈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 대학은 결코 투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구역량이 높아지지도 않았다.

이제 양적인 평가 앞에 무력하게 순응하게 된 교수들은 깊은 통찰과 고민을 뒤로한 채 설익은 생각들을 논문으로 찍어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하는 교육당국의 ‘협박’ 아래 제자들을 학문적 계승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취업시켜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육의 ‘질 관리’라는 명목 아래 만들어진 수많은 ‘양적’ 지표들은 교육의 기본 밑동부터 잘라내고 있다. 교수는 학생 상담을 ‘건당’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질’을 말하지만 강의실의 진지한 토론보다는 출석관리라는 가장 표피적인 것만을 앞세운다.

결석 한 번에 진단서를 제출하는 학생들과 출석관리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는 교수 사이에 어떤 유대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대학이 권위주의적인 시절에서조자, 최소한 이러한 조치들이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뻔뻔함, 아니 무지함은 대학에서 발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교육당국이, 총장들이, 보직교수들이 모여서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강변한다.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효율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배척된다.

분명 대학은 민주화 과정에서 개혁되어야 했다. 대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권위주의와 교수와 학생 사이의 비민주적 관계는 낡아빠진 것이었다.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어용학자들은 강단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시장의 원리는 이런 낡아빠진 권위주의를 불식시키기는커녕, 권력과 돈만을 탐하는 사이비 지식인을 대학에서 몰아내기는커녕, 그것들이 ‘경쟁력’이라고 쓰인 돈의 논리 뒤에 가려져 더욱더 번성할 수 있게 했다.

권장되는 대학과 기업의 협력은 부정과 부패를 합법화시켰다. 학문적 양심과 지식이 대수이겠는가? 그건 돈을 받고 거래할 수 있는 ‘지식상품’을 팔수 있는 능력, 소위 경쟁력을 결여한 능력 없는 자들의 자기 한탄쯤으로 치부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정부는 재정적 지원을 무기로 학문적 공동체의 연구를 규제하고 통제한다.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나누고, 연구주제를 선정하고, 대단히 얄팍한 대학평가를 근거로 대학 재정을 좌지우지 한다.

우리는 지금 낡은 권위주의와 시장의 원리와 결합해 생겨난 괴물을 보고 있다. 대학이 대학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받고 있는 희극적인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희극적이어서 비극적이다. 스스로를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임하는 대학 구성원들이 앞장서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퇴행을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더 희극적인 일이 있겠는가? 저마다 불만의 독백을 뱉어내면서 저항하지 않는 자루 속의 감자 같은 교수들보다 더 우스운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비극적이다. 미래를 열어 줄 비판적 상상력이 차단당하고, 미래를 책임 질 젊은 세대에게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다. 대단한 것을 주장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학이 대학다워지는 것, 학문적 담론이 자유롭게 토론되고, 비판적 지성을 교육할 수 있으며, 대학 자체가 학문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상식’을 요구할 뿐이다. 뒤집혀진 세상에서는 상식조차 비판의 힘을 갖는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

대학 강의실의 모습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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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대학의 회복을 바라는가!

대학이 ‘무엇’인가!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가치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대학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먼 곳을 내다보면서 기존의 관행과 규칙, 사고틀을 넘어 새로운 지식담론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지식담론이란 주어진 틀을 벗어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대학에서 배우고 길러진 사람들은 이 특별한 능력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면서도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대학이 ‘왜’ 있어야 하는가!

진실에 호응하는 건강한 비판정신의 화수분이기 때문이다. 당대 웃음거리로 취급되었던 수많은 과학적 발견은 대학이 있었으므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기술적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대학은 권력과 재력이 사회를 지배할 때에 그에 맞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했다. 심지어 기득권층을 지탱하는 권력 장치의 일부로 작동하여 대학 안에 권력을 탐하는 가짜 지식인이 가득했을 때조차도, 대학이 가지는 비판 정신이 사회의 진보와 공명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고립된 개인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지식담론을 생산하고, 특별한 역량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면서, 대학에는 학문적 공동체들이 생겨난다. 때때로 이들은 현학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배타적이라고 서로를 비판한다. 하지만 사소한 개념 하나에서도 논쟁을 벌이고 비판하면서 소통하고 반성하는 학문적 토론이 허용되지 않으면 대학은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

‘누가’ 대학을 붕괴시키는가!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산실인 대학은 점점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그것은 대학이 기술기능을 생산하고, 최적화된 직무능력을 갖춘 인력을 산출해내는 데만 집중하면서 학문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학 붕괴는 내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특별한 역량을 가진 지식인을 길러내는 학문적 공동체를 나태하고, 권위적이며, 비양심적이라고 ‘가정’하는 이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이비들이 대학을 붕괴시킨다.

대학은 ‘어디서’ 붕괴되고 있는가!

‘연구역량 강화’라는 이름으로 연구자를, ‘교육지표 개선’이라는 명분하에 교육자를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효율화하겠다는 위험한 논리로 대학은 무너져간다. 관리는 ‘질(質)’을 내세우지만, 정작 평가는 ‘양(量)’에 집착하는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량화된 평가는 교육의 밑동부터 잘라내고 있다. ‘깊은 통찰과 치열한 고민, 폭넓은 배려’는 ‘즉각적인 반응과 안일한 대책, 속 좁은 편견’보다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대학은 ‘언제’ 회복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낡은 권위주의가 시장의 원리와 결합해서 생겨난 괴물을 앞에 두고 있다. 퇴행을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경험될 때 우리는 존재의 심연에 닿는다.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자루 속의 감자처럼 스스로를 취급하는 한 이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므로 거짓과 계략에 의해 닫아걸게 된 연구실의 문을 열고 다음과 같이 ‘대학의 회복’을 요구한다.

첫째, 정부와 교육당국은 학령인구 감소 등 교육환경의 변화를 구실로 한 일체의 대학 구조조정과 고등교육 재정지원 등의 관련 정책을 즉각 중단하고 현장인 대학의 소리에 귀 기울여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하라!

둘째, 대학은 정부와 교육당국의 구조개혁 평가 및 대학재정 지원사업 등을 핑계로 추진 및 시행 중인 일체의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성과지표 개선 방안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과 품위를 당당히 회복하라!

셋째, 대학구성원은 그동안 정부와 교육당국, 대학본부에 의해 강제된 일체의 비정상적 평가와 관리 및 결과에 따른 처우에 반대하고, 이러한 퇴행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학문공동체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2017년 7월 20일

대학의 회복을 바라는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교수(가나다 順)

김동윤, 김석준, 김치완, 김희열, 문혜경, 배영환, 서영표, 신우봉, 양용준, 양정필, 유철인, 장인수, 장창은, 전영준, 정창원, 조성식, 조성윤, 최 현, 허남춘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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