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은 언제나 늦게 온다
[풀소리의 한시산책] 初夏(초하)
    2017년 06월 26일 03:28 오후

Print Friendly

옛 사람들은 단오(端午)를 여름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단오는 음력으로 5월 5일이니 양력으로 하면 5월 말 또는 6월 초입니다. 이 시절은 저처럼 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환호작약했던 온갖 꽃들이 지고 난 뒤라 허전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대신에 온 숲이 초록으로 덮이고 밤꽃이 마구마구 피어나고, 매실은 통통하게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숲 초입에 둥지를 트는 계절의 진객 노오란 꾀꼬리가 쉴 새 없이 노래를 하며 날아다니는 계절입니다.

오늘 소개할 시(詩)는 고려 때 선비 郭預(곽예) 「초하(初夏)」입니다. 꽃이 지고, 신록이 짙어지고, 매실이 여물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아마도 단오 무렵에 지은 시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이미 단오가 지났고,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이니 아마도 시 소개가 조금 늦은 거 같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라고 노래했죠.

계절에 조금 늦은 것을 기형도 시를 핑계 삼아 올려 보려고 합니다… 마침 며칠 전 서해 바닷가 옆 숲에서 열심히 날아다니던 노오란 꾀꼬리를 본 감흥을 살릴 겸 말입니다.. ㅎ

初夏(초하) : 초여름 – 郭預(곽예)

 

天枝紅卷綠初均(천지홍권녹초균)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붉은꽃 진 가지마다 초록이 가득하고

살펴보니 어느새 커진 매실 신기로와

긴긴 해를 보내기엔 낮잠이 제격인데

노란 꾀꼬리 쉼없이 나를 불러내누나

* 郭預(곽예) : 1232(고종 19)∼1286(충렬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위의 변역을 보면서 누군가 탓을 한다면 저의 두 번째 구 번역 때문일 듯합니다. ‘試指(시지)’를 흔히들 ‘시험 삼아 가리킨다’ 쯤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저는 ‘시험 삼아 가리키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試(시)’를 시험할 ‘시’가 아니라 살필 ‘시’로 해석했습니다.

‘感物新(감물신)’은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감흥이 새롭다는 뜻입니다. 단오쯤의 매실은 얼핏 보면 잎이랑 색이 비슷하여 안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벌써 이렇게 컸어?’ 하고 놀랄 정도로 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감흥이 아니었을까 하고 번역해보았습니다.

세 번째 구는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무슨 낮잠 타령이야?’ 하실지 모르지만, 단오 때는 모내기를 막 끝낸 뒤라 한숨 돌리는 시기이기도 하였답니다. 그래서 생긴 게 단오축제라죠. 암튼 시흥을 돋우기 위한 대구이니, 너무 탓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ㅎ

ps : 이번에 올리는 사진 이 계절을 대표하는 밤꽃이 핀 밤나무입니다. 허수경의 시 「기차는 간다」를 아마도 이 밤나무가 있는 고양시 원당의 원릉역에서 쓴 거 같은데, 시에 나오는 밤나무는 바로 이 밤나무인 거 같습니다. 세 구루가 있었는데, 하나는 베어지고 이제는 두 구루만 남았습니다. 독일로 떠난 시인 허수경을 생각하면서 「기차는 간다」를 함께 올립니다. 널따란 논이었을 자리에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서 감흥을 느끼기엔 아쉽지만 말입니다.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