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래 남학생들 이야기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⑯] 이성
        2017년 05월 23일 03: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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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1.5리터 담았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딸아이가 붕어처럼 마셔대는 까닭이었다. 오늘도 북한산성 입구였다. 의상봉 맞은편의 원효봉을 오르자는 딸의 제안이 있었다.

    우선 등산용품점에 들어섰다. 배낭과 바지를 골랐다. 예쁜 색들로 조화를 이룬 제품을 제안했다. 딸은 고개를 저었다. 단색이 좋다 했다. 할인인데도 상표값 때문인지 비쌌다. 배낭 5만6,000원, 바지는 5만3,400원이었다. 딸은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카드를 긁었다. 바지를 갈아입고 배낭을 멘 딸은 기뻐했다. 지금까지 제 배낭이 없었다. 바지도 제 엄마 것을 입고 다녔다.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딸내미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한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빠가 딸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원효봉 정상에서

    원효봉 정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빠, 이거 봐.”

    딸은 팔목을 내밀었다.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경이와 게임하며 팔뚝 때리기를 했는데 이렇게 됐어. 학년에서 힘이 제일 센 애야. 아파 죽을 뻔했어.”

    호들갑 떨었다. 꽤 아팠겠다 싶었다. 과학 교사가 멍을 보고선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고 200만 원 받으라고 농담했다며, 하하 웃었다.

    딸은 종점수다방에서 독서 토론을 함께한 남자 친구들을 얘기했다. 후암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대성은 정치가가 꿈이라 했다. 대성과 누리는 지난 8일 전태일재단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얽힌 전태일다리, 그리고 평화시장 안의 명보다방과 모녀식당과 옥상 등을 둘러봤다. 재단으로 옮겨 이소선 추모방도 견학했다. 70년대 평화시장 다락방 공장을 재현한 설치물에서 사진도 찍었다. 나는 둘을 안내하며 이런저런 전태일 일화를 설명했다. 일찍부터 만화와 평전으로 전태일과 친숙했던 누리는 편하게 들었다. 대성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창신시장에서 오리 주물럭을 먹이고, 막걸리도 조금씩 마시게 했다.

    한2

    딸아이는 나를 따라나섰다가 신문에 실렸다. 2001년 4월 30일자 <한겨레> 초판

    대성은 누리가 언론에 실렸다는 얘기를 듣고 부러워했다. 누리는 중학교 1학년이던 2010년, ‘전태일다리 이름 짓기 캠페인’에 참여해서 인터뷰가 <경향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엔 노동절 기념 마라톤대회에 나를 따라 나갔다가 <한겨레>에 실린 적이 있었다. 마라톤대회의 주장은 비정규직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주 40시간 노동제 등이었다. 당시는 토요일 오전까지 일을 해야 하는 주 44시간이었다. 지금은 국민 모두가 주 40시간 노동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민주노총이 수년에 걸쳐 투쟁한 결과였다. 그 투쟁의 과정에서 1999년 나는 두 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누리는 대성과 주고받은 대화를 소개했다. 대성은 일찍 결혼할 거고, 현모양처와 사는 걸 꿈꾼다고 했단다. 그러자 누리가 이렇게 반박했단다.

    “요즘 현모양처 꿈꾸는 애들이 어디 있냐. 내 친구 중엔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한 명도 없다. 나는 삼십 넘어 결혼할 거다.”

    대성은 누리가 삼십 넘어 결혼할 거라는 얘기에 깜짝 놀랐단다.

    “너는 내 아이 두 돌 때도 결혼 안 했을 거야.”

    대성이 했다는 얘기라 했다. 나는 아이들의 대화를 상상하며 웃음 지었다. 그맘때의 나는 누군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던 아이였다. 물론 현모양처를 바라긴 했다. 당시 남학생들 대부분 그랬다. 학교에서 버젓이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르치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늙어서 아내에게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되는 시대다. 아직도 그렇게 인식하는 남학생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하고 대성이는 인식 차이가 너무 큰 것 같아. 그렇지만 대성이처럼 애인은 아니면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이성 친구가 있어서 좋아. 남자애들의 세계를 많이 알 수 있기 때문이야. 나는 여고라서 남자애들 세계를 알 수가 없잖아.”

    딸은 대성의 절친인 ㄴ의 얘기도 했다. 애인이 생기고 1주 만에 키스를 했단다. 딸과 대성은 공부 잘하고 애인도 있는 ㄴ을 부러워했단다. 나는 풋 웃었다. 부러웠겠지. 한창 성에 눈뜰 시기였다. 실은 늦은 나이였다. 요즘 아이들은 발육이 빠르고 인터넷이 있어서 초등 고학년이면 성에 눈뜬다 했다. 언론과 어른이 호들갑 떨어서 그렇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딸은 원효봉만 오르고 하산하는 걸 아쉬워했다.

    “할머니랑 엄마 아빠랑 놀이공원에 놀러 가고 싶어.”

    내 머릿속에선 우리 가족 넷이면 20만 원도 훨씬 더 들 거라는 걱정이 앞섰다. 1인당 이용료만 수만 원에 달하는 놀이공원이었다.

    “어른은 별로 재미없을 텐데.”

    “그렇지 않아. 할머니는 거기서 온천하고 엄마 아빠도 재미있을 거야. 친구들하고 놀러갔을 때 보니까 어른들도 많았어.”

    나는 딸의 반론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재미있는 것 하고 나면, 가족이랑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건 할머니나 엄마 아빠가 맛있는 거 먹으면 내가 생각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딸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하~, 가시나. 아빠는 맛있는 거 먹어도 너 생각 안 해.”

    함께 웃었다. 딸이 잘 컸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2013년 6월 16일, 오늘로써 5주 연속 동반산행이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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