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와 지배자들의 사회주의?
    [책소개] 《기득권층》(오언 존스/ 북인더갭)
        2017년 04월 01일 08: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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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하층계급의 현실을 파헤친 『차브』를 펴내 세계적인 조명을 받았던 오언 존스가 두번째 책 『기득권층』으로 다시 독자들을 만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파헤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말로만 듣던 기득권층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기득권층이 하나의 정치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 이 책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발생과정과 그들이 끼치는 정치경제적 폐해를 새로운 시각으로 날카롭게 진단하며, 이에 맞설 민주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득권층

    기득권층이 도대체 무어냐?

    금수저가 흔하게 거론되는 요즘 누구나 기득권층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에서 비롯된 탄핵정국에서도 ‘기득권’이라는 말은 가장 흔하게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도대체 기득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기득권의 실체에 대해 무지할수록 기득권층에겐 이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기득권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그들은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소수집단이다. 다시 말해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 즉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집단이 바로 기득권층이다.

    이 소수 기득권층의 뿌리에는 지난 30년간 다수의 권력을 체계적으로 최상층에 재분배하는 데 앞장서온 우익 이론가들이 있었다. 저자가 선동자들(The Outriders)라고 부르는 이들은 70년대 초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수 이론가들이었다. 하이에크(F. Hayek)로 대변되는 이들 자유방임주의 이론가들은 ‘부자감세’ ‘규제철폐’ ‘민영화’ 등을 외치며 전후에 합의된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다 대처리즘-레이거노믹스를 거치며 확고한 이데올로그로 자리잡았다.

    초기 선동자들의 영향으로 태어난 애덤스미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은 보수파 사업가들에게 자금지원을 받으며 자유시장 이념을 전파했으며 국가와 공공지출의 의미를 악마화하는 데 앞장서왔다. 가령 영국의 납세자동맹 같은 단체는 납세자 권익을 옹호한다는 탈을 썼으나 실은 복지기금이나 노조 전임자를 공격함으로써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마치 우리의 전경련이나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가 그 이름과는 상관없는 기득권 옹호 단체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동자들은 그저 사업가를 옹호하는 냉소적인 돌팔이가 아니다. 선동자들은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 신념을 가지고 일하며, 바로 이 신념이 사업가들을 사로잡아 돈을 내도록 이끈다. 이처럼 현재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 논의들, 즉 ‘오버턴의 창’을 옮김으로써 선동자들은 원래는 불합리하다고 여겨진 민영화라든가 부자감세 같은 의제들을 건전한 상식이자 확고한 현실로 만들어냈다. (1장)

    그러나 기득권층이 이처럼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자유시장’은 환상에 근거하고 있음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기득권층은 작은 정부, 적은 세금을 외쳐대지만 사실 이들의 기업은 엄청난 국가 부조(扶助)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가령, 구글의 검색엔진이나 GPS서비스조차 국가의 연구개발에 의지하며 도로, 항만, 철도 같은 기반시설 없이 기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은 국가의 교육으로 키워지며 세액공제, 주택보조금 같은 복지제도는 기업의 임금을 보전해준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무너진 기업에 제공된 엄청난 구제금융을 보라. 이는 부자와 기업이 필요할 때 국가가 언제든지 나서서 그들을 구제해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선동자들을 비롯한 자유방임주의자들은 부자 기업이 아니라, 최하층을 세금 낭비의 주범으로 몰고가기 일쑤다. 켄 로치의 영화 『나, 나니엘 블레이크』에서 묘사되듯이, 자신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분노를 푸드뱅크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이들에게 돌리는 기득권층의 작태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5장, 7장)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저자가 적절하게 묘사하듯, 이런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커넥션이 존재한다. 그중 누구보다 끈끈한 이들은 바로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은 보통 기득권의 요구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 이들은 최고소득에 붙는 세금을 깎아주고 대신 부자와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후원금을 챙긴다. 기업과의 거래를 통해 사익을 챙기는 영국 정치인들의 모습은 우리 탄핵된 대통령의 행태와 그리 다르지 않다.

    또한 이런 기득권층의 생각에 약간만 어긋나는 정책을 취해도 심한 반발이 이어진다. 2013년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는 공영주택 건설, 법인세 인상, 연료비 동결 등을 공약했다가 ‘토지몰수에 나선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기득권층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여론의 입장은 다르다. 유권자들은 연료비 동결은 물론 에너지산업의 국유화를 지지하며 부동산시장에 정부가 개입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다수의 의견이 아닌,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이 더 반영된다. 이미 기득권층의 사고방식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전문 인사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정계의 많은 인물들이 기업인 출신이며, 정계 임기를 마치고 다시 기업으로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정책에 기업의 이익이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복지부 수장이 국민연금을 움직여 대기업에 도움을 주고 다시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발탁되는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도 이런 회전문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2장)

    이 와중에 언론은 애완용으로 비단뱀을 키우는 복지수급자 같은 극단적 사례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린다. 사실 언론은 독자들의 생각에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언론은 정치적 동기를 가진 소수의 소유주가 지배하며, 언론의 행태는 그 소유주의 생각에 좌우된다.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은 『선』지를 앞세워 1994년 노동당을 패배시켰으며, 보수당이 형편없이 망가지자 토니 블레어를 내세워 신노동당 정권 수립을 도왔다. 이제 기자라는 직업조차 특권층 일부에게만 개방되며, 기자가 된 후 이들이 만나는 사람도 거의 기득권층 일색이다. 언론계 인사들 역시 정치인들만큼이나 회전문을 통해 정계와 재계를 드나든다. 이렇게 기자들이 부유층 권력자와 사이좋게 지내니 언론이 현 상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장)

    국가에 귀속돼야 할 세금을 포탈하여 주머니를 채우는 일 또한 기득권층의 주특기라 할 만하다. 세계에는 기득권층을 위해 마련된 조세회피지가 널려 있으며 여기에 부자들의 재산이 은닉돼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순실 같은 우리나라 기득권층 역시 해외에 엄청난 재산을 은닉했다는 의심을 받는 중이다. 대규모 의류도매체인을 운영하는 필립 그린 경 같은 사람들은 모나코에 거주하는 그의 부인 명의로 어마어마한 배당금을 빼돌려 세금을 절약한다. 스타벅스는 영국에서 번 이윤을 스위스로 돌리는 수법으로 법인세를 한푼도 내지 않았고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기업도 국외로 수익을 전송하는 방법으로 탈세에 가담한다. 회계법인이 주로 하는 일은 합법적 탈세로, 직원을 정부에 파견해 정보를 모은 다음 이 정보로 자기 고객들에게 탈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공공서비스 공급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약탈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며 국가의 부조에 의지하면서도 세금만큼은 절대 내지 않겠다는 기득권층의 파렴치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6장)

    우주의 지배자들

    기득권층은 미국을 사랑하며 항상 미국과의 특수관계만을 떠받든다. 그러나 이라크전 같은 전쟁에서 실제로 피를 흘리는 사람은 기득권층의 자제가 아니라 실직 상태의 노동계급 청년이다. 겉으로는 ‘피의 대가’를 외치지만 이라크는 각종 이권을 노리는 기득권층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잘난 ‘테러와의 전쟁’ 덕분에 영국 청년들은 별 혐의도 없이 범죄인으로 송환돼 미국 교도소에 구금당한다.

    경찰 공권력은 지난 30년간 꾸준히 기득권층의 방패막이가 돼주었으며, 이는 잔인한 노조탄압과 민주시위에 대한 억압에서 빛을 발했다. 지난 1989년 축구장 사고로 96명의 생명을 앗아간 힐즈버러 참사는 공권력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사건을 왜곡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술 취한 훌리건이 아니라, 경찰에게 사고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무려 23년이 걸렸다. 공권력의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 정보당국은 민주단체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여성을 상대로 위장결혼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영국 사회의 엄청난 공분을 몰고 왔다. (4장, 8장)

    이처럼 70년대 선동가들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시작된 기득권층의 반민주적 권력은 이제 학계나 정계, 언론계, 금융계, 공권력을 가릴 것 없이 전 영역에 걸쳐 확고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민주세력이 새로운 씨앗을 키워갈 때라고 주장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수 선동자들이 확고한 신념으로 세상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듯이, 이제 민주단체와 노동조합, 반체제 경제학자들이 힘을 모아 우리의 선동자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반노조법을 개혁해 노조가 다시 숨을 쉬게 해야 하며, 각 노동현장에서 민주적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 민영화 대신 민주적 공영화를 이루고 경제가 금융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현대적 제조업을 육성해야 한다. 저자는 ‘권력은 요구 없이 그 무엇도 내주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역사가 그저 소수의 영웅놀이가 아니듯, 이제 세계는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힘으로 사회정의를 이뤄나가야 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오랫동안 기득권층의 지배에 시달려온 대한민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의미있는 도전이 될 것이며, 저항의 의지와 희망 또한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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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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