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의 정치·사회참여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
        2017년 03월 30일 02: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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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록 밴드 블러(Blur)의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의 또 다른 직업은 정치인이다. 노동당의 활동가로 네 차례에 걸쳐 선거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심지어 2011년에는 클리브 루이스와의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여 본선에도 나서지 못했다.

    론드리

    데이브 로운트리(출처=위키피디아)

    ‘신노동당 운동(New Labour)’을 지지하는 당내 우파에 속하기 때문에 당분간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만들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제레미 코빈과는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속한 블러가 활동을 재개했다는 점도 정치 경력의 장애물로 작용할 듯하다. 그를 오랫동안 무대에서 보고 싶어하는 팬들에겐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록 스타가 후보가 되어 선거유세를 다니는 모습은 한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연예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정치 현안과 사회 쟁점들에 대해 중립성을 지킬 것을 요구 받는다. 입장이 분명할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데, 직업활동에 족쇄를 채워가며 정치적 입장을 표출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예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부패정치인이기도 했던 신성일의 사례도 있고, 마찬가지로 국회의원 생활을 했던 이순재, 이주일, 강부자, 최근까지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김을동, 시의원이었던 이선희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가 있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연예인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시하는 악습이 없었던 것인지, 그 낙인이 보수정당 정치인들에게는 항상 예외가 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진보정당에서 연예인, 예술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과연 보수정당의 그것보다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정당에서 예술인이 선거운동의 ‘꽃’이 되고, 지지선언을 조직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문화행사를 꾸리는 존재 이상으로 자리매김했던 적이 있을까? 진보정당 역사에서 그런 순간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지금도 정의당은 쟁쟁한 유명인들이 연달아 지지선언을 하는 상황을 부러워하고 있다. 문재인의 경우처럼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발 벗고 나설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정의당이 그들이 꿈꾸는 삶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을 때, 실현가능한 목표다. 보수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인들을 수동적인 도구, 당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계속될수록 문화계와 진보정치의 거리감은 커져만 갈 것이다.

    일상적인 정치의 현장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술인의 모범사례로 김제동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오기까지 그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떤 환경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내놓는 이야기들이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도 짚어보아야 한다. 그는 방송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갖고 있다. 적지 않은 방송국들이 그에게 등 돌렸지만, 그는 극장에서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는 최소한 대한민국의 시민 50%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어쩌면 지금 국면에서는 그 이상일수도 있다. 그의 전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김제동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정치 참여는 가능한데,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관심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글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 가난을 감수한다는 전근대적인 예술관을 피력하는 것은 더더욱 거부하고 싶다. 단지 한국의 사회문화 속에서 예술가가 조금 덜 공감 받고, 더 논쟁적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직장 밖에서 무엇을 하고 즐기느냐의 문제로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아야 한다. 대중의 뜻을 거스를 때 돌아오는 위험부담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돌을 들 수 있는데, 이제는 상당히 관대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돌의 공개연애는 적지 않은 비난을 감내해야한다. 기계적 중립이나 특정한 입장을 강요받는 것도 여전하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이기 때문에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하지만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준하는, 어쩌면 그 이상의 인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마땅히 감내해야하는 일이라면 예술가가 대중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진보정당의 활동에 참여할 동기는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서지 못하면 예술인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사회를 이루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정당의 인지도를 높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복잡다단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의제들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소개
    문화정책과 예술노동에 관심이 많은 미술비평가. 전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 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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