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농부의 봄맞이
    [낭만파 농부의 시골살이] 농한기
        2017년 03월 16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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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편집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귀농하여 6년째 시골농부로 살아가는 차남호 씨의 농부일기를 새로 연재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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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봄이다. 들녘은 잔뜩 물이 올랐다. 매화는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고 눈부신 꽃 잔치가 이어질 것이다.

    겨울은 갔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계절을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광장에도 봄은 왔다. 지난 겨울은 아스팔트의 차가운 한기로 기억된다. 이제 그 추위와 함께 ‘겨울공화국’도 물러갔다. 이 아니 기쁠 손가.

    전주 관통로, 서울 광화문. 촛불은 뜨겁게 타올랐지만 거리는 추웠더랬다. 손난로도, 무릎담요도 어찌할 수 없던 찬 공기. 주말이면 ‘박근혜 퇴진’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 거리 한 자리를 지켜왔다. 돌아보니 스스로 뿌듯하다. 꼭 그럴 작정은 아니었지만 꾸역꾸역 단 한 차례도 빼먹지 않은 개근이다.

    자, 그 다음.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다. 겨울 거리에 주저앉아 상상했던 그 세계가 이루어지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일을 하게 될 터인데, 참 고민이다.

    어쨌거나 봄이다. 자연의 섭리는 봄을 씨 뿌리는 농부의 계절이라 가르쳐왔다. 비로소 시작되는 3월이 절반이나 지났지만 나의 농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시골살이 7년째, 내가 짓는 건 여전히 벼농사 한 가지다.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내려와 보니 마땅히 지어 먹을 게 손에 잡히지 않았더랬다. 이곳 어른들은 “돈 좀 만지려면 소 키우라!”라고. 또 누구는 시설채소를 얘기하고. 또는 무슨 특용작물은 어떻고. 돈이 될 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연생태를 갉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차 떼고, 포 떼고 남은 것이 유기농 벼농사다. 생태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일이 쉽지 않은 시절이다.

    그 벼농사는 앞으로 달포 넘게 지나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가을걷이 뒤 맞은 나의 농한기는 세 갈래로 펼쳐졌더랬다. 앞서 말한 박근혜 퇴진 투쟁이 그 하나고, 나머지 둘은 집짓기와 ‘농한기 강좌’.

    먼저 집짓기부터. 손수 집을 지을 팔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더욱이 ‘이미 지어진 집을 고쳐서 사는 것이 가장 생태적인 주거 방향’이라 믿어왔던 나로서는 무척 곤혹스런 상황이기도 하다. 여기 내려와서부터 줄곧 6년을 지금의 셋집에서 살아왔다. 그새 우여곡절이 있었고,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 참에 아예 집을 사려고 했지만 조건에 맞는 집을 찾지 못했다. 결국 1년여 전 여럿이서 함께 집터를 구한 뒤 석 달 전부터 건축공사를 벌여왔고, 지금은 마무리 단계다.

    집짓기

    집 짓는 모습(사진=필자 페북)

    아직도 집을 새로 지어 생태에 부담을 주게 됐다는 자책감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경량목 구조에 최대한 생태적인 공법을 적용했다는 점을 위안거리 삼고 있다. 농한기에 착공한 덕분에 공사기간 내내 개근을 하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로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사실 생태적 부담도 부담이지만 ‘집 짓다가 10년은 늙는다’는 말을 많이 들어 걱정이 컸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된 지난 석 달 동안 힘들거나 거북했던 일은 거의 없었고, 외려 과정을 즐기는 편이었다. 막판에 건축비가 바닥나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난생 처음 ‘건축주’라는 이름의 ‘사용자’ 처지에 서 본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가 반평생 노동운동하면서 추구했던 가치와 원칙을 그대로 실천하려 애썼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울러 가까이 지내는 동네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집짓기에 함께 참여해준 것도 나로서는 가슴 벅찬 일이다. 그래, ‘소유권’을 나누긴 힘들겠지만 ‘사용권’ 만큼은 집을 함께 지어준 목수들과 동네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나눌 작정이다.

    다음으로 농한기 강좌. 그러께 시작돼 이번이 세 번째였다. 나처럼 유기농 벼농사를 짓고 있거나 지어보려는 귀농·귀촌인들이 함께 꾸린 ‘벼농사모임’이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이번에는 밭농사가 주류인 ‘토종씨앗모임’과 함께 강좌를 마련했는데 유기농 벼농사, 농업농촌의 현실과 전망, 여성농민으로 살아가기, 토종작물과 자연농, 유기농 채소농사, 농촌에서 손수 건강 돌보기, 농업 관련 제도 등을 공부했다. 강사로는 관계 전문가와 선배 농사꾼을 모셨고, 강좌를 마무리하면서는 1박2일 수련회도 다녀왔다.

    벼농사모임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무런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대표자도 없고, 운영을 주관할 총무 같은 사람도, 정례회비도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못자리를 함께 짓는 등 ‘두레’로 기능했고, 농촌공동체에 의미 있는 활동도 펼쳐왔다. 이제 그에 걸맞는 틀을 갖춰보자는 의논이 있지만 서둘지는 않고 있다.

    강좌

    농한기 강좌 모습

    어쨌거나 올해 농사를 위한 마음의 준비는 끝난 셈이다. 또 한 해, 자박자박 걸어가 보는 거다.

    * * *

    지난 가을, <레디앙>의 거듭된 부름에 화답했지만 가을걷이로 경황이 없었고, 곧이어 집짓기 공사에 들어가면서 틈을 내기 어려웠다. 이제 집짓기도 끝나가는 마당이라 더는 미룰 면목이 없어 이렇게 첫 소식을 띄운다.

    독자들 중에는 ‘농부 차남호’를 알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고, ‘민주노총 편집국장’으로 기억하는 이도 꽤 될 듯싶다. 물론 대다수 독자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6년 전 ‘홀연히’ 귀농을 했고, 2014년 말까지 3년 남짓 격월간 <함께하는 품>(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 ‘새내기농사꾼 일기’를 연재한 바 있다. 지금은 물론 새내기 단계는 벗어났다. 나아가 완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귀농연수생 현장실습 프로그램(멘토링)에서 ‘유기농 벼농사’ 분야의 선도농가(멘토) 노릇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집까지 지어 정착하게 됐으니 영락없는 농사꾼이 된 셈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처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는 법이다. 문득문득 그걸 느끼게 된다. 노동운동가로 살 때와 견줘 많이 느긋해지고, 너그러워진 것 같다. 역사적 소명의식은 옅어진 대신 ‘소소한 행복감’은 더 커진 듯하다. 이 꼭지를 통해 나의 시골살이를 덤덤히 전하려 한다. ‘인생2막’이나 ‘도시탈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타산지석’이나마 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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