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와 이민, 어떤 불편함
        2017년 03월 06일 03: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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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강의 건으로 LA 코리아타운에서 며칠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의 이민자들과 접촉하면서 느끼는 것은…이런 이민사회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과 함께 ‘이민’이라는 현상에 대한 어떤 불편함 같은 것입니다. 사실 저도 노르웨이에서 고등교육부문 이민 노동자로 종사하면서 살기에, 이 불편함이란 제 견문과 함께 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견문은 제 경험과 많이 겹치기도 하지요.

    이민이란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돼온 현상이죠. 생각해보면, 7세기 당나라 법상종의 기린아가 된 신라 출신의 문아원측 스님도, 고려 광종 시대에 과거시험제를 도입한 중국 출신의 쌍기 같은 사람도 결국 ‘이민자’이었죠. 그러니까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의 이민사란 아주 오랜 것입니다. 하지만 인력의 대량 월경 이동은 동아시아에서는 근대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전통사회는 주요 납세자인 농민 가구들의 월경 이동을 대개는 극적으로 제한시키곤 했으니까요. 근대와 함께 본격화된 만큼, 이민은 근대의 모든 문제점들을 다 공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민이라는 게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민 대상국 총자본으로서 이민 오는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게 다 ‘거래’가 되지만, 이민만큼의 철저한 거래 타산도 없지요. 이민 받는 쪽의 지배층 입장에서 말씀입니다.

    꼭 저임금 노동력의 이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작은 데리야끼집이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인 이민자나, 스타트업 IT회사에서 고생하는 인도계 프로그래머는, 꼭 저임금/저소득자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닐 확률은 더 높죠.

    기본적으로는 미국은 아직도 고임금 사회에 속하고, 전문성 있는 자영업이나 고숙련 임금 노동에는 상당한 대가가 따릅니다. 한데 한인 세탁소 운영은, 어쩌면 1주일 6일, 하루 10-12시간이나 그 이상의 노동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스타트업 프로그래머도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의미하는 직업입니다. 현지인으로서는 전혀 갖고 싶지 않은 사회적 포지션일 수도 있는데, 그런 포지션을 바로 이민자들이 채웁니다. 현지인에게는 선택이 보다 풍부하지만, 이민자의 선택의 폭은 늘 훨씬 더 좁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같은 종류의 정객들이 반이민 궤변으로 혹세무민하지만, 사실 이민 대상국 총자본으로서는 이민은 이익이 됩니다. 대단한 이익입니다. 트럼프의 “때리기” 대상인 중남미계 미등록 이민자들은 많은 주에서는 그 경제를 밑에서 뒷받침해주는 “토대”입니다. 저임금 무권리 노동이라는 토대가 없어지면 거기에서의 축적 과정 자체가 흔들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강경 단속은 있어도 곧 새로운 미등록 노동자들이 꼭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미국 대학 수학과나 물리학과에서 중국, 인도, 한국, 러시아계 교원과 박사과정 학생들이 만약 빠져나가면? 운영이 엄청나게 어려워집니다.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 교원이나 연구원은 물론 저임금 노동력은 아니지만, 그의 이민은 미국으로서는 “이기는 게임”입니다. 왜냐하면 그 개개인의 학력자본 형성에 중국, 인도, 러시아 등지의 공공지출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즉, 미국은 돈을 훨씬 덜 들이면서 고급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너무나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봐야죠. 이민이란 결국 핵심부 부국들을 더 부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극우 정객들의 그 모든 궤변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물론 한국인이나 러시아인들이 미국이나 독일로 갈 때에 미국이나 독일의 총자본을 살찌우기 위한 사명을 띠고 가는 거는 절대 아닙니다. 한국인이나 러시아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준주변부 사회들의 보편적인 모순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신분 대물림 심화, 신분 상승기회의 박탈, 러시아의 퇴락되는 공공의료체계, 한국의 육아/교육이라는 참극….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준주변부 출신들이 핵심부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핵심부 사회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회관계의 일부분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핵심부의 서열에서는 그들이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해야 하는 상대적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최하부 피해자들의 노동 착취에 가담할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 영세업체 주인은 하루에 13시간이나 일하는 사회적 피해자인 동시에,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가해성이 있는 위치에 설 수도 있는 거죠. 러시아 엔지니어가 근무하는 회사의 청소 노동자는 아마도 중미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일 테고, 그의 저임금과 러시아 엔지니어의 상대적 고임금은 꼭 서로 상관이 없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이민 오는 바로 그 순간 복잡한 서열/착취 관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민은 자본제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버팀목’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본제 피해자 개개인에게는 그들의 개인적 문제를 풀어주는 ‘해결책’으로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일부 문제들이 해결되긴 하지요. 제가 만약 지금 노르웨이로 이민가지 않고 한국 사립대학이라는 마피아 집단의 비정규직으로 있었으면 과연 그 마피아 집단에 대해 마음대로 발언하기가 쉬웠겠습니까? 한데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는 동시에 또 핵심부 자본제 사회의 다른 문제들이 바로 “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민이 핵심부 사회 안에서의 계급투쟁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면, 즉 이민자 본인이 자신의 이민 행위가 갖는 의미들을 파악하여 새로운 곳에서 각종 피해자들의 투쟁에 합류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데 자본주의 사회 하루하루 “생존”의 전투 속에서는 투쟁 참여란 말처럼 쉽지 않아 문제이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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