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혁명을 원하는가?
    [왼쪽에서 본 F1] 고정관념의 거부
        2017년 03월 03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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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은 ‘포뮬러(Formula)’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규정’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매 시즌 조금씩 규정이 바뀌면 각 팀이 이에 대응해 새 레이스카를 개발합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종종 규정이 대폭 바뀌는 경우도 생깁니다. 규정이 많이 바뀌면 그만큼 F1 팀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의 양도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F1에서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뒀던 페라리의 디자이너 로리 번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특유의 개발 철학이 있었습니다.

    “혁명이 아닌 진화( Evolution Not Revolution )”

    혁명적으로 모든 것을 뜯어고치기보다는 이전에 닦아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수한 레이스카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철학이었습니다.

    페라리가 6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 5년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할 때, 로리 번은 매 시즌 진화하는 레이스카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혁명적인 변화는 많지 않았습니다. 로리 번이 과거 1994시즌 처음으로 베네통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안겨줄 때 디자인했던 레이스카 역시 3~4년 전의 레이스카를 ‘진화’시킨 결과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혁명적인 변화보다 기반을 다지고 차근차근 진화시키는 것’은 F1 레이스카 디자인의 정설에 가깝습니다. 늘 미지의 영역에서 경쟁해야 하는 F1 팀들이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가 큰 낭패를 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대 2시간을 달리는 레이스에서 이기기 위해선 무엇보다 ‘문제없이 완주하는 것’이 중요한데, 혁명적인 변화는 알 수 없는 문제를 불러올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자동차와 달리 기술적인 한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F1 레이스카는 미세한 문제만으로도 완전히 멈춰 서버릴 수 있으니, 가능한 문제를 피해야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F1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빨리 달리는 차를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완주할 수 있는 차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F1 팀의 목표는 단 하나 ‘승리’이지만,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결승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이기기 위해서 무리하게 신기술과 새로운 시도를 접목한다고 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다수의 F1 레이스카의 디자이너들은 로리 번을 롤 모델로 삼지 않더라도 ‘혁명이 아닌 진화’를 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7시즌 새로운 레이스카를 공개하는 순간

    2017시즌 새로운 레이스카를 공개하는 순간

    그런데, ‘혁명이 아닌 진화’만 가득한 F1 레이스카 개발 경쟁은 경쟁 구도를 정체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각 팀이 가지고 있는 개발 자원은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있습니다. 대형 매뉴팩쳐러, 그러니까 직접 자동차의 모든 부분을 다 만들 수 있는 자동차 제조사나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고 있는 ‘빅 팀’과 비교하면, 소형 독립 팀의 규모와 자원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레이스카 개발과 기술 연구, 테스트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심한 경우 열 배 이상 차이 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소형 팀의 한 명이 연구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대형 팀에서는 같은 능력을 가진 열 사람이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유리할까 고민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레이스카를 개발하고 조금씩 진화시켜나가는 방식은 대형 팀에게 극단적으로 유리합니다. 마치 제논의 역설에서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소형 팀에서 아무리 과거의 레이스카를 진화시키더라도, 대형 팀은 일정 수준 이상 더 진화한 레이스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소형 팀이 대형 팀의 최첨단 기술을 빠르게 접목해 업데이트를 내놓으면, 어느덧 앞서가던 팀에는 새로운 신기술이 탑재되곤 합니다. 그나마 따라갈 수라도 있다면 다행이지만, 소형 팀이 아킬레우스, 대형 팀이 거북이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힘이 없고 자본이 없는 소형 팀들은 혁명적인 규정 변화를 원합니다.

    규정이 혁명적으로 바뀌면, ‘혁명이 아닌 진화’가 불가능해지고, 모든 팀의 레이스카에 혁명이 이뤄집니다. 변수가 크면 클수록 소형 팀에겐 대세를 뒤집을 기회가 생기는 셈입니다. 간혹 일어나는 F1의 혁명적 규정 변화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희년이나, 토지 재분배 같은 충격적인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계급의 역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회’는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17시즌 혁명적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테스트에 몰두하는 F1 팀

    2017시즌 혁명적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테스트에 몰두하는 F1 팀

    반론도 있습니다. 어차피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결국 자본이 충분한 대형 팀이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게 되어있다는 큰 틀은 바뀌지 않는다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과거의 F1 역사를 돌이켜보면 혁명적인 규정 변화가 F1 팀의 서열을 완전히 거꾸로 뒤바꿔놓은 예는 없습니다. 새로 개발해야 할 것이 늘어나면서 소형 팀의 시간적, 경제적 부담이 폭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보수적인’ F1 팬들은 혁명적인 규정 변경이 무의미하다는 ‘규정 변화 무용론’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인 F1의 서열에서 늘 하위 계급에 속해 있던 소형 팀들은 혁명적인 규정 변화를 원합니다. ‘진보적인’ F1 팬들의 생각은 ‘서열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보수적인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소형 팀, 강자와의 싸움에서 간혹 카운터펀치를 꽂는 언더독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소형 팀이 그냥 대형 팀이 되어 자리를 빼앗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승자가 결정되는 근본적인 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생각과 진보적인 생각은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진보적인 F1 팬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은 것은, 필자를 포함한 오랜 F1 팬들이 이해하는 F1의 본질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1은 처음부터 늘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과제를 잘 해결한 팀들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안겨주는 도전의 스포츠였기 때문입니다. ‘늘 언제나 강팀’이라는 계급이 고착화된다면 고정 팬들을 끌어모으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스포츠의 본질이 위협당하면서 결국 F1이라는 스포츠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2017시즌 F1은 68년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큰 규정 변화를 맞이합니다. 일부 팬들은 어차피 그래 봐야 늘 잘하던 팀이 잘할 것이고, 경쟁 구도와 서열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판이 완전히 뒤바뀌는 상황 속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강팀, 대형팀이 준비를 잘하겠지만, 혁명적인 변화라면 모든 변수에 대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큽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설적인 F1 해설가 머레이 워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랑프리 레이싱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종종 일어난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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