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감한 나쁜 여자들
    [책소개]《나쁜 여자 전성시대》(앨리스 에콜스/ 이매진)
        2017년 02월 25일 09: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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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도 계보가 필요하다
    ― 미국 급진 페미니즘의 살아 숨쉬는 역사

    우리는 ‘긴 60년대’에 살고 있다. 강남역 살인 사건, 낙태죄 폐지 요구 ‘검은 시위’, ‘#○○_내_성폭력’ 운동 등 요즘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페미니즘 이슈들은 어떤 데자뷰다. 베트남 전쟁과 반전 운동, 68혁명과 신좌파, 달 착륙과 블랙 파워가 숨가쁘게 이어지던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미국 사회를 뒤흔든 급진 페미니즘이 겹쳐 보인다.

    급진 페미니즘 운동은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미스아메리카 대회를 ‘폭파’하자 하고, 낙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한 사회의 문화와 정치의 풍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나쁜 여자 전성시대 ―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는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이론의 낡은 틀을 부수고 실천의 광장으로 나아간 ‘나쁜 여자’들의 전성시대를 꼼꼼히 새긴 기록화다.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른 실패한 도발일 뿐이라며 비웃음도 사지만, 이론에 갇히지 않고 현실로 뛰어든 행동 속에서 여성들은 목소리를 되찾았다.

    앨리스 에콜스는 어스름한 신화의 불빛에서 급진 페미니즘 운동을 끄집어내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실체를 부여한다. 폭발적 부상, 뼈아픈 분열, 돌연한 쇠퇴로 이어진 궤적을 따라, 뿌리 없다고 여기던 ‘우리들’을 페미니즘의 뿌리로 이끈다.

    나쁜 여자

    선언과 구호에 가려진 목소리들
    ― 뉴욕급진여성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거쳐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까지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취급해 공적 영역에 통합하라는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혁명이 여성 해방을 가져온다는 ‘운동권’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거부했다.

    여성은 일종의 ‘성계급’을 구성하며, 계급보다는 젠더가 주요한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남성은 여성 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억압자며, 가족과 결혼과 연애는 사라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안전하고 손쉬운 피임법, 낙태 금지법 폐지, 공동체가 돌보는 좋은 어린이집, 미디어의 여성 대상화 종식 등을 내걸고 싸웠다. ‘의식 고양(conscious-raising)’을 가장 효율적인 조직화 도구로 활용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옥죄는 문화적 금지령에 도전하는 와중에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감히 나쁜 여자가 됐’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을 왼쪽으로 끌어당기고 운동권을 페미니즘 쪽으로 밀어 움직이면서, 급진 페미니즘은 논쟁의 지형을 바꾸고 새로운 싸움의 언어를 벼려냈다. 1970년에는 전국여성기구와 여러 여성 해방 그룹들이 손잡고 ‘평등을 위한 여성 파업’을 벌여 24시간제 어린이집, 수요자의 필요에 따른 낙태, 여성을 위한 동등한 고용과 교육 기회 등을 요구했다. 사회주의 여성 해방 조직 ‘빵과 장미’에서 온 대표들은 전국 학생 파업 집회에서 자기들을 남성 지배와 남성 우월주의를 깨뜨리는 운동의 일부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에서 급진 페미니즘은 노선 다툼과 조직 분열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접어들어 급진 페미니즘은 자기들이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문화 페미니즘이 드리운 그림자에 뒤덮이면서 하나의 운동으로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사회 변혁에서 개인의 변화로 여성 해방 운동의 초점이 바뀌면서 특유의 행동주의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넘겨줬다. 이런 급진 페미니즘은 세 명제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자매애는 강하다.’

    《나쁜 여자 전성시대》는 1장에서 신좌파와 민권 운동에 속한 여성들, 대개 백인인 여성들이 평등을 내세우는 ‘운동’의 언어와 운동 안에서 종속된 자기들의 처지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짧게 살펴본다.

    2장에서는 1967년 말부터 1969년 초까지 여성 해방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운동의 초창기 그룹들과 최초의 균열, 특히 초기 운동에 큰 타격을 입힌, 운동권과 페미니스트의 분열을 분석한다.

    3장에서는 여성 해방 운동과 ‘운동’ 일반의 관계가 악화된 사정과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좌파의 경계 바깥에서 여성을 조직하기로 결정하면서 갈등이 정점에 다다르는 모습을 검토한다.

    4장에서는 레드스타킹스, 셀16, ‘페미니스트들’, 뉴욕급진페미니스트 등 운동 초기에 가장 영향력이 크던 그룹 4개를 중심으로 급진 페미니즘의 여러 다른 경향들을 분석한다.

    5장에서는 197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여성 해방 운동을 뒤흔든, 계급, 엘리트주의, 레즈비어니즘 문제를 둘러싼 운동 내부의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내부 투쟁들이 문화 페미니즘이 부상하는 데 기여한 과정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6장에서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지는 시기를 다룬다. 이 시기에는 문화 페미니즘이 급진 페미니즘을 대신해 운동 안에서 가장 주요한 경향이 됐다. 여기서는 문화 페미니즘의 명료화, 페미니즘 반문화의 발전, 문화 페미니즘에 맞선 급진 페미니즘의 저항 등을 탐구한다.

    에필로그에서는 1975년 이후 페미니즘이 발전한 모습을 분석하는데, 특히 포르노그래피 반대 운동과 이 운동이 촉발한 섹스 논쟁, 유색인 여성들이 이 시기에 페미니즘에 제공한 중요한 이론적 기여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오래된 현재와 용감한 나쁜 여자들
    ― 더 편협한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페미니즘들

    《나쁜 여자 전성시대》에 기록된 미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역사가 뻗은 뿌리는 지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꾸려가는 삶으로 이어진다. 날 선 구호, 선언, 이론 뒤에 가려진 반짝이는 지혜를 길어 올려 고뇌와 성찰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갈등하고 좌절한 ‘나쁜 여자’들의 목소리가 꿰뚫은 시대의 풍경을 ‘우리들’의 시각으로 담아낸, 꽤나 편협한 페미니즘 역사서라서 그렇다.

    그 역사의 요동을 찬찬히 따라갈 때 스멀스멀 떠오르는 데자뷰들, 미국 급진 페미니즘의 짧은 전성기를 구성하는 어떤 장면들이 한국의 페미니즘‘들’에 완전히 포개질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오류와 실패만 유난히 과장해서 편협한 사상이라고 공격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미국 급진 페미니즘의 주역들이 껴안은 고뇌와 성찰은 지금 여기에서 또 다른 나쁜 여자들의 전성시대를 열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건네준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계보’가 필요하며, 페미니즘은 ‘더 편협한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약속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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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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