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공포 이겨야 할 때
공포의 조장을 경계하고 분노하는 나와 우리를 믿자.
    2016년 12월 07일 1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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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박근혜가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은 이미 몇 차례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다. 거국내각과 자진 사퇴를 주장하던 야당과 비박계가 국민들의 힘에 눌려 탄핵을 강행하겠다고 천명했을 때, 재벌 총수 9명이 28년 만에 청문회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등이 그러하다.

집회

11월 26일 광화문 촛불집회의 모습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광장의 요구가 박근혜 퇴진만이 아닌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재벌 개혁, 비정규직 철폐, 노동악법 폐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퇴진 구호와 함께 터져 나오는 이 같은 요구를 조금이라도 현실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무엇이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또 무엇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추미애와 우상호, 박지원 등의 정치인과 조국 같은 폴리페서가 무엇 때문에 탄핵을 주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탄핵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회구조와 행위를 매개하는 것은 감정이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고 그러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감정이다. 그리고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바로 분노이다. 광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낸 힘이 ‘분노’였다면 정치적 계산으로 책임총리와 거국내각,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한 이들의 감정은 ‘공포’이다.

분노와 공포는 변화와 안정에 대응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변화의 욕구가 나온다면 미래의 불안정성은 공포를 초래한다. 따라서 같은 상황이라도 변화의 욕구가 크다면 분노를, 안정이 우선이라면 공포를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청와대 앞 경찰 저지선에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계엄령이 발포될 것”, “탄핵이 발의되더라도 헌재에서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하며 사람들을 주저하게 만든 발언은 분노보다 공포가 클 때 나올 수 있다. 또 그러한 공포의 배경에는 변화보다는 안정에 대한 희구가 자리하고 있다.

반대로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고 한 시간이라도 더 버티며 공권력의 부당한 금지를 넘고자 한 사람들의 감정은 분노이다. 공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더 큰 분노가 공포를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분노는 안정적일 수 없는 현실의 처지와, 불안정하더라도 지금과는 다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고 여긴다면 더 이상은 안정을 바라는 자들이 조장하는 공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박근혜 탄핵을 넘어 나와 우리의 생존권과 인권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기를 바란다면 안정적인 그들이 더 이상 공포를 조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야당과 기득권 지식인들이 자신의 주장을 접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난 것은 더 큰 분노로써 앞으로 나간 나와 우리의 한 걸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비박계가 탄핵에 동참하고, 재벌 총수가 청문회에 나온 것은 백만, 2백만 촛불의 분노에서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공포에 눌려 분노를 꺾지 말고 분노로써 공포를 이겨야 한다. 공포를 조장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더 큰 분노로써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해야 한다. 변화를 바란다면, 분노하는 나와 우리를 믿어야 한다.

필자소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례로 역사학과 행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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