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배울 것인가,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촛불 항쟁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공감대 만들어야 할 시기
        2016년 12월 05일 01: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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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은 ‘백만 촛불’, ‘2백만 촛불’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일단 그 규모 면에서 87년 6월 투쟁과 비교되며, 나아가 정치적 구도나 쟁점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결과마저 닮아버리게 된다면? 많은 이들은 6·29선언을 ‘전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 들였지만, 바로 그 직선제 개헌에 의한 승자는 군부독재의 계승자 노태우 후보였다. (총투표율 89.2%. 득표율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 김종필 8.1%, 백기완 중도사퇴.)

    어떻게 이런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나? 우리는 과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물론 본질적 차이도 존재한다. 사회경제적 조건, 시위가 촉발된 계기와 이를 주도한 세력, 시위 참가자들의 기대 등등. 이런 차이로부터도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테지만,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87년과16년

    87년 6월 항쟁 당시의 시청 앞 모습(위)과 2016년 12월 3일 광화문과 시청 앞의 모습

    87년 6·29선언 후 노선분화

    “6월 국민항쟁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민주대장정이었으며,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노태우의 민주화 8개항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4천만 민중에 대한 조직적 지도력을 갖추지 못한 채 ‘예기치 않은’ 승리의 성과물을 안게 되었던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6·29선언과 함께 향후 투쟁의 올바른 방향을 신속히 합의해 내지 못하고 다기한 투쟁노선으로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7년 11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리포트4: 군부독재 종식과 선거투쟁>)

    ‘예기치 않은 승리’라는 표현만큼이나 민중운동은 6·29선언에 대한 인식과 투쟁노선에서 분기했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한마디로 ‘선거혁명론’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계열은 여야 민주화 공동선언을 전제로 한 반면, 김대중 계열은 거국중립내각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즉 여당, 민정당에 대한 태도라는 측면에서 입장의 분기가 드러났다.

    민중운동 역시 입장이 분화되는데, 크게 보면 ‘군부독재 종식 투쟁론’과 ‘군부독재 타도 투쟁론’으로 대별되었다. 군부독재 종식 투쟁론이란 현재의 운동 역량으로는 물리력으로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선거에서 군부독재의 재집권을 저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군부독재 타도 투쟁론이란 군부독재는 선거가 아니라 민중의 힘에 의해서만 종국적으로 타도될 수 있으므로 비타협적 반군부독재 전선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자는 입장이었다.

    선거를 통한 국부독재 종식이란 입장은 서대협(서울지역대학대표자협의회)-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입장이자,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노선의 출발점이 되었다. 반면 국부독재 타도 투쟁론은 노동자운동과 학생운동의 다양한 그룹의 노선과 실천에서 기초가 되었다.

    민중운동의 입장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변형, 구체화된다. 예를 들어 ‘범민주과도정부론’의 온건 판본은 전두환-노태우 일당이 즉각 퇴진하고 군부정권을 제외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각계각층의 대표로 과도정부를 구성하며, 이를 바탕으로 선거에서 노태우의 재집권을 저지하자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과도정부는 양심수 석방과 해고노동자 원상회복, 공정한 선거관리를 임무로 한다.

    또한 급진 판본은 좀 더 강한 의미의 ‘임시혁명정부론’이었다. 민주화는 군부독재와 타협, 선거에 의해 달성될 수 없으므로 독재를 완전히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자주적 민주정부 또는 민중민주주의정부)가 건설되어야 한다. 따라서 과도정부는 새로운 정부로 나아가기 위한 대체권력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당면 시기에는 미제와 군부파쇼의 음모를 폭로하고, 새로운 정부에 관한 강령을 선동, 선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7-8월 노동자투쟁

    “민족민주운동 내부에서의 군부독재 타도 투쟁론과 군부독재 종식 투쟁론 사이의 현란한 논쟁은 민족민주세력의 한계의 표현인 동시에 군부독재 반격에 대처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을 거치면서 현 정권의 폭력적 탄압, 용공좌경척결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민족민주세력은 결과적으로 노동자들과 유리되었다. [8월 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 시위 중 최류탄 직격으로 사망.]” (<기사연 리포트4>.)

    6·29선언은 ‘민중승리의 산물’이자 ‘군부독재와 미국의 역공세’라는 이중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면, 1차적 승리를 2단계 승리로 이끌고 나갈 분명한 노선을 제시하고 조직을 구축하며 군부와 미국의 역공세를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11월 시점의 평가에서 드러나듯, 오히려 군부와 미국의 역공세가 상당한 효과를 거두는 양상이 나타났다.

    군부독재는 노동자대투쟁을 포함해 기층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탄압하며 노동자의 폭력을 부각시키고 ‘패륜집단’으로 몰아 노동자와 중간층을 분리하고, 선거 분위기를 주도하며 과도정부를 요구하거나 군부독재 즉각 타도를 외치는 민중운동을 고립시켰다. (당시에는 정부, 여당의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가 초점으로 부각되지 않아 과도정부 요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민족민주세력은 6월투쟁의 과정에서도 조직력을 기반으로 했다기보다는 단지 대중투쟁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자기역할을 해왔다. 그 때문에 민족민주세력으로서는 6·29 이후의 상항을 자신의 조직역량 강화에 활용해야만 했다. 즉 6·29의 양면성을 국민대중 앞에 정확히 폭로하고 참된 민주주의의 내용을 획득하기 위한 대중적 투쟁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서 대중을 묶어세워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민족민주세력은 7-8월 노동자투쟁을 거의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시기 노동자투쟁은 단지 기층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6월 민주화대투쟁의 본질적 의미를 이어받은, 민주화의 저변을 확대한다는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기사연 리포트4>.)

    개헌과 국본의 개헌요강

    야당은 6.29 직후 개헌 협상과 대선 일정을 요구했다. 통일민주당은 6월 30일 <헌법개정안 시안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헌 협상을 추진했다. 이때부터 야당은 사실상 국본에서 이탈했다. 개헌 협상의 전 과정은 여야 각 4인으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 맡겨졌다. 그들이 100여 개에 이르는 쟁점사항을 토의하고 협상함으로써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주요 내용은 권력구조와 선거규칙에 집중되었을 뿐, 실질적인 민주화 의제는 모호하게 정의되거나 제외되었다.

    반면 국본은 개헌의 기초가 되는 ‘헌법개정요강’(개헌요강)을 만드는 데도 1개월 이상 소요했다. 7월 13일 산하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는 “개헌협상에 임하는 여야가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촉구하는 ‘자문조직’이었을 따름이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운동조직은 아니었다. 8월 4일 국본 출범 이후 최초로 전국 총회가 개최되어 독자적인 개헌요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국 총회의 주요 방침은 ‘선거혁명론’이었다. 즉 야당을 통한 민간민선정부의 출범이 주요 목표가 되었고, 독자적인 개헌요강의 위력은 사실상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본의 요강은 여야 협상에서 무시되었고, 국본은 속수무책이었다.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과한 헌법개정안은 10월 29일 공포되었다.

    “야당은 직선제만 되면 권력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판단 아래, 개헌안과 대통령선거법에 민주적 요구와 민중의 지향을 담아내야 할 임무를 방기했다. 민족민주세력 또한 국민운동본부 등 몇몇 단체에서 개헌안을 작성, 발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로써 개헌안 확정과정은 대중투쟁의 기운을 제도정치권 내의 선거분위기 속에 가두어 질식시키는 계기의 하나로 되었다. 결국 이 기간 동안 군부독재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민중의 주체적 투쟁은 직선제를 합의해낸 여야 정치회담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기사연리포트4>.)

    표1

     

    1987년 대선, 군부독재의 재집권

    이제 6월 투쟁의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가 다가올수록 야당과 민중운동은 점점 더 큰 논란에 빠지게 되었다.

    8월 초까지는 후보단일화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압도적이었다. 양 김이 거듭 공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로울 수 없었다. 김영삼은 후보를 당 내에서 선출하기를 원했던 반면(원내전략), 김대중은 당 밖에서 ‘국민적 심판’으로 해결하고자 했다(원외전략).

    당시 김영삼은 군부세력의 쿠데타 가능성, 집권 여당에 의한 지역감정 유발 우려, 시기상 본인이 먼저 대통령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양보를 촉구했다. 이에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에 대한 공헌도, 국민적 지지 기반의 우세로 맞섰다. 결국 8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 창당선언을 발표하고(10월 28일),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11월 9일). 양 김씨는 단일화가 되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찼고 후보단일화에 대한 어떤 사회적 압력도 그 확신을 바꾸지 못했다.

    민중운동 역시 크게 나누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으로 분화했다. 민중운동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계기는 10월 12일 민통련 중앙위의 결정과 13일의 성명, ‘범국민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였다.

    그 근거는 첫째, 민중운동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성취하고 보수야당과 동등한 입장에서 민주연립이나 제휴를 추친하기 어려운 조건이므로 민중운동과 가까운 후보를 선택해 지지하고 진보적 요구와 정책을 관철시켜 나가야 한다. 둘째, 민주당 내에서 후보단일화가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재야의 힘을 한 쪽으로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론’은 즉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10월 12일 민통련 회원 44명 명의의 성명서는 “단순다수결에 의해 내려진 특정후보지지 표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했고, 가맹단체 가톨릭농민회도 그 결정이 오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11월 14일 <군정종식 단일화쟁취 국민협의회>(국협) 발기로 이어졌다. 이들 내부에도 민통련을 비판하고 후보단일화를 주장한 입장 내에서도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하나의 입장은 민통련이 “조급히 김대중 지지 선언을 하여 스스로 김대중의 한 지지세력으로 전락했다”며 비지론은 양 김씨에게 “제휴의 조건을 제시하여 양자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주장을 옹호, 지지하게 하는 유연하고 고차원적 전술과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한편 국협 발기와 같은 날 백기완 후보가 대선 후보 등록을 했다. 백기완 선본의 양 축은 제헌의회(CA)그룹과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었다.

    제헌의회그룹은 당면 시기가 혁명적 정세로 가까워지는 고양기이므로(3저호황 효과의 퇴조, 노동자투쟁의 가속화) 합법공간 내에 민중정당을 결성하고, 반(半)합법조직으로 혁명적 민주주의연합을 건설해야 하며, 선거공간 내 선전선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민노련은 선거시기 양대 과제가 ① 민족민주전선, 합법정당, 계급(계층)조직 결성, ② 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인데, ②의 과제는 ①의 과제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자후보를 출마시켜 ①의 임무에서 부르주아 정파에 원칙적 비판을 가하며, ②의 임무에서 부르주아 정파와 제휴하여 민주진영 전체의 후보를 단일화(민주연립정부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실제 대선시기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비판적 지지론의 경우 김대중 후보가 운동에 진보적 효과를 낼 것이라는 민중운동 상층부의 자기 판단에 근거하여 대중을 김대중 후보 지지로 동원하려는 활동방식을 택했다. 후보단일화의 경우 단식과 점거 등 대중적 압박을 가했지만 기본적으로 청원운동 성격이 강했다. 독자 후보의 경우 적지 않은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여러 장애를 뚫고 대중화로 나아기기에는 조직적 태세가 부족했다. 또한 군부종식 수립과 민주정부 수립이이라는 대중적 열망과 결합하기 위한 노력이 선거운동 중반부터 민주연립정부 전술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노선이 일관되고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후보단일화는 실패했고, 김영삼 후보는 2위, 김대중 후보는 3위를 했으며, 따라서 민주연립정부 수립도 성공하지 못했다. 각 진영에서 선거 후 내놓은 평가를 보자.

    △ 비판적 지지론을 폈던 민통련 내 일각의 평가

    “내부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상당수 단체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던 4개 단체의 의사를 존중하고 특히 더 많은 반대세력의 태동을 미리 예견하여 전체 민족민주세력의 입장을 종합해 나가기 위한 형식과 절차를 끈기 있게 밟아 나갔어야 했다.”

    “비판적 지지가 단일화의 유일무이한 방법론이 아니었음은 곧 증명되었다. 또 하나의 방안은 독자후보론으로 나타난 민주연립정부 제안 → 동참하는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방안이었다. 이런 방안이 검토되지 못했던 것은 ① 김대중으로 단일화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의 팽배, ② 독자후보 세력, 특히 민민투 계열에 대한 누적된 불신감, ③ 전략전술수립의 미성숙성, ④ 문익환, 백기완 씨 등의 미사면복권을 타파하려는 적극성의 부재에 기인했다.”

    △ 독자후보운동을 펼친 제헌의회 그룹

    “보수양당에 민주연립정부를 제안할 때 구체적이고 명확한 협정조건, 즉 민주연립정부 구성과 임무와 정책안을 상세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민연정 수립운동에 대중적 힘을 불어 넣게 위해서도 민족민주운동의 최소강령을 적극 선동하여 대중을 전취하고 보수양당의 불철저성을 선명히 폭로하면서 대중의 힘에 의해 양자를 견인해야 했다.” (1988년 3월, <기사연리포트5: 대통령선거투쟁>.)

    즉 민중운동의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 모두 철저한 자기 평가가 제출될 수밖에 없다. 명확한 자기 진단에서만 향후 운동 방향이 도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7년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6.29선언 후 타도대상이었던 군부독재는 협상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대선에서 경쟁 대상이 되었다. 1987년 한국의 6월 투쟁의 직접적 성과는 기실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최근 예를 보아도,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튀니지, 이집트의 경우, 대통령의 즉각 퇴진, 집권당 해체(주요 인사의 공직선거 출마금지), 기존 의회 해산과 제헌의회 선거가 이뤄졌다. 물론 이는 운동의 주체적 조건이 상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본에서 야당이 이탈한 후, 민통련과 노동자운동, 학생운동 세력은 스스로 새로운 국면을 열어낼 만큼 충분한 동원력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따라서 6월투쟁의 제한적 성과를 도약대로 삼아 2단계 투쟁국면을 열기 위해서는 명확한 정세인식과 투쟁, 조직노선에 관한 광범위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양 김이 6·29 직후 분열했던 것과 평행하여 민중운동도 입장이 점점 더 분화되기 시작하여,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간극이 더 커지게 되었다.

    한편 7-8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었으나, 야당이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민통련을 비롯해 기존 재야운동세력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987년 6월 투쟁의 최대 성과는 어쩌면 7-8월 노동자대투쟁 그 자체일 것이지만, 상호 조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또한 후보단일화의 가능성이 희박해진 9월 말 이후에야 ‘반독재투쟁 강화’ 요구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민중운동 진영은 ① 여야의 개헌 협상 과정에 독자 개헌요강을 성안했으나 어떤 직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고, ② 비판적 지지를 통해 민간민선정부 출범에 성공하지 못했고, 독자후보를 매개로 민주연립정부 수립도 강제하지 못했다.

    물론 1987년이 민중운동의 종말은 아니었다. 엄정한 자기 평가 속에 새로운 단계의 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헌신적 활동으로 나아갔다. 노동조합을 비롯해 계급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조직적 결실을 맺기도 했고(1990년 1월 전노협 건설),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1989년 1월 전민련 발족), 여러 논란 끝에 합법정당 건설도 현실이 되었다(1990년 11월 민중당 창당).

    또한 군부파시즘에 대항한 학생운동과 노동현장 이전을 거쳐 형성된 지식인 집단과 민주노조운동으로 부상한 선진노동자집단을 전국적 단일대오로 규합이고 이념과 강령, 규율로 무장한 혁명세력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계획으로서, 사회주의적 이념 지향을 지닌 노동자정당 건설이 추진되었다. 어찌 보면 이런 실천을 통해 87년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운동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16년 12월 1일 현재 상황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 후 새누리당은 역공세를 펼치며 국회 협상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야당은 여당의 공세에 동요하며 혼란을 겪고 있다. 물론 사회운동은 1987년 이후 외형적으로는 큰 성장을 이루었고 퇴진운동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나 여전히 국면을 이끌고 나갈 정치적 지도력이나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는 취약하다. 사회운동은 지금까지 폭로된 특혜, 특권, 비리, 부정, 이 모든 사안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조를 향한 대중적 운동으로 이끌고 나갈 방안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기실 ‘이게 나라냐’는 문제제기는 있으나, 그래서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뚜렷한 공감대가 대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아직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수 있는 개헌 국면이나 대선 국면에 통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투쟁노선에 관한 진정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고 전제하기도 어렵다.

    1987년의 민중운동은 아직 지혜와 경험이 아직 미숙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주체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으로부터, 우리 현실에 대해 더욱 냉철한 인식을 벼려내자. 3차 담화 이후 2단계 국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 기관지 <오늘보다>에도 함께 실릴 예정이다. <편집자>

    필자소개
    임필수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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